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사거리 고속도로 입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울려대는 여러 번의 짧고 다급한 클랙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내 쪽을 향해 뭔가를 말하고 있는 옆 차선 운전자가 눈에 들어온다.
나 들으라고 그런 거였어?
무슨 사연인가 싶어 주르륵 창문을 내렸다.
"뒤쪽 타이어가 이상해요. 한번 점검해 보심이"
"제 차요?... 아이코 감사합니다"
신호등 색깔이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차를 돌려 맞은편 도로 가에 세웠다.
그랬더니 세상에.
조수석 뒤 타이어가 한눈에 봐도 엉거주춤 주저앉아 있다.
오늘도 제 시간에 출근하긴 글렀군..
하릴없이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 동네 타이어 매장이 어딨더라?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앳된 얼굴의 직원이 종종걸음으로 나를 맞는다.
그리곤 리프트에 차를 올리고 미간에 힘을 잔뜩 줘가며 유심히 이곳저곳을 살폈다.
"교체할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한번 때워볼게요"
운전대를 잡은 지 어언 삼십 년,
빛나는 무사고 경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를 잘 모른다.
정비하는 분들이 보기에 어디가 고장이라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슨 무슨 부품을 바꿔야 한다면 또 그러시라 할 따름이다.
문제가 생긴 타이어는 무조건 새 걸로 갈아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내게
'때운다'는 방식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긴 했으나
뭐, 이런 방법도 있구나 했다.
"다 됐습니다"
십여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콧잔등이 얼룩으로 까매진 남자가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내게 말했다.
"비용은 얼마에요?"
"그냥 가셔도 돼요.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응?.. 왜요? 받으셔야죠"
"서비습니다, 하하"
약간은 멋쩍은 듯 씨익 웃는 그의 호의에 갸우뚱했지만
계속된 실랑이에도 고집을 피우는 데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맘 같아서는 커피라도 사주고 나오고 싶었는데
매장 주변을 급하게 둘러봐도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질 않았다.
지금도 후회한다.
물티슈로 코에 묻은 얼룩이라도 닦아주고 올 것을.
다시 아까 그 사거리에 섰다.
여기서 톨게이트로 들어선 후 부터는 회사 근처 서초 아이씨까지 영락없이 고속도로로만 가야 한다.
좀 전에 내 차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 급하게 클랙션을 울려 준 옆 차선 운전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 이십몇 킬로의 주행 중에 조금은 위험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연출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타어어를 무상으로 때워 준 남자도 그렇다.
상태를 확인한 그가 은근히 심각한 척 목소리를 낮추며, ‘이거, 새 걸로 교체해야 겠는데요?’라고 했으면
나는 또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기치 않게 등장한 귀인(貴人)들의 활약 덕분에 오늘 하루쯤은 꽤 괜찮은 '운수 좋은 날'로 기억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서 발 앞꿈치로 퉁퉁 건드려 본 타이어는 적당히 빵빵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부풀어져 있었다.
.......
오늘 만난 그들을 잊지 않겠다.
모쪼록 내게 베풀어 준 선의보다 더더더,
크고 쏠쏠한 행운의 기운이 그대들의 봄날에도 찬연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