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눌, 수심결(修心訣) 해설-4
■ 제9 문답 –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닦는데, 두 가지 수행법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문) “스님의 말씀대로, 깨친 뒤에 닦는 방법을 보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 본성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대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기 본성의 문’(自性門)이란 ‘고요함·신령한 앎’을 함께 활용함에 자유로워,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단 하나의 티끌 경계도 마음에 집착을 가져다주는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찌 털어 없애는 수고로움이 필요하겠으며, 단 하나의 생각도 헛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않으니 마음에 경계가 반영되는 것을 잊으려는 노력도 필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이것이 담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서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챙기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은 순리대로 이리저리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들이며, 진리를 분별, 선택하고 현상계가 모두 텅 비어 있음을 관조하여 ‘흐리멍덩함·산란함’을 고르게 다스려서 ‘에고를 극복한 경지(無爲)에 들어간다고 하고, 결론 짓기를 ‘이것은 점진적으로 닦아가는 문’(漸門)의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기 본성의 문’(自性門)에 의지해서 선정·지혜를 함께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 즉 ‘대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먼저 ‘대상을 따르는 문’에 의지하여 ‘흐리멍덩함·산란함’을 고르게 조절한 뒤 ‘자기 본성의 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 먼저 ‘자기 본성의 선정·지혜’에 의지해서 ‘고요함·신령한 앎’을 함께 활용함에 자유롭다면,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필요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수상문, 즉 ‘대상에 따라 처방하는 문의 선정·지혜’에 의지한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흰 옥에 조잡한 무늬를 새김으로써 본바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먼저 ‘대상에 따라 처방하는 문의 선정·지혜’를 얻어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완성한 뒤에 ‘자기 본성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진적으로 닦아가는 문’(漸門)의 열등한 근기가 깨달음(頓悟) 이전의 점진적으로 익혀가는 공부입니다. 이것을 어찌 ‘단박에 깨닫는 문’(頓門)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는 ‘닦음이 없는 닦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두 가지 방법을 선후가 없이 동시에 닦는다면, ‘자성문·수상문’의 두 가지 문의 선정·지혜는 하나(자성문)는 ‘순간적’이며, 하나(수상문)는 ‘점진적’이라 서로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동시에 병행할 수 있겠습니까?
즉 돈문의 사람은 ‘자기 본성의 문’(自性門)에 의지하여 걸림없이 자유로워 더 닦음이 없을 것이며, 점문의 열등한 근기는 ‘대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에 나아가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노력과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돈문과 점문의 두 문은 서로 근기가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방법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치십니까? 청컨대 투철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어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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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거여소판(問據汝所判), 오후수문중(悟後修門中), 정혜등지지의(定慧等持之義), 유이종(有二種), 일자성정혜(一自性定慧), 이수상정혜(二隨相定慧)
