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2008년 KBS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좋아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 나는 어려서 그들이 얘기하는 ‘사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물들이 사랑하는 드라마 현장은 멋있어 보였다.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는 경광봉을 든 여성 스탭이 4차선 도로를 통제하고 차들을 우회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인물은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라서 카메라에 스칠 뿐이었는데 오래도록 기억 속에 콕 박혀 나의 꿈을 결정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를 선택했고, 누군가 왜 영화를 하느냐고 물어보면 우스갯소리로 현장이 멋있지 않냐고 대답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없던 체력도 생기고 무거운 짐도 거뜬하게 옮기는 드라마 속 스탭처럼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 수록 체력은 약해지고, 현장보단 워드를 켜고 글 쓰는 걸 더 즐긴다. 더 즐긴다는 것이지 촬영장이 싫어진 건 아니다. 여전히 현장이 주는 치열함과 복잡함을 열망한다.
제작일지 시리즈의 <시작할 시간>에 적었다시피 이번 촬영장의 컨셉은 ‘우리만의 속도’다.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다. 속도를 늦춘다고 해서 덜 치열하거나 덜 복잡하지 않다. 누구의 마음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목표로 4주에 걸쳐 영화를 찍었고 우리 나름대로 뜨거웠다. 빠르지 않아도, 고성이 오가지 않아도 치열했던 우리의 현장을 적어본다.
“우연이 나에게 오기를”
제작일지 시리즈 중 <장소를 볼 시간>에 ‘우연’과 관련된 글을 썼다. 이번 촬영에서도 우연을 빌었다. 시나리오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장면이 있어 비 내릴 타이밍을 기다려야 했다. 이것이 얼마나 무모했냐면, 주말 안에 비가 쏟아지듯 내려야 하고, 밤에 오면 안 되고, 오전이나 오후에 와야 했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의 간절함을 들었는지 촬영 첫째 주에 비가 내렸다. 우리는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차로 3분 거리인 촬영장소로 이동했는데, 이동하는 동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우선 찍자!’ 해서 찍었는데, 화면에 빗줄기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스탭들은 장비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본인의 몸이 젖은 줄도 모르고 움직였다. 그렇게 쫄딱 젖은 상태로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샤워하는데 하늘의 장난인지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젖은 머리를 대충 감싸고 서둘러 차에 타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장난을 친 거다. 우리가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해가 떴다. 아쉽지만 비가 내려준 게 어디냐며 처음에 찍었던 촬영본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촬영 3주 차가 되었을 때 실내를 찍고 있는데 비가 거세게 내렸다. 금방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였다. ‘1주 차에도 이렇게 비가 내려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스탭 중 한 명이 찍고 싶으면 지금 가서 찍자고 제안했다. 다시 한번 하늘에 이 우연이 지속되기를 빌었다.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주기를. 우리에게 장난치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우리는 이렇게 3차 시도 만에 비가 내리는 장면을 만족스럽게 건질 수 있었다. 끈질긴 우리의 치열함이었다.
“상실된 만큼 채워지는 것”
제작일지 시리즈 중 <콘티를 짤 시간>에서 '촬영이 되는 순간 시나리오에 있는 것들이 상실된다’는 에릭 로메르의 말을 빌렸었다. 이번 촬영장에서도 몇 가지들이 상실되었다. 시나리오에 남자 주인공이 퇴근하고 옥탑 난간에 기대어 노을을 보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의 어깨를 걸고 건물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찍고 싶었다. 그러나 구름과 미세먼지가 좀처럼 도와주지 않아 그 장면은 시나리오의 글만큼 찍히지 못했다. (결국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렇게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현장에서 채워지는 것이 있다. 앞서 적은 우연히 맞아떨어진 날씨도 있지만, 배우들의 노력으로 채워지는 것들도 있다. 이번 현장에서도 배우들의 공이 컸다. <배우를 만날 시간>에도 적었지만, 배우들은 누워있는 글을 일으켜 세워 장면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온 대사들은 하나도 상실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부분이 메워졌다. 그러니 현장에서 상실되는 만큼 많은 것이 채워진다.
“사소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촬영할 시간>을 작성하기 전 그동안 썼던 글들을 살펴봤다. 그중 마음에 드는 편은 아무래도 <시나리오 쓸 시간>인 것 같다. 그 글에 나의 ‘사소함에 대한 애정’을 담고 싶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의 대부분은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촬영했던 2021년 8월을 생각하면 충만했던 기억들로 가득한데, 그 기억은 또 사소한 순간들이 채워준다. 몇 안 되는 스텝들이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라가다 잠시 평지에 걸터앉아 물을 마셨던 장면.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그날 찍은 촬영본을 돌려보던 장면. 숲속 촬영을 하는 동안 모기에 물려 약을 발랐던 장면. 특별하지 않은 기억들이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만 마신 게, 밥만 먹은 게, 약만 발랐던 게 아니었다. 물을 마시며 옆에 앉은 동료의 짐을 더 들겠다고 제안했고, 식사하며 돌려본 촬영본에 담긴 서로의 공을 칭찬했고, 저녁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모기에 더 물리진 않을까 서로를 걱정했다. 사소한 장면 안에 담긴 따뜻한 마음들을 좋아했다. 그러니 사소하다고만 말할 순 없다.
우리는 뜨거운 8월에 시작하여 점차 시원한 바람이 부는 9월을 맞이하며 촬영을 끝냈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진 않았어도 의견 충돌이 있었고, 녹초가 될 만큼 몸을 갈아 넣지 않더라도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했다. 우리의 속도를 지켜냈다. 이렇게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마치고 조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시 이렇게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과 간절함에서 비롯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후회는 없다. 우리는 충분히 열심히 했고 서로의 속도를 지켜줬고, 현장(촬영)이 준 에너지 덕에 각자의 위치에서 햇볕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더라도 그 자리가 햇볕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