어린 시절 나의 조각들
정말 우연하고,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내리다
'우리 이혼했어요' 속의 한 장면을 보게 됐다.
일라이가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안아주는 아이의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결혼할 여자의 가정은 화목했으면 좋겠다"
라는 전 남자 친구의 말이 한동안 맴돌았다.
나도, 내가 결혼할 상대의 집안은 화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론 그 한 마디에 섬뜩하고도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어느 날, 방송된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는
가정불화 아래에 시달리는 두 자매가 출연했다.
둘이 싸우는 상황에서, 애써 다른 짓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과거의 나와 내 동생이 떠올랐다
그 영상을 보고서, 나와 내 여동생이 끈끈한 이유를 다시금 알게 됐다.
근본적으로 싸움에 집중한 부모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른체하지만, 다 아는 어른들의 이야기들.
지금은 일말의 추억정도로 여기는 그들의 이야기들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우연히 사진 속 찍힌 나의 얼굴로 '추억이 아님'이 대변된다.
그것은 그들의 추억과 들추어내고 싶은 과거도 아닌,
어린아이에게는 단지 '상처'였을 뿐.
내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8할이 엄마, 아빠 탓이라고 여겼다.
나머지 2할을 어떻게 잘 굴려보고, 뒤집어볼 경우에만
결혼할 마음이 생겼다.
남자에게 상처 주고, 남자 때문에 가끔씩
멘털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이상하게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하니"
헤어짐과 이별을 너무 어렸을 때부터,
사랑보다 일찍 배운 아이들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이별의 두려움이 더 크다.
동일하게,
내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행복하게 사랑 속에서 키울 수 있다는 희망보단
내 아이에게 더 좋은 걸 입히고,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다는 욕망보단
나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크다.
전 남자친구들이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내 머릿속은 늘 그 불안 속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확인받고 싶어 상대에게 무심코 상처 줬던 말들이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혀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소설 '착한 수프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 속
한 문장,
"나는 사랑할 수 없도록 태어났다"
연애를 끝날 때마다, 나는 늘 일기장에 적곤 한다.
나를 떠난, 내가 떠난 남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우리의 연애의 끝은 항상 나의 불안에서 마침표가 지어졌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선 안 된다"
이렇게 하명희 작가님과의 평행이론을 세우며,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