자성문즉왈(自性門則曰), 임운적지(任運寂知), 원자무위(元自無爲), 절일진이작대(絶一塵而作對), 하로견탕지공(何勞遣蕩之功), 무일념이생정(無一念而生情), 불가망연지력(不假忘緣之力), 판운차시돈문개자(判云此是頓門箇者), 불리자성(不離自性), 정혜등지야(定慧等持也)
수상문즉왈(隨相門則曰), 칭리섭산(稱理攝散), 택법관공(擇法觀空), 균조혼란(均調昏亂), 이입무위(以入無爲), 판운차시점문열기소행야(判云此是漸門劣機所行也), 취차양문정혜(就此兩門定慧), 불무의언(不無疑焉)
약언일인소행야(若言一人所行也), 위부선의자성문(爲復先依自性門), 정혜쌍수연후(定慧雙修然後), 갱용수상문대치지공야(更用隨相門對治之功耶)
위부선의수상문(爲復先依隨相門), 균조혼란연후(均調昏亂然後), 이입자성문야(以入自性門也)
약선의자성정혜(若先依自性定慧), 즉임운적지(則任運寂知), 갱무대치지공(更無對治之功), 하수갱취수상문정혜야(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
여장호옥(如將皓玉), 조문상덕(彫文喪德)
약선이수(若先以隨), 상문정혜(相門定慧), 대치공성연후(對治功成然後), 취어자성문(趣於自性門), 즉완시점문중열기(則宛是漸門中劣機), 오전점훈야(悟前漸熏也), 기운돈문개자(豈云頓門箇者), 선오후수(先悟後修), 용무공지공야(用無功之功也)
약일시무전후즉이문정혜(若一時無前後則二門定慧), 돈점유이(頓漸有異), 여하일시병행야(如何一時竝行也)
즉돈문개자(則頓門箇者), 의자성문(依自性門), 임운망공(任運亡功), 점문열기(漸門劣機), 취수상문(趣隨相門), 대치노공(對治勞功), 이문지기(二門之機), 돈점불동(頓漸不同), 우열교연(優劣皎然), 운하선오후수문중(云何先悟後修門中), 병석이종야(竝釋二種耶), 청위통회(請爲通會), 영절의정(令絶疑情)
우선 용어에 대한 갈무리를 먼저 하고 난 다음 해설을 이어가도록 하자. 선정과 지혜는 얻는 방법은 모두 명상을 통해 얻는다. 한자권에서는 명상을 ‘참선(參禪)’이라 부르기도 하고 줄여서 ‘선(禪)’ 또는 ‘입정(入定)’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 명상법은 수만, 수천만 개가 존재하지만, 원류로 보면 명상 수행에는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의 축은 선정에 이르게 하는 명상이고, 또 다른 축은 지혜에 이르게 하는 명상이다. 그런데 이들은 경전마다 제각기 다른 용어를 사용하므로 주의 깊게 인지하고 있어야 옳은 해석할 수 있다.
내가 편의상 정리한 위의 표에서 보듯이, 우선 선정(禪定)은 한자권에서 ‘지(止)’라 부르고, 빨리어로는 ‘사마타’라 한다. 팔정도에서는 8개 모두 ‘바른’을 앞에 두고 말하므로 ‘정정(正定)’으로 표현한다. 수심결에서는 ‘공적영지’란 새로운 말을 사용하였다. 선정은 ‘공적’에 해당하는 말로써, ‘텅비어 고요함’을 목적으로 한다. 선정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바는 번뇌를 그치고 마음을 텅비워 고요하게 하는 명상 수행법이다. 텅비워 고요하면 삼매에 이르게 되고, 비로소 참나를 발견(견성)하게 된다. 선정 수행법은 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해온 수행법이다.
지혜(智慧)는 한자권에서 ‘관((觀)’이라 부르고, 빨리어로는 ‘위빠사나’라 한다. 팔정도에서는 ‘정념(正念)’으로 표현한다. 수심결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 용어에서 ‘영지(靈知)’에 해당하는 말로써, ‘신령스런 앎’을 목적으로 한다. 지혜 수행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바는 매 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번뇌를 관조하여 통찰을 얻어 참나가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명상 수행법이다. 그렇게 수행하면 통찰을 얻게 되고, 신령스런 앎이 생겨나게 된다. 지혜 수행법은 부처님이 세우신 수행법이다.
이렇게 선정과 지혜 수행법을 기본으로 알고 난 뒤 본문으로 들어가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본다.
제자의 질문이 조금 난삽하여 위 표로 정리해보았다. 여기서도 자성문과 수상문의 개념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자성문은 자기 본성을 찾아 들어가는 문이다. 자기 본성, 즉 참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 고요해지는 수행이 기본이다. 그 고요함을 위해서는 선정이라는 수행법이 필수이다. 선정이란 쉽게 말해 좌정하여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다른 이름이다. 고요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여섯 감각이 있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여섯 감각을 ‘안이비설신의’라 한다. ‘눈·귀·코·혀·몸·마음’을 말하며 이것을 육입(六入)이라 한다. 평소에 우리는 육입을 모두 열어놓고 세상을 대한다. 그러니 늘 시끄럽고 번잡하다. 선정은 이와 반대이다. 안이비설신의의 문을 모두 닫고 밖으로 향한 모든 감각을 거둬들여 안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하여 육입을 통해 오는 번뇌와 느낌과 욕망을 내려놓는다. 그러면 고요함이 찾아온다. 고요함 속에 참나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선정 수행법이다.
