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서랍 속의 이야기들
정확한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2023년 기준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수명은 대략 83세라고 한다.
어영부영 물리적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든 나로서도
이제는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월등히 긴 셈이라고 쳐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이처럼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연속성에 순응해 가며 늙어가고 있는 동안
나의 하나뿐인 자식이자 아들 또한
어느새 이 고단한 나라의 고3 수험생으로까지 자라고 말았다.
2006년 어느 날의 아침 아홉 시 사십 분이 조금 지난 무렵에
녀석은 기어이 세상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고
그렇게 나는 별다른 준비도 자격도 갖추지 못한 채 “아부지”가 된 거였다.
다행스러운 순산이었음을 확인하자마자
잠시 생긴 틈을 타서 병원 인근의 사우나로 달려간 나는
냉탕 가장 깊은 곳까지 머리를 담근 채
여전히 실감되지 않고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알쏭달쏭한 기분에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아부지는 첨 해보는 거야
그로부터 18년 동안
아이의 성장을 하나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늘 신비롭고 생경한 경험의 연속이었는데
이제 곧 온전한 성인이 되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을 가늠해 보면
2006년의 그날 아침처럼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녀석의 출생부터
유년기, 소년기를 거쳐오는 동안,
나는 과연 좋은 아버지였을까.
내가 나의 아버지로부터 느꼈던
결핍과 증오와 불만들에 빗대어 봤을 때
이 녀석의 삶은 그래도 그보다는
구김살 없이 잘 흘러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찰나처럼 놓치고 말았을 부지불식간에
녀석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던 적은 없었을까.
.........
연초에 병무청으로부터 날아온 우편물 한 통을 손에 쥐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다.
아직 고딩인데 ..이건 뭐람? 하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서둘러 뜯어본 봉투 안의 내용인 즉,
앞으로 있을 군입대와 관련하여
무슨무슨 병역에 편입되었다..라는 간략한 사실 통지였는데
곧 다가올 입시와 맞물려서
이제 정말 "부모"만의 울타리를 떠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여전히 우리에겐 채워나갈 더 많은 여백이 있어
아이와 나의 삶은
이렇듯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
새로운 챕터를 열어가는 입구에 다다랐다.
그 설렘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익숙한 텃밭을 보듬어 다시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우선은 여기에 글로써 남겨둔다.
그것은 의식 저 밑에 가려두었던 나의 기록이자
일기이기도 할 것이고
지금까지 "말"이라는 도구로는 도무지 전달할 방법이 없던 이야기들을
비로소 아이에게 전하려는 "편지"이기도 하다.
사실 꽤나 지난할지 모를 이 작업의 구상은
87세 되신 내 아버지의 삶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의구심들이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되어 당신을 향해 있지만
나는 아마도 영원히 그 답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쯤,
적어도 내 아이에게만큼은
할 수 있는 모든 얘기들을 해주고 싶어졌다.
독립된 어른이 되어가기 위한 걸음 중에
부딪히게 될 여러 성장통의 와중에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들이 작은 힌트나 위로라도 되어주기를 희망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상관은 없다.
"아빠는 그냥 이런 사람이었어"라는 울림이
녀석에게 가 닿을 수만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