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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맨션 May 09. 2022

5.배우를 만날 시간

단편영화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 제작일지

<햇볕을 볼 시간>은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다. 





05. 배우를 만날 시간 - 상상 속에 존재했던 것이 살아 움직이는 


    중학교 3학년, 국어 선생님은 출석번호를 부르며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나 시를 낭독하도록 시켰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낭독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단어들을 나열하듯 읽거나 숨을 참으며 쉼표를 무시하고 읽었다. 낭독 시간이 곤욕스러운 건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졸음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나 또한 30명이 넘은 아이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이 부끄러워 그들과 다를 건 없었다. 그런데 출석번호 32번 친구는 우리와 달랐다. 작은따옴표와 큰따옴표를 구분해서 읽었고, 단락이 넘어갈 때는 한 템포 쉬었다가 읽었다. 듣는 친구들의 속도에 맞추어 낭독을 이어갔다. 미리 소설을 읽어온 건지, 강조해야 할 단어에는 약간의 힘을 실어서 목소리를 냈다. 32번의 낭독을 들으며 ‘글’이 누구의 입을 통해 읽히느냐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메마른 감정으로 나열한 활자로는 글의 가치를 느낄 수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중요한 여러 요소들이 있다. 나는 그 중 시나리오를 읽어 줄 사람, 배우와의 작업을 좋아한다. 캐스팅 작업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었다. 종이에 누워있던 글이 훨훨 날아 움직이려면 32번과 같이 쉼표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배우를 찾아야 한다. 글을 누가 읽냐에 따라 천지 차이라는 것을 어린 날 몸소 깨달았기 때문에 배우와의 작업에 집착한다. (32번 학생이 읽으면 국어 시간에 졸지 않고 깨어있었다.)


     <햇볕을 볼 시간>은 배우와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여서 따로 캐스팅을 진행 할 필요는 없었다. 주인공 배우들과는 이전에도 함께 작업을 했었다. 그들이 누워있던 글을 일으키는 순간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미 배우가 결정된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상상하고, 상상 속에 날아다니는 글을 옮겨적었다. 배우들에게 맞춰진 글을 썼다고 자부했지만, 첫 리딩은 늘 떨렸다. 1시간 정도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시간을 소모하고 나서야 리딩을 시작했다. 배우들은 박혀있던 활자들을 연처럼 하늘에 훨훨 날리며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더 해 근사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처음부터 연출과 배우의 생각이 일치하진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생각을 열고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리딩(리허설)은 늘 흥미롭고 재미있다.


      ‘재경역의 김예지 배우는 나와 2017년부터 5개의 단편영화를 함께했다. 그녀의 연기 스타일과 성격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번 영화의 나의 무기였다. 그녀는 호빵맨처럼 인물에게 자신의 부분을 떼어준다. 평평하게 누워있는 인물을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숨을 불어넣어 영화가 끝나도 주위에 살고 있을 거라 믿게 된다.  마음은 영화를 만드는데  동력이 된다. 인물을 소모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의 친구처럼 여기게 된다. 그러니 영화를 만들  지치더라도 어딘가 존재할 친구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게 된다. 인물들에게 호흡을 나눠주는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현수역의 재원 배우 또한 자신의 숨을 나눈다. 2020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그가 짧게 출연한 단편영화를 보고 함께 작업하자고 연락했다.  이후 단편영화 <한비> 찍고 <햇볕을  시간> 작업하게 되었다. 그는 역할에 뜨겁게 파고든다. 본인이 인물에게 닿을 때까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고뇌를 통해 살아난 인물은 쉽게 눕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살고 있다고 믿을  밖에 없다. 이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할  있었던 , 작년 여름 ‘영화  선물이었다.


    만질 수 없는 것이, 그저 나의 상상 속에 존재했던 것이 살아 움직이는 첫 번째 관문은 ‘배우’가 아닐까. 누가 읽느냐,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득 32번 학생이 뭐 하고 지낼까 궁금하다. 배우가 되었다면 그녀와도 함께 작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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