자성문에는 선정과 더불어 지혜 수행을 동등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정은 고요함을 주고, 지혜 수행은 신령스런 앎을 제공한다. 신령스러운 앎이란 무엇인가? 통찰하는 능력이다.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지혜 수행도 선정과 마찬가지로 명상 수행이다. 다만, 선정이 삼매를 위한 집중적 몰입이라면, 지혜는 바른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매 순간의 바른 마음 챙김이다. 요새 언어로 풀이하자면, 선정은 ‘사마타 명상’으로 깊은 삼매에 이르고, 지혜는 ‘위빠사나 명상’으로 알아챈다.
수상문은 대상을 따르는 문이다. 여기서 대상은 사물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일 수도 있다. 그래서 현상계라 한 것이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이 모두 다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복잡다단한 현상계를 관조하여 흐리멍덩함과 산람함에 빠진 미혹한 자신을 깨어나게 하는 수행법이 수상문이다. 수상문을 걷는 사람은 ‘참나’를 아직 몰라서, 절대계의 선정과 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수상문은 처음 수행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하는 수행법으로 현상계의 마음만을 붙잡고 점진적으로 닦아가는 문이다.
제자는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던진다.
자기 본성을 깨닫고 난 후에,
① 자성문을 먼저 닦고 수상문을 해야 하는가?
② 수상문을 먼저 닦고 자성문을 해야 하는가?
③ 아니면, 자성문과 수상문을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답)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만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다시 의혹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얻었으면 말은 잊어버려서, 말을 가지고 이리저리 트집 잡고 따지는데 힘을 소모하지 말길 바란다.
만약 그 두 문(자성문·수상문)에서 각기 수행할 바를 판단한다면, ‘자기 본성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단박에 깨닫는 문’이니, 닦음 없는 닦음으로 돈문의 고요함과 수상문의 고요함을 아울러 활용하여 스스로 자기 본성을 닦아 부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깨치기 전의 ‘점진적으로 닦는 문’의 열등한 근기이니,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활용하여, 마음 마음마다 의심을 끊고 고요함에 집착해서 닦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 두 문의 수행은 ‘단박’(頓)과 ‘점진’(漸)이 다르니 서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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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소석교연(答所釋皎然), 여자생의(汝自生疑), 수언생해(隨言生解), 전생의혹(轉生疑惑), 득의망언(得意忘言), 불로치힐(不勞致詰)
약취양문(若就兩門), 각판소행(各判所行), 즉수자성정혜자(則修自性定慧者), 차시돈문(此是頓門), 용무공지(用無功之), 공병운쌍적(功竝運雙寂), 자수자성(自修自性), 자성불도자야(自成佛道者也)
수수상문정혜자(修隨相門定慧者), 차시미오전점문열기(此是未悟前漸門劣機), 용대치지공(用對治之功), 심심단혹(心心斷惑), 취정위행자(取靜爲行者)
이차이문소행(而此二門所行), 돈점각이(頓漸各異), 불가참란야(不可參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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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는 문’(悟後修門)에서 ‘대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의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법’을 겸하여 말하는 것은, ‘점진적으로 닦는 문’(漸門)을 닦아야 하는 열등한 근기가 닦는 바를 완전히 취한 것이 아니다. 그 방편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잠자리를 부탁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이 ‘단박에 깨닫는 문(頓門)에도 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어서, 그 꾸려야 할 행장을 한 가지 예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을 대하되 선을 떠나며 악을 대하되 악을 떠나며, 여덟 가지 번뇌의 바람(八風: 이익-손해, 명예-불명예, 칭찬-비난, 즐거움-고통)에도 동요하지 않고, 세 가지 느낌(三受: 즐거운 느낌, 즐겁지 않은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에도 마음이 ‘자기 본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하여 ‘선정·지혜’를 함께 닦아감에 자유롭다면, 타고난 본성 그대로여서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도 필요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에 있으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한 것인데 어찌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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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후수문중(然悟後修門中), 겸론수상문중대치자(兼論隨相門中對治者), 비전취점기소행야(非全取漸機所行也), 취기방편(取其方便), 가도탁숙이이(假道托宿而已)
