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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맨션 May 16. 2022

6.콘티를 짤 시간

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06. 콘티를 짤 시간 - 뭔가 다른 것이 각색 되어 버리죠



  -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에 아무리 서럽게 울어도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있고 싶어서 우는 건 아니다.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소설가의 단편 중 가장 좋아하는 <그 남자네 집>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마다 상상 속 장면이 다를 것이다. 인물이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어깨를 부여잡을 수도 있고, 맞은 편에 앉은 사내 몰래 흐르는 눈물을 훔쳤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닌 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글이라고 누가 상상하는지에 따라 다른 장면이 탄생한다. 눈물을 슬쩍 훔치는 장면을 영화로 찍는다고 가정할 때, 카메라는 인물의 뒷모습을 담을 수도 있고 맞은 편에 앉은 사내의 반응을 위주로 찍을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답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두렵게 느껴진다. 





    위의 내용은 <햇볕을 볼 시간>의 시나리오 일부다. 촬영감독과 나는 주인공인 현수와 재경이 만나는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고민했다. 기다리고 있는 재경부터 담을지 아니면 빌라촌에서 전자바이크를 타는 현수부터 담을지, 무엇이 효과적일지 생각했다. 관객에게 재경부터 보여준다면 샷 사이즈는 어떻게 할지 등등. 글자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역시 정답은 없다. 답이 없기에 가졌던 흥미는 한 차례 가시고 공포가 엄습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활자와 나만 남겨진 채 페이지 위로 검은 글씨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막상 그림을 만들려니 어려운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제작적인 문제 (돈, 장소, 인력 등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막막한 것은 관객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상상해본다. 와인색 푹신한 의자에 앉아 우리의 영화를 보고 있을 누군가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이 어떠할지. 물론 상상 속 관객이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힌트라도. 힌트는 어디에 있을까. 


    어렷을 적, 수학 문제집을 풀다 이해가 안 되어서 엄마에게 가져가면 엄마는 나에게 문제를 소리내서 읽으라고 했다. 소리 내서 차근차근 읽었을 뿐인데 단번에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힌트는 문제 안에 있다. 즉 시나리오 안에 있고, 그동안 구성했던 콘티가 품고 있다.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 시나리오와 콘티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치 ‘윌리를 찾아서’를 볼 때처럼 말이다. 그러면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이상한 것이 보이기도 한다. 숨어있는 윌리를 찾아서, 온종일 시나리오와 콘티지를 들여다봤다. 상상 속 관객이 웃을 때까지. 

*윌리를 찾아서 - 커다란 일러스트 속에 깨알같이 숨어있는 윌리를 찾는 큰 서적


    마음산책에서 펴낸 <에릭로메르의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텍스트를 쓰고 어느 수준까지 그 완성도를 높였다고 해도 영화를 통해 그것이 상실되는 게 당연시됩니다. 영화로 가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각색되어 버리죠.’ 콘티 작업이 시작되면서 내 안에 있는 불안들이 조금씩 자라났다. 글보다 못한 그림을 담아낼까 두려웠다. 또는 촬영감독과 몇 날 며칠 구상한 콘티를 환경적인 문제로 촬영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걱정과 불안이 커질 때면 에릭로메르의 구절을 읊는다.


    ‘뭔가 다른 것이 각색 되어 버리죠’ 


   상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각색하는 것, 꽤 멋있는 일이다. 정답은 우리 안에 있다. <햇볕을 볼 시간> 청룡열차는 서서히 출발했고, 우리는 콘티와 시나리오라는 안전바를 착용하고 몸을 맡겼다. 상실 속에서 우리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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