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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가 옳았다

그 시절, 우리들의 괴작

by 달빛의향기





지금껏 내 인생을 쥐락펴락 휘저어 놓은 모든 고통과 절망은 외계인의 소행 때문이라 굳게 믿는 사내가 있다.


아울러 조만간 다가 올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행성의 왕자를 만나 어떻게든 담판 짓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지구 상의 모든 인간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끔찍한 재앙이 들이닥칠 거라며 신박하게 주장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병구'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 보낸 가혹한 유년기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와 여자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 순간을 목격한 계기로 견딜 수 없는 분노로 치환되어 그 불행의 장막 뒤에서 어른거리는 외계인의 정체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밝혀내고 응징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은밀히 잡아들여 조사에 착수하면서 그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다.


하지만 전기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의 고문과 약물 투여, 집요한 심문, 그리고 *회심의 물파스 바르기 - 피부의 모든 면에 도포하여 외계인으로써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 - 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단서나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고문에 못 이겨 숨을 거둔 이들의 시신 처리만 곤란해지자 그중 일부는 잘라서 연구용 표본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기르는 애견 '지구'에게 사료 대신 먹잇감으로 던져줘 버린다.

(세상에. 개의 이름도 '지구'다.)



대망의 개기월식까지 남은 시간은 단 며칠.

병구는 조력자 ‘순이’와 함께 유력한 외계인 용의자인 ‘만식’을 납치해 아지트 지하의 조사실에 감금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자신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되새기며, 만식에게서 진실을 끌어내고 안드로메다 행성의 왕자와 연결되려는 계획을 다시 한 번 실행에 옮긴다. 이번이 유일하게 남은 기회임을 직감한 병구는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고문과 협박으로 만식을 압박하지만 그 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듯 첨예하고 팽팽하게 병구와 맞선다.


한편 병구의 모친은 화학 공장에서 일하던 중 약물 중독 판정을 받고 오래전부터 코마 상태에 빠져있는데 열악한 근무 환경을 방치한 바로 그 회사의 사장이 다름 아닌 만식이었다.





고문 따위에 굴하지 않는 꼿꼿한 만식



그렇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바는 인간과 외계인의 대결도,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의 등장도 아니다. 중심에는 주인공 병구의 상처투성이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울림이 있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트라우마,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고립감, 가난이 만든 생존 압박 속에서 방향을 잃고 무너져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영화는 병구가 왜 이런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는지, 그의 피해망상이 어떤 토양 위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주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결국 그가 악착같이 맞서 싸우려 한 대상은 머나먼 우주의 외계인이 아니라,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절망스러웠던 눈앞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2003)는 피해망상에 내몰린 사회적 부적응자가 거대한 외계 조직의 음모와 맞선다는 착시에 빠져 나름의 분투를 이어가는 이야기다.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감성을 제시하며 장르의 경계를 과감히 확장한 B급 정서의 블랙 코미디로 자리매김한 작품이기도 하다.

총 관객 수 7만여 명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 주류의 취향을 벗어난 이 독보적 시도는 상업적 기준에서는 언뜻 실패로 귀결된 듯 보인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고식적인 문법을 과감하게 깨뜨린 실험성과 파격이라는 측면에서는 더더욱 다채롭고 기발한 상상의 출구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회자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지구를 지켜라>가 얼마 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리메이크를 거쳐 <부고니아>라는 제목으로 다시 태어났다. 원작이 세상에 나온 지 스무 해가 지나서야 이루어진 작업이다. 여러 편의 장편과 주요 영화제에서 이미 탄탄한 명성을 쌓아온 란티모스의 손길 아래, 이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변주될지 지켜보는 일은 기대만큼 흥미로웠다.


우선 광기와 신념이 뒤섞인 분노를 거리낌 없이 쏟아내며 화면을 종횡무진 누비던 신하균의 ‘병구’는 보다 무겁고 응축된 기운의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테디’로 다시 태어난다. 굴욕적인 삭발을 감내해가며 냉소를 잃지 않고 끝까지 병구에 맞섰던 백윤식의 ‘만식’은 란티모스의 페르소나, 엠마 스톤이 ‘미쉘’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해석해냈다. 극 중에서 글로벌 바이오 기업의 CEO인 그녀가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 실험에 집중하는 모습은 영화의 결말과 맞물려 꽤나 의미심장한 복선으로 남는다.







닮은 이야기의 뼈대를 공유하지만 두 영화가 향하는 방향은 뚜렷하게 갈라져 보인다. <지구를 지켜라>가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사회적 약자가 고립되고 무너져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면 <부고니아>는 한층 정제된 호흡으로 이야기를 통제하며 개인의 비극을 넘어 ‘인류의 자멸, 혹은 공멸’에 대한 경고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밀어부친다.

그 사이로 숙련된 조율사처럼 '씬'의 굴곡진 음정에 맞춰 입체적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배우들의 연기는 월등했지만 원작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소거된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평이하고 건조한 인상이 남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어쨌든 두 영화의 통렬한 반전은 후반부 마지막 시퀀스에서 폭풍처럼 집중된다.


과연 지구로 침투한 외계인의 존재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두고 팽팽하게 맞섰던 줄다리기는 병구와 테디가 아지트를 잠시 벗어난 사이에 그 둘이 수집한 명징한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급격히 힘의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다. 만식, 그리고 미쉘의 정체는 외계인이었다. 그들이 지구에 머무는 동안 머리카락을 통해 본진과 교신한다는 설정도 실제로 써오고 있던 수법임이 드러나고 심지어 인류는 외계인들이 내려보낸 자신들과 비슷한 유전자에서 변형된 하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새롭게 밝혀진다.

드이어 개기월식이 완성되는 순간, 인간끼리의 갈등과 반목, 폭력을 바로잡기 위해 오랜시간 진행해온 실험과 노력이 모두 실패했음을 인정한 외계인들에 의해 인류는 일제히 죽음을 맞고 지구는 종말을 고한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스크린 위에 하나둘 엔딩 크레딧이 찍힐 때서야

멀리서 아득하게 병구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거봐라.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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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을 이제야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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