하고어차돈문(何故於此頓門), 역유기승자(亦有機勝者), 역유기열자(亦有機劣者)
불가일예(不可一例), 판기행리야(判其行李也), 약번뇌담박(若煩惱淡薄), 신심경안(身心輕安), 어선이선(於善離善), 어악이악(於惡離惡), 불동팔풍(不動八風), 적연삼수자(寂然三受者), 의자성정혜(依自性定慧), 임운쌍수(任運雙修), 천진무작(天眞無作)
동정상선(動靜常禪), 성취자연지리(成就自然之理), 하가수상문대치지의야(何假隨相門對治之義也), 무병불구약(無病不求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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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먼저 단박에 깨닫기(돈오)는 했으나,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 생각마다 망령된 감정이 일어나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 마음마다 욕망을 일으켜서, ‘흐리멍덩함’과 ‘산란함’에 의해 제압당하여 ‘고요하되 신령한 앎’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에 어두워진 자는, ‘대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지혜를 빌려서 다스려야 함을 잊지 말고, ‘흐리멍덩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 ‘에고를 극복한 경지’(無爲)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對治功夫)를 빌려서 잠시 습기(업의 잠재력)를 조절하지만, 이미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텅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닦아야 하는 열등한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이란 비록 공부를 잊지 않고 생각 생각마다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이 생겨서 장애가 없을 수 없으니,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있는 것 같아서 답답한 것과 같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숙해지면, 몸과 마음의 번뇌가 가볍고 편안한 듯 해진다. 그러나 비록 편안한 것 같으나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닫기 전에 닦는 것은 ‘참다운 닦음’(眞修)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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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돈오(雖先頓悟), 번뇌농후(煩惱濃厚), 습기견중(習氣堅重), 대경이염념생정(對境而念念生情), 우연이심심작대(遇緣而心心作對), 피타혼란(被他昏亂), 사살매각적지상연자(使殺昧却寂知常然者), 즉차수상문정혜(卽借隨相門定慧), 불망대치(不忘對治), 균조혼란(均調昏亂), 이입무위(以入無爲)
즉기의야(卽其宜也), 수차대치공부(雖借對治功夫), 잠조습기(暫調習氣), 이선돈오심성본정(以先頓悟心性本淨), 번뇌본공고(煩惱本空故), 즉불락점문열기(卽不落漸門劣機), 오염수야(汚染修也)
하자수재오전(何者修在悟前), 즉수용공불망(則雖用功不忘), 염염훈수(念念熏修), 착착생의(着着生疑), 미능무애(未能無礙), 여유일물(如有一物), 애재흉중(礙在胸中), 불안지상(不安之相), 상현재전(常現在前)
일구월심(日久月深), 대치공숙(對治功熟), 즉신심객진(則身心客塵), 흡사경안(恰似輕安), 수부경안(雖復輕安), 의근미단(疑根未斷), 여석압초(如石壓草), 유어생사계(猶於生死界), 불득자재(不得自在), 고운(故云), 수재오전(修在悟前), 비진수야(非眞修也)
스승은 제자의 질문에 조목조목 답한다.
① 자성문을 먼저 닦고 수상문을 해야 하는가?
자성문은 단박에 깨닫는 문이다. 이 수행법이 부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자성을 깨쳐 공적영지에 머물은 자는 닦음 없는 닦음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② 수상문을 먼저 닦고 자성문을 해야 하는가?
수상문이라는 것은 돈오 이전에 하는 수행법이다. 지금 돈오 후의 수행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니 상관없는 물음이다. 수상문은 대상을 따르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수행법이다. 수상문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초발심하여 입문한 자를 위한 수행법이다. 생각해보라. 방금 입문한 자에게 단박에 깨닫는 자성문을 얘기한들 곧바로 이해하고 깨칠 수 있겠는가. 단박에 깨닫는 문이 있으니 그 방향성을 가지고 노력해보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 ‘노력’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될 것이다. 수상문 수행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다. 수상문은 수많은 번뇌와 의심들을 하나하나 끊어가며, 대상을 다스리며, 고요함에 집중하여 닦는 수행이다.
③ 아니면, 자성문과 수상문을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수상문이라는 것은 애초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점진적으로 해야 하는 수행법이다. 깨달은 뒤에 수상문을 말하는 것은 돈오 후에도 잠재된 습기가 남아있으므로 수상문의 수행을 일부 빌려서 쓰는 것이다.
