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레레

교육한다 = 삶과 이야기를 꽃피운다

by 지평선


스푸트니크 쇼크 이전까지 미국의 교육과정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교육과정을 “일선 교사들이 따라야 할 교육과정 편성 절차를 개발하는 일”, 곧 <개발> 패러다임으로 본 것입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시작된 학문중심교육과정 또한 이 패러다임 안에 있습니다. 개발 패러다임을 튼튼하게 만든 대표적인 두 인물이 타일러와 브루너라는 학자인데, 이들의 이론이 오늘의 교육과정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것을 보면 지금의 교육도 개발 패러다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교육과정학은 과학, 수학, 심리학 같은 타학문에게 자리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실 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과학기술과 군사력 경쟁의 유탄을 맞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스푸트니크 쇼크 외에도 교육이 정치나 경제, 이념의 도구로 전락한 사례는 많습니다. 지난 이야기지만 사회적 상황이 정치 이슈가 되면서 성품교육이라는 이상한 교육과정이 생겼고, 경제논리와 정치논리가 맞물려 차별적 무상급식이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 교과서도 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교육도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이고 학문의 영역입니다. 교육학자들이, 교육과정학자들이 보는 교육의 모습이 있고, 사회와 시대 상황에 맞추어 적정 교육을 찾아가는 공동의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냉전시대라는 상황이 정부가 교육을 머슴처럼 부리게 하였고, 국민들이 이에 동의했으며, 결국 교육에서 교육학자들이 배제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논리, 실용논리, 정치논리 같은 평범한 삶에서 더 많이 경험하는 익숙한 상황들에 더 민감합니다. (학교) 교육이라는 일상적 경험과 달리 교육학, 교육과정학은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체를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중요성이나 필요성은 물론이고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지는 실제 모습도 알기 어렵습니다.




교육학자들이 교육의 자리를 빼앗긴 절박한 상황에서 한 무리의 젊은 교육과정학자들이 의미 있는 도전을 합니다. 이들을 "재개념주의자/재개념학파"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전까지 절차를 편성하고 개발하는 것으로 이해하던 교육과정의 역사를 되돌아보았고, 뼈저린 성찰을 하면서 교육과정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교육의 길을 만드는 교육과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결국 이들을 통해 교육과정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를 "이해"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개념학파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한 학자는 윌리암 파이나입니다. 재개념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나름의 성찰을 바탕으로 정말 다양한 교육과정의 길을 제시했는데, 윌리암 파이나는 꾸레레(또는 쿠레레)라는 어원에서 교육의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꾸레레(currere)는 교육과정으로 번역하는 Curriculum의 어원인데 그 의미는 "달리다"입니다. 경기장을 달리는 경주마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재개념주의 이전까지 교육과정은 같은 단어를 효과적인 "경기장"을 만드는 것(개발)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나는 그러한 이해가 잘못되었고, 경기장이나 경주로가 아닌 경주자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경주자(학생) 하나하나의 경험과 이야기에 주목하고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꾸레레, 곧 커리큘럼의 본디 뜻이라는 것입니다.



개발 패러다임의 꾸레레 이해가 정적인 명사형이라면, 이해 패러다임에 서 있는 파이나의 꾸레레 이해는 역동적인 동사입니다. 교육과정은 경기장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경기장을 신나게 질주하는 경주자의 경험과 이야기에 주목하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파이나는 꾸레레 4단계 수업 모형을 제시합니다: 과거 (교육) 경험을 떠올리고 반추하는 회귀, 현재의 교육이 미래에 끼칠 영향과 의미를 상상하는 진보, 과거와 미래를 비교하면서 현재 교육경험을 성찰하는 분석, 회귀-진보-분석(과거-미래-현재)을 바탕으로 나만의 교육 정체성과 의미를 찾고, 이것을 바탕으로 교육경험을 스스로 재구성하는 종합



파이나가 보기에 교육은 과거-미래-현재를 넘나들면서 학생이 자신의 교육 경험을 성찰하고, 상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저마다의 교육 경험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이야기들을 꽃피우는 과정이 바로 교육과정입니다. 정해진 목표(경기장)에 맞추어, 정해진 경주로를 벗어나지 않고 열심히 달리는 것은 결코 교육일 수 없습니다.




교육의 효과와 효율을 앞세우는 개발 패러다임은 개별 학생의 경험과 특성은 배제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로 가르칠 내용을 모으고, 발달단계와 심리적 적합도에 맞추어 실제 가르칠 것을 추리고,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도록 잘 진술된 교육목표에 맞추어 수업을 전개한 뒤, 정해진 지표에 따라 평가하는 전체 과정에서 학생의 경험과 이야기에 주목할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학교, 교사 입장에서 개발 패러다임은 정말 편리하고 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효과적인 만큼, 강력하게 작동하는 만큼 경기장은 더 멋지게 지어지겠지만 정말로 중요한 교육의 한 측면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학생입니다.



연구할수록, 고민할수록 교육은 자꾸만 커지다가 거대한 공룡이 되곤 합니다. 큰 덩치로 길을 막아서 한 발짝도 못 나아가게 하거나 거대한 힘으로 짓눌러 옴짝달싹 못하게 하지요. 수업 목표를 분명히 하자니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집중하자니 수업의 목표와 효율성 따위는 가볍게 포기해야 합니다. 국가주도교육이 정착한 대부분의 선진국들과 우리나라에서, 게다가 입시가 종교처럼 영혼을 장악한 상황에서 개발 패러다임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교육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 실행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기장과 경주자가 모두 멋지고 행복한 교육은 가능할까요? 다양한 현대적 실험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 많아 보입니다. 다만, 꾸레레를 제대로 이루기 위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의미있는 실험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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