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지마세요. 붓다가 되세요.
기독교를 믿지 마세요. 그리스도가 되세요.
우리가 늘상 하는 오류는 본질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텐데, 돈이 목적이 되어버리고, 그 속에 빠져 길을 잃고 허우적대는 것이다.
‘믿음’,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여긴다. ‘믿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덕 중 하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마음의 의존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다. 너무나도 확실한 증명 앞에서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다. 믿음은 증명이 불가한 어떤 것,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의지처요, 종용이다.
이런 믿음을 강요하는 행위는 특히 종교에서 도드라진다.
종교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을 당신 앞에 보여줄 수 있겠는가. 성령을 당신 앞에 내어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종교에서는 믿음이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세뇌시키는 것이다. 믿음의 해악은 스스로도 감옥에 빠지게 하지만, 타인에게 강요하기 아주 좋은 도구이다. 유독 종교에서 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이 모든 말의 만능키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이 말은 그야말로 당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 역할을 한다.
"오로지 눈먼 자만이 빛을 믿는다.
눈을 가진 사람들은 빛을 믿지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그것을 볼뿐이다."
-오쇼《말없는 자의 말》중에서
단언컨데, 불교는 신앙이 아니다. 불교는 종교(宗敎), 즉 큰 가르침이다. 싯달타 태자가 숱한 고행 끝에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무상정등각의 부처가 되어 펼친 큰 가르침이다.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스스로 불을 밝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라. 그것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이 곧 불교다. 당신은 안내자를 왜 신봉하는가.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가가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불교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다. 마치 지도와 같다. 지도를 신봉할 필요는 없다. 지도는 목적지에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지도가 없다면 당신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여러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지도가 없어도 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도가 좋은 수단인 것만은 분명하다. 백번 양보한다 해도 지도가 목적지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불교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다.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 경전에 나오는 수천의 부처와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 경전에 나오는 수만의 보살들은 모두 당신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당신이 1년 또는 3년 또는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기도를 올리고 경배한들 당신이 깨달음에 가까워졌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저 당신의 깨달음을 돕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처음 승단을 가졌을 때 당신이 경배하는 수 많은 불보살들이 있었겠는가. 10년 기도라는 것이 있었겠는가. 지금 불교는 원형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변질되고 퇴색되버리고 믿음만이 종용되는 그런 ‘믿음 신봉 단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믿음이 강조될수록 성직자의 역할은 커진다. 신을 향한 고급스런운 성전을 지어야 할 것이다. 무지한 신도들에게 믿음을 설명하고 풀이해 줘야 하는 성직자들도 필요할 것이다. 화려하고 체계적인 신앙 의식도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공양이 필요하고, 그리고 신도들의 한량없는 희생, 그런 것들이 강조되어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괴하리만큼 이상하게 변질된 종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절이 생기기 전에 수행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는 것을 경계하라. 10년 20년 다닌 것을 자랑하지 말라. 절에 재물을 바치는 것이 절에 재정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신앙생활의 알맹이는 소홀하다. 극단적인 표현자들에 의하면 ‘종교는 마약이다’ 라고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개선된다.”
불교의 승단은 믿음으로 세워진 단체가 아니라 ‘수행자 단체’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아닌 자는 불자가 아니라 맹신자일 뿐이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고, 수단은 불교라는 그릇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불교와 기독교와 구분이 모호하다. ‘믿음의 신’ 앞에서 빌고 또 빌고 무언가를 간구한다. 이러한 기복신앙은 무당의 신집에 가서 온갖 신께 예를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처는 ‘믿음’을 말하기 전에 끊임없이 ‘의심’을 하라 했다. 의심과 의심을 깨치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부처라는 이름이다.
불교는 부처가 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불교라는 그릇을 깨달음을 향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야지, 목적으로 삼는 순간 당신의 종교활동은 믿음의 영역으로 빠져버리며, 믿음의 영역 안에서 길을 잃고 만다.
앞 문장은 관념화된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뒷 문장은 수행에 관한 이야기요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혜로운자는 결코 불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붓다가 되기 위해 정진하며 수행할 뿐
지혜로운 자는 기독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아닌 교회를 믿는 자도 있다. 당신이 지혜롭다면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