만약 돈오한 후 남아있는 습기가 없고 현상계의 여덟 가지 바람(八風)과 세 가지 느낌(三受)에 자유롭다면 굳이 수상문의 수행을 빌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돈오했으나 미세한 번뇌가 남아있고, 습기가 무거우면 흐리멍덩함과 산란함이 일어나니 참나가 그 번뇌로 인해 어두어진다. 그때에 수상법의 공부를 빌려 업의 잠재력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자성을 깨달았기에 열등한 근기의 수행으로는 떨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돈오하여 견성한 사람)이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편’을 쓴다고는 하지만 생각 생각에 의심이 없어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미묘한 본성에 계합할 것이다.
그리하여 ‘고요함·신령한 앎’을 함께 활용함에 자유로우며, 생각마다 일체의 경계에 반영하면서도 마음 마음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되 자신의 본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지니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게 되니 앞에서 말한 수승한 근기를 가진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따르는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隨相門定慧)는 비록 점진적으로 닦아야 하는 근기를 가진 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쇳덩이를 달구어 황금을 만드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어찌 두 문(自性門·隨相門)의 선정·지혜에 있어서 선후의 차례가 있다는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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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분상(悟人分上), 수유대치방편(雖有對治方便), 염념무의(念念無疑), 불락오염(不落汚染)
일구월심(日久月深), 자연계합천진묘성(自然契合天眞妙性), 임운적지(任運寂知), 염염반연일체경(念念攀緣一切境), 심심영단제번뇌(心心永斷諸煩惱), 불리자성(不離自性), 정혜등지(定慧等持), 성취무상보리(成就無上菩提), 여전기승자(與前機勝者), 갱무차별(更無差別)
즉수상문정혜(則隨相門定慧), 수시점기소행(雖是漸機所行), 어오인분상(於悟人分上), 가위점철성금(可謂點鐵成金)
약지여시(若知如是), 즉기이이문정혜(則豈以二門定慧), 유선후차제이견지의호(有先後次第二見之疑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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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모든 도 닦는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해서 다시는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장부의 뜻을 가지고 최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절대로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곧장 그 의미를 꿰뚫어 이해하고, 하나하나 자신에게서 돌이켜보아 본래의 근본적 가르침에 자신을 합치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눈앞에 훤히 나타날 것이며, 타고난 그대로의 진리가 명백하여 어둡지 않게 될 것이니, ‘지혜의 몸’(慧身)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결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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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수도지인(願諸修道之人), 연미차어(硏味此語), 갱막호의(更莫狐疑), 자생퇴굴(自生退屈)
약구장부지지(若求丈夫之志), 구무상보리자(求無上菩提者), 사차해이재(捨此奚以哉)
절막집문(切莫執文), 직수료의(直須了義), 일일귀취자기(一一歸就自己), 계합본종(契合本宗), 즉무사지지(則無師之智), 자연현전(自然現前), 천진지리(天眞之理), 료연불매(了然不昧), 성취혜신(成就慧身), 불유타오(不由他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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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묘한 가르침이 비록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긴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종자’를 심은 대승의 근기가 아니라면,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다.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허다하다.
그러나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번 귀를 스쳐 잠시라도 인연을 맺은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심결(唯心訣)>에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하늘사람의 복을 뒤덮어서, 부처가 될 바른 씨앗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물며 (이 가르침을)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고, 이를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그 공덕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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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묘지(而此妙旨), 수시제인분상(雖是諸人分上), 약비숙식반야종지(若非夙植般若種智), 대승근기자(大承根器者), 불능일염이생정신(不能一念而生正信)
기도불신(豈徒不信), 역내방독(亦乃謗讟), 반초무간자(返招無間者) , 비비유지(比比有之)
수불신수(雖不信受), 일경어이(一經於耳), 잠시결연(暫時結緣), 기공궐덕(其功闕德), 불가칭량(不可稱量)
여유심결운(如唯心訣云), 문이불신(聞而不信), 상결불종지인(尙結佛種之因), 학이불성(學而不成), 유개인천지복(猶蓋人天之福)
불실성불지정인(不失成佛之正因), 황문이신(況聞而信), 학이성(學而成), 수호불망자(守護不忘者), 기공덕(其功德), 기능탁량(豈能度量)
돈오한 사람은 잠재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수상문이란 방편을 사용하지만, 본성을 찾았기에 더 이상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는 번뇌가 본래 텅 빈 것이라는 것을 투철히 안다. 번뇌 망상이 텅 비어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 번뇌 망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만, 돈오 후에 수상문을 빌려 사용하는 것은 잠재된 습기를 제거해가는 잔불 정리하는 정도의 수행이라 생각해도 좋다. 큰불은 이미 잡혔고, 잔불이 이곳저곳에서 남아있기에 더 이상 발화되지 않도록 수상문을 활용하여 잔불 정리를 하는 것이다.
