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와 생략의 교육
교육과정 중에 "영 교육과정"이 있다. 이 개념이 시작된 역사적 맥락과 배경에도 생각 지푸라기가 많았지만, 오늘은 이 특별한 교육과정 자체에 주목하려 한다. 처음 이 말을 만났을 때 "영"이란 말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숫자일까 하다가 설마... 들어본 적 없는 특별한 뜻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 0, 그러니까 "없다"라는 뜻임을 알고는 피식 웃었더랬다. 하지만, 그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무게와 크기 때문에 마음이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영" 교육과정 이란 이름은 그 뜻이 매우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그냥 숫자 0이 가진 원초적인 뜻처럼 "없다"는 것이다. 교육의 흐름 그러니까 출발과 과정, 이후라는 차원을 생략하고 결과로서 드러난 모습만 가리킨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null"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아마도 프로그램하는 분들은 이 단어를 흔히 만날 것인데, 그 영역에서의 의미에 더 가깝다. null은 단순히 "없다"는 의미보다는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값이 없다"거나 "정해지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문자열이 비어있다는 의미와 구별되는 것이다.
분야별로 null이 발생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교육학에서는 크게 소극적/적극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곤 한다. 소극적이란 어쩔 수 없이 발생할 때를 가리킨다. 교육에서는 가르칠 것은 많은데, 시간 같은 조건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르치지 못하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교육과정 개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업 현장에서는 이미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거친 결과만 만나기에 교사나 학생 모두 치열한 과정을 모르지만 결국 어떤 교과, 어떤 교육내용은 배울 수 없는 일이 늘 발생한다. 교실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의 교사가 동일한 수업계획으로 같은 수업을 진행해도 학급 상황, 수업 시간대, 당일의 교사 상태, 돌발 상황으로 수업 내용 가운데 배제와 생략, 선택은 항상 발생한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기회비용이란 말과 비슷하게 기회학습을 놓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일은 피할 수 없고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결정하는 과정이야 치열하겠지만 결과는 대개 수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적극적 배제는 다르다.
적극적 배제 사례는 매우 많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역사 교과서 이슈를 떠올릴 수 있다. 영 교육과정은 배제만이 아니라 의도적인 삽입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배제하는 경우란 결국 다른 어떤 것을 더 넣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 이슈처럼 정부든, 기업이든 힘을 가진 세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교육을 장악하려 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인데, 대부분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며, 말 잘 듣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기업 또한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사원을 만드는 것이 직업 연수의 목적인 것을 동일하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거짓말이다. 정치로부터, 종교로부터, 사회적 필요로부터 교육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중립"이라는 거짓 포장지로 이것저것 많이도 삭제한다. 사실 영 교육과정이 처음 등장했을 때 중점은 쉽게 말해 국영수 같은 핵심과목을 강조하다 보니 음미체 같은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덜 중요한 교과들이 배제되는 문제였다. 영 교육과정의 발견은 교육은 의도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결과이든, 배제이든 삽입이든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영 교육의 문제를 인식하고, 어떻게 교육 안팎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힘의 영향력에서 바람직한 방향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무언가 있어야 할 곳인데 채워지지 못했다. 유효한 값이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배제와 삭제가 발생하고, 동시에 선택적 삽입 또한 발생한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영 교육의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반복되고, 지속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있어야 할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매우 불행하고 무서운 결과가 따라온다. 아버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지속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경상도 사나이라서, 오글거려서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상황이 오래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일상에서도 나름대로는 배제와 생략의 이유가 분명하지만 결국 관계가 깨지는 위험한 상황까지 이를 수 있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배제와 생략은 때로 정말 위험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첨예한 이슈여서 대화를 꺼린다면 그것 때문에 순간적으로는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결국 대화와 합의라는 성숙한 역량은 갖지 못하고 각자의 이념이 계속 강화되고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교육과정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와 대화가 매우 중요한데, 정권마다 이념과 가치가 다르다 보니 교육은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떠다니기 일쑤이다.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정부와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각 교과 책임자들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념과 사상의 충돌은 물론이고 당장 학교 현장에서는 시수와 교과 교사의 분배와 비중, 쉽게 말해 밥그릇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종적인 교육과정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이제 막 귀향한 상처 투성이 군인에 가깝다.
이미 글이 길어졌지만, 영 교육과정 관련해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생각할 수도 마음과 생각이 복잡해지고 답답해진다. 점점 만성 질환이 되어가는 느낌이며, 암세포를 키워가는 느낌도 받는다. 교육은 "영(null)"의 의미와 이유, 과정을 무겁게 인식하고 성찰해야 한다. 교육뿐일까? 나의 삶에서도 수시로 발생하는 "영"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의 나는 결국 "영"에 대한 나의 인식과 태도의 결과이다. 시간도 돈도, 인간됨도, 가치관도... 나라는 존재는, 우리라는 관계는, 사회라는 현상은 "영"을 다루어 온 기술의 결과이며, 그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다. 생각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넓혀갈 수 있지만, 그럴 용기도 없고 역량도 되지 않는다. "영"은 비우고 없어서 가벼워야 하는데 이렇게 무거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