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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 Apr 21. 2024

오 포르투나

그리고 서커스단의 소녀

운명의 신은 그 변덕스러운 성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어떤 그림에선 날개 달린 대머리 사내의 모습으로, 또 다른 작품에선 바퀴를 굴리는 귀부인이나 벌거벗고 구 위에 선 미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꾼들이 신화를 짜낼 때부터 공존해왔던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며 자연스래 생겨난 것들이에요. 그림을 봅시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카이로스], 1545, 프레스

이 그림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피렌체의 베끼오 궁전에 그린 벽화의 일부분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길고 풍성하게 자란 앞머리와는 다르게 털 한 오라기 찾아볼 수 없이 맨질맨질한 뒤통수는 한 번 떠나간 기회는 다시 붙잡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며, 등과 발에 돋은 날개는 기회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중세에 와서는 그리스·로마의 신들이나 지방의 수호신들과 같은 여러 pagan gods, 즉 비기독교적 신들의 이미지가 한 차례 크게 변화합니다.  탄압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던 기독교인들은 무턱대고 기존 신앙과 대립하는 대신 사람들이 믿어왔던 신들을 야훼가 보낸 천사 내지는 성인들로 둔갑시켰어요. 운명의 신 또한 예외는 아니었죠. 이 시기에 운명의 신은 바퀴를 굴리는 귀부인으로 묘사되었는데, 기도하듯 두 손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거나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는 운명의 신이 야훼의 명을 따라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작자 미상, [운명의 여신과 바퀴], 13세기 작품으로 추정

이 그림은 중세 성기 (high middle ages) 에 쓰인 시와 노래 모음집 [카르미나 부라나]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던 삽화로, 운명의 여신과 그녀의 바퀴가 나타나 있습니다. 바퀴에는 왕들이 매달려 있는데, 바퀴가 돌아가며 그들의 위치가 바뀌고 있어요. 왕관을 쓰고 군림하던 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저 아래에서 짓눌려 있던 이는 꼭대기로 올라가며, 모든 것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의 뜻대로!

O fortuna velut luna statu variabilis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오 운명이여, 변덕스러운 달과 같이, 항상 차오르고 또 기우누나.

피렌체의 루첼라이 가문 사람들은 원래 용병 일로 먹고살았는데, 그 중 알라만노라는 이가 이끼에서 귀한 염료를 뽑아내는 방법을 발명해 떼돈을 벌어 가문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사진을 볼까요?

작자 미상, [베일을 든 포르투나], 1450ca.

루첼라이 궁전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의 일부분입니다. 배 위에 알몸으로 서서 팽팽하게 부푼 돛을 붙잡고 있는 여인이 보여요. 헤어스타일이 굉장히 낯익은데, 뒤통수는 반질반질하고 앞머리만 길게 자라 비죽 솟아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모습과 똑같죠. 이 문장은 궁전이 지어질 당시,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인데, 어째서 운명의 신은 바퀴를 굴리는 귀부인이 아닌 민머리 고대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요?


[Virtuti fortuna comes]라는 말이 있어요. 라틴어로 덕 있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뜻인데,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이 오래된 격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행운이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기회를 찾아나서는 것이 더 '덕 있는' 행동이라 여겼어요. 루첼라이 가문 사람들도 그들이 염료 무역을 통해 이뤄성공이 신께서 보우하사 거둘 있었던 성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그는 중세 사람들의 신에 대한 믿음이 르네상스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변화함에 따라 운명의 형상 또한 노력하는 자에게 미소짓는 고대의 그것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 시기의 여러 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그림을 봅시다.

파올로 파리나티, [포르투나를 이끄는 헤르메스], 1590ca, 프레스코.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운명의 여신이 뱃머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배를 끌고 가려는 그녀의 앞머리를 누군가가 틀어쥐고 방향을 틀라 명령하고 있어요. 그여행자들의 수호신이자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로 예로부터 운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신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포르투나의 전신인 행운의 여신 튀케가 태어났다고 믿었으며 뜻밖의 기쁜 일을 에르마이온, 즉 헤르메스의 선물이라 불렀습니다. 로마인들 또한 헤르메스가 포르투나를 잘 구슬려 상행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곤 했어요. 그러나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사람들은 헤르메스가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이끌고 말을 옮긴다는 점에 더 집중해 곧 그를 변화의 인도자이자 지식의 전파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여러 예술가들은 헤르메스를 운명의 변덕으로부터 뭇사람을 지키는 존재, 즉 포르투나의 대적자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법학자이자 작가였던 안드레아 알챠토는 저서 [엠블레마타]에서 예로부터 사용되어 온 여러 도상들이 뜻하는 바를 삽화와 시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림을 봅시다.

작자 미상, [헤르메스와 포르투나] 또는 [예술과 자연], 1530ca.

작은 구 위에 한 발로 서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는 포르투나는 예측을 불허하는 운명, 자연, 혼돈을 의미하는 반면, 정육면체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헤르메스는 변치 않는 진리, 사람의 지성, 질서를 나타냅니다. 헤르메스는 전령, 즉 말을 전하는 신이었습니다. 말은 곧 지성의 표출이며, 예술 또한 그렇죠. 알챠토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운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며,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그런 작품들에 대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시 일부를 아래에 옮깁니다.

(전략) sed artis
Cum fortuna mala est, saepe requirit opem.
Disce bona artes igitur studiosa iuventus (후략)
그러나 운명이 미소짓지 않을 때 예술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그러니 그대 젊은이들은 좋은 예술에 대해 배워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공 위의 소녀], 1905,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파블로 피카소의 절친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 그림을 보고 저서 [입체파 화가들]에서 "그림 안에서 예측불허함과 변화무쌍함이 조용한 의식을 민첩하게 치르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변화무쌍과 예측불허는 물론 공 위에서 균형잡기 연습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를 두고 한 말이었겠지만, 우리는 그런 특징을 가진 존재를 하나 더 알고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이죠. 하지만 이 소녀가 운명의 여신의 심볼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요? 앞머리가 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퀴나 베일을 들고 있지도 않잖아요.


이 여자아이를 운명의 여신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그녀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 남자입니다. 육면체 위에 앉은 남자와 구 위에 선 여자의 상반되는 이미지는 알챠토의 삽화에서 본 것과 똑같아요. 피카소가 알챠토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공 위의 소녀]를 그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림의 모티프, 외형적 특징일치한다는 것이 단지 우연의 산물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화가는 부활절 달걀을 숨기는 토끼의 심정으로 깔깔대며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헤르메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카두케우스 또는 케뤼케이온이라 불리는데, 이것과 생김새가 비슷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자주 혼동되고는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육군 의무병과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카두세우스를 자신들의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헤르메스는 하데스와 같이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이끄는 신이기도 하므로 그의 지팡이를 의료단체의 심볼로 사용하는 것은 썩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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