돈오한 사람은 자성문을 통해 불생불멸의 참된 마음(천진天眞)으로 미묘한 본성에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돈오한 사람의 삶은 항상 고요하고, 항상 신령한 앎을 활용함에 자유로워지고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돈오 전에는 에고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돈오 후에는 본성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수상문을 통해서도 선정과 지혜를 얻는다고 하지만, 이는 이제 막 구도를 시작한 초발심자나, 열등한 근기가 행하는 낮은 단계에서의 수행법이다. 수상문은 자성문을 찾아가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수상문을 통해 ‘일념집중’과 ‘지혜계발’을 닦더라도 마음 한편이 항시 답답하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참나’ 즉, ‘순수한 나’를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견성’을 하지 못해서, 마음을 닦기는 하지만 참나를 모르니 상황에 이끌려간다. 마음이 산란하면 선정으로 대응하고, 마음이 흐리멍덩해지면 지혜 수행으로 대응하지만, 본래 고요하고 본래 지혜로운 참나 자리를 명확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답답하다.
결국, 돈오를 하기 위해서는 수상문이란 과정도 필요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성문에 도달하고 그 수행에 의지해서 비로소 본성을 찾게 된다. 또한 돈오를 보임(보호임지保護任持,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킴) 하기 위해서 잔불 정리용 수상문이 필요하다. 이때의 수상문은 자성문을 통해 찾은 본성을 보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수상문과 자성문은 어떤 것이 우선하고 우선하지 않는 선후의 차례가 따로 없는 것이다.
과거에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니,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온갖 고통을 받았던 시절이 몇천 겁이었으며, ‘부처님의 길’을 찾고 싶어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오랜 겁을 윤회의 세계에 침몰하여 어두운 정신으로 깨닫지 못한 채 온갖 악업을 지으며 살았던 시절이 그 얼마였던가?
때때로 문득 생각해보면 긴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름을 피워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또한 누가 나로 하여금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으며, 진리를 닦는 길을 훤히 깨닫도록 했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무판자를 만나고, 수미산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작디 작은 겨자씨에 꽂히는 것과 같으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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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과거윤회지업(追念過去輪廻之業), 불지기기천겁(不知其幾千劫), 타흑암입무간(墮黑暗入無間), 수종종고(受種種苦)
우불지기기하(又不知其幾何), 이욕구불도(而欲求佛道), 불봉선우(不逢善友), 장겁침륜(長劫沈淪), 명명무각(冥冥無覺), 조제악업(造諸惡業)
시혹일사(時或一思), 부각장우(不覺長吁), 기가방완(其可放緩), 재수전앙(再受前殃)
우불지수부사아(又不知誰復使我), 금치인생(今値人生), 위만물지영(爲萬物之靈), 불매수진지로(不昧修眞之路)
실위맹구우목(實謂盲龜遇木), 섬개투침(纖芥投鍼), 기위경행(其爲慶幸), 갈승도재(曷勝道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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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만일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도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한 구절 불법을 들어서 믿고, 알고, 받들어서 고통을 면하고자 해도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는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피고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라.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이 곧 저물 것이니, 비록 오늘은 내가 살아 있지만 내일은 보장하기 어렵다.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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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약자생퇴굴(我今若自生退屈), 혹생해태(或生懈怠), 이항상망후(而恒常望後), 수유실명(須臾失命), 퇴타악취(退墮惡趣), 수제고통지시(受諸苦痛之時), 수욕원문일구불법(雖欲願聞一句佛法), 신해수지(信解受持), 욕면신산(欲免辛酸), 기가부득호(豈可復得乎)
급도임위(及到臨危), 회무소익(悔無所益), 원제수도지인(願諸修道之人), 막생방일(莫生放逸), 막착탐음(莫着貪淫), 여구두연(如救頭然), 불망조고(不忘照顧)
무상신속(無常迅速), 신여조로(身如朝露), 명약서광(命若西光), 금일수존(今日雖存), 명역난보(明亦難保), 절수재의(切須在意), 절수재의(切須在意)
