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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맨션 Apr 13. 2022

늦었다는 감각

감각의 조각집 - 01

늦었다는 감각

 - 숫자의 세계 속 살아남기



  세상은 숫자의 세계입니다. 적어도 저의 세상은 그렇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6등을 했는데, 3 안에 들지 못하니 공부를 잘한다고 하기에도, 20 밖이 아니니 공부를 못한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때부터일까요? 저는 숫자의 세계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의 머리 위로 등수가 보이고, 교과서마다 표지에 저의 등급이 새겨있는 듯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아니라고 하지만 저에게 숫자는  정체성이었습니다. ‘3학년 11 26 6이렇게 말이죠. 학창 시절 숫자는 학교에만 존재했는데, 사회에 나오니  숫자로 가득합니다. 정말이지 세상은 숫자의 세계입니다.


   ‘26살 월 #억 자산 달성’

   ‘구독자 ##만 명 이벤트’

   ‘28살 #채 아파트 매매 성공’


   ‘####’  이상 숫자의 크기를 가늠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 살에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었다 같이 나이에 한계를 두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런 문구에 자주 현혹됩니다. 타인의 성과 안에 숨겨져 있는 나이를 보며 안도하거나 조급해합니다. 올해는 유독 제가 뒤처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개인 작업에 집중하다보니 어디서 막내 하기에 어정쩡한 나이에 놓였고, 재테크니 ,브랜딩이니 시작하려니 포화상태로 제가  곳은 없어 보입니다. 정신없는 교차로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있습니다. 6등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조급,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그때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습니다. ‘ 작년에도 이러고 있었는데 순간, 과거에 중도 포기한 나와 달라지지 못한 내가 만났습니다. 불안을 느낄 때면 운동, 재테크, 공부에 관심을 가지다 눈앞에 급한 일이 닥치면 손쉽게 포기해왔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해서 달라진 사람들이  멀리 뛰어가고 있습니다. 늦은 걸까요.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인생이 마라톤경주라면   등일까요. 제가 뛰고 있긴 할까요? 무엇이든 꾸준히 했으면 지금쯤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저를 짓누르고 과거의  자신을 미워합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여러 시작을   결과 ‘시작 ‘시작입니다. 앞서 달려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다 마라톤 경주에서 주저앉았습니다. 뛰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거든요.


   얼마 전, 지방에서 일정을 마치고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도착할 때가 되니 하늘은 어둑해지고 낮달이 떠 있었습니다. 기차가 속력을 내어도 낮달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저를 따라왔습니다. 건물에 가려져 안 보일 때면 잘 따라오나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 시간을 체크하고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어플 오류인지 10분 남았다는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이 '곧 도착'으로 바뀌었습니다. 버스를 잡으려 헐레벌떡 뛰다 지방에서 사 온 빵이 가방에서 쏟아졌습니다. 빵을 줍는 새 타려던 버스는 출발했고, 멀어지는 버스의 뒤 꽁지를 보며 가방에 빵을 마저 담았습니다. 저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던 달은 맞은 편 건물에 걸려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버스의 시간이 떴습니다. 놓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다음 버스도 오니까요. 달도 제가 뛸 때 맞추어 달려주었을까요. 어떨 땐 당연함이 위로되기도 합니다.


   그 날 이후 저녁이 되면 달을 봅니다. 여전히 저희 세상은 숫자로 가득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에 숫자만큼 편리하고 손쉬운 것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숫자와 누군가의 성과에 집착하는 날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달이 저를 계속 바라보듯 저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숫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숫자를 저에게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운동 30분씩 하기.

   일 년 안에 브런치 글 30개 올리기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 늦은 건 없겠죠. 조금씩 나아질 것만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에 새기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숫자를 저에게 가지고 오니 마음이 조금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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