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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맨션 May 23. 2022

7.일촬표를 만들 시간

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07. 일촬표를 만들 시간 - 오늘 할 수 있는 일부터


    몇 년이 지나도 MBTI 열풍이 지속되고 있다.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구분했던 과거에 비하면 4가지 유형에서 16가지로 늘었으니 다양해졌다. MBTI 유형별 콘텐츠가 쉼 없이 쏟아지고 나 또한 즐겨보며 소비한다. 사람을 16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 자신을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편리하다. 나의 MBTI의 마지막 알파벳은 ‘J’다. 마지막 알파벳은 P 아니면 J인데, 통상적으로 P는 즉흥적이고 J는 계획적이라고 말한다. 맞다.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나의 하루를 지켜보면 내가 계획에 미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다이어리를 펼쳐서 계획표를 작성했었다. 20대가 되어서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명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었다. (지금은 그 리스트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알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오늘 해야 할 일을 투두리스트에 정리한다. 아!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문단별로 어떤 내용을 담을지 구성안을 작성했다. ‘P’ 즉흥형 인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진절머리를 친다. 어떻게 매사 계획을 짜냐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해야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아침에 눈을 뜨면 반사적으로 오전에 무엇을 할지, 오후에 어떤 것을 하면 효율적일지 생각한다. 계획을 짠다고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나는 계획 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러니 영화 작업을 할 때도 일촬표(일일촬영계획표)를 작성하는 것을 즐긴다. 


    <햇볕을 볼 시간>은 한달동안 주말 내내 찍는 8회차 스케줄이었다. 3-4회차에 끝낼 수 있는 영화를 여유롭게 찍는 터라 일촬표를 작성하는데 어려운 것이 없었다. 예산과 시간이 부족한 영화의 일촬표를 작성할 때는 골머리를  써야한다. 영화를 찍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스케줄은 여유로우니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찍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계획형 인간으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기회였다. P들이 J를 놀릴 때 하는 말이 있다. J 들은 계획한 대로 안 되면 당황할 것이라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J들은 플랜A부터 적어도 C까지 있다. 그러니 불안하거나 당황할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플랜A부터 Z까지 있어도 해결할 수 없는 최대의 빌런이 나타났다. 바로 ‘코로나’다.


    영화를 준비할 당시 4차 코로나 대유행이 찾아오면서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2021년 8월, 나날이 늘어나는 확진자 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건너 아는 지인이 확진되거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 격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불안감이 커졌다. 행복할 일밖에 없는 이 촬영에서 최대의 난제는 예상할 수 없는 코로나였다. 적은 수의 스탭으로 진행하다 보니 누구 한명이라도 코로나에 걸리면 촬영이 중단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탭이며 배우들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전화로 불행이 날아올까 조마조마했다. 촬영 기간 동안 누구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아니 확진자와 접촉하지 않고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가령 2주 정도 촬영이 진행 되었는데 3주차에 누구라도 걸리면 어쩌지. 걱정은 걱정을 만들고 불안은 더 큰 불안을 야기시켰다. 코로나로 인해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 팀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확진되지 않았고 밀접 접촉자는 없었다.


    누군가 확진이 되었더라면 이 글은 스펙타클했겠지만 <햇볕을 볼 시간> 청룡 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나는 안전바를 열고 뛰어내렸을 것이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한 청룡 열차에서 했던 나의 일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였다. 소품을 만들어야 한다면 재료를 샀고, 장소를 찾아야 하면 지도를 펼쳤다. 장비를 대여해야 한다면 예약전화를 했다. 코로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다. 코로나로 인해 장소를 대여하기 어려워졌다는 것부터 감염에 대한 걱정이 높아진 이웃들에게 촬영 협조를 얻기 어려워졌다는 것까지. 수없이 많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무엇하나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년 1개월 만에 거리두기가 풀린 이 시점이 글을 쓰려니 감회가 새롭다. 계획형 J도 즉흥형 P도 어쩔 수 없는 코로나를 견디며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견디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오늘 만났던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이 되었을까. 오늘 내가 탔던 버스는 안전할까. 매 순간을 의심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견뎌내서 영화를 완성했지만 제2의 코로나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안전하게 그리고 신뢰 속에서 즐기며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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