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그때가 봄이었더라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떡진 머리의 아들이
털썩, 식탁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목 주변이 늘어나 후줄근한 면티가
일부러 연출한마냥 매끄럽게 잘 어울린다.
그렇게 우물쭈물 두어 숟갈쯤 뜨는가 싶더니
배시시 눈매를 구부리며 나를 부른다.
".. 아빠?"
여기서 잠깐.
저 맥락 없는 눈웃음, 어쩐지 익숙하다.
특별한 허락이나 동의가 필요할 때마다
녀석이 밑밥처럼 흘리곤 하는 무언의 신호가 아니었던가.
집중하자.
뭔진 몰라도 호락호락 말려서는 곤란하다.
"1월 달에 동기들이 도쿄 가자는데, 가도 될까?"
"도,도,도쿄? 우리 9월에 오사카 갔다오지 않았냐?"
"그랬지"
"근데 또오.....?"
입꼬리를 바짝 세우고 멋쩍게 끄덕이는 표정에서
한껏 과장된 절절함이 모공을 뚫고 흘러내린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가 그만 터져나온 웃음때문에
하마터면 입안 가득 담겨있던 밥알을 비비탄처럼 쏟아낼 뻔했다.
암튼 뭐, 그건 그렇고..
이번 겨울 일본에서의 노곤한 온천여행을 꿈꾸며
알음알음 모으고 있는
내 소중한 '엔화'의 거취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한테 먼저 털릴 운명인가.
침을 꿀떡 삼키고 컵에 담긴 물을 다 비웠는데도 목이 멘다.
아들의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어느 날
녀석이 나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안에 무심코 들어간 적이 있다.
문을 열면
마치 다른 차원의 경계에 선 듯 늘상 어지러운 풍경의 그곳.
책상 위 널브러진 이러저러한 것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
구석구석 예리하게 숨겨 둔 쓰레기(?)에
방안 가득 쿰쿰한 냄새까지.
몸만 빠져나간 껍데기 같은 이불을 대강 밀어두고 침대 귀퉁이에 앉고보니
두꺼운 사진첩을 찬찬히 넘겨 볼 때처럼
여러 감상들이 겹치며 엇갈린다.
어느새 스무 살의 성년으로 자란 아들.
썩 훌륭한 부모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잘 해낸 걸까.
내 아들에게 내 아버지처럼 해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강박으로부터
이제는 좀 자유로워져도 될래나.
결코 홀가분하거나 가벼워진 것만은 아닌데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는 헛헛함이 잔상처럼 입 안에 맴돌았다.
사실 내밀한 속마음까지야 알 길이 없지만
녀석이 일찌감치 자신의 적성에 따른 전공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안도할만한 일이긴 했다.
다이어리처럼 꾸려가는 아이의 블로그에는
내내 분주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새내기의 기록들이 빼곡하게 채워지고 있다.
학생회, 동아리, 각종 행사와 축제, 여행, 친구,
그리고 술,술,술,술.
기억해 보면 올 봄의 시작에
아들에게 당부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뭐든 치열하게 할 것. 공부든 놀든.
푸르게 입사귀를 피워낼 너의 청춘은 지금부터가 봄날일 거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폰 액정 위로 아들의 이름이 연거푸 뜬다.
좀처럼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는 녀석이 평일 오후에.. 그것도 두 통씩이나.
웬만하면 카톡으로 했을 것을, 이거 또 심상치 않다.
마침 길어지고 있던 통화를 겨우 끊고서야 콜백을 넣었다.
신호음이 가기 무섭게 아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재빠르게 들린다.
리듬을 타듯 절도 있는 랩처럼.
"아빠, 오늘 비행기랑 숙소 예약하려고 하는데 통장 잔고가 좀.. 부족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