이런 미묘한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 되지만, 모든 사람과 인연 되지는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수행에 믿음이 없으니 거듭되는 생을 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무간지옥이나 윤회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찌 지금 게으름을 피우며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고자 하는가. 이번 생에 천행을 얻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이는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무판자를 만나고, 수미산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작은 겨자씨에 꽂히는 것처럼 아주 보기 드문 일이다. 정진해야 한다. 게으름을 피워 잠깐만 미루다가 짧은 인생 다 놓치고 만다. 무간지옥에 가서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고통을 면하고자 해도 그때는 너무 늦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행자여,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탐욕을 독으로 알라.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지 말라. 음욕은 머리에 불을 피워 불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다. 당장 불을 꺼야 하지 않겠는가. 인생은 한 방울 이슬 맺히는 것과 같고, 이제 목숨은 석양에 이르러 곧 저물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여, 부처의 마지막 말처럼 부디 방일하지 말라.
또 세상의 인과관계에 의거해 짓는 선행만 닦아도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천상계와 인간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깊고 오묘한 법문은 오죽하겠는가? 잠시만 믿더라도 그 공덕은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를 것이다.
경(능엄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세상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그러나 밥 한 그릇 먹는 잠깐 동안이라도 이 ’진리의 가르침‘을 바르게 생각함으로써 얻는 공덕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이 가장 높고 귀하여 모든 공덕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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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빙세간유위지선(且憑世間有爲之善), 역가면삼도고륜(亦可免三途苦輪), 어천상인간(於天上人間), 득수승과보(得殊勝果報), 수제쾌락(受諸快樂), 황차최상승심심법문(況此最上乘甚深法門)
잠시생신(暫時生信), 소성공덕(所成功德), 불가이비유(不可以比喩), 설기소분(說其少分)
여경운(如經云), 약인이삼천대천세계칠보(若人以三千大千世界七寶), 포시공양이소세계중생(布施供養爾所世界衆生), 개득충만(皆得充滿), 우교화이소세계일체중생(又敎化爾所世界一切衆生), 영득사과(令得四果), 기공덕(其功德), 무량무변(無量無邊), 불여일식경(不如一食頃), 정사차법(正思此法), 소획공덕(所獲功德)
시지아차법문(是知我此法門), 최존최귀(最尊最貴), 어제공덕(於諸功德), 비황불급(比況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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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니,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칠보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룬다.”하였다.
바라건대 진리를 닦는 사람들이여,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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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경(故云經), 일념정심시도장(一念淨心是道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보탑필경쇄위진일념정심성정각(寶塔畢竟碎爲塵一念淨心成正覺)
원제수도지인(願諸修道之人), 연미차어(硏味此語), 절수재의(切須在意),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물질세계에서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세상에 선행을 닦으면 선과의 공덕이 있고 악업을 지으면 악과의 과보를 받는다. 큰 선행을 닦아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보배로운 것을 세상에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 세상을 만족할 만한 물질적 보시보다 단 한 구절이라도 진리를 알려주어 깨닫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물질은 때가 되면 닳고 없어지지만, 진리는 청정한 마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주어 사람을 영원히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이 모두 어긋나게 될 것이다. 지금 만약 억지로라도 닦으면 닦기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공부의 진도가 저절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참으로 슬프도다! 지금 사람은 배가 고프면서도 좋은 음식을 만나되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중병에 의사를 만났어도 약 먹을 줄을 모르는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절실히 묻지 않는 이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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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약불수(今若不修), 만겁차위(萬劫差違), 금약강수(今若强修), 난수지행(難修之行), 점득불난(漸得不難), 공행자진(功行自進), 차부(嗟夫), 금시인(今時人), 기봉왕선(飢逢王饍), 불지하구(不知下口), 병우의왕(病遇醫王), 불지복약(不知服藥)
불왈여지하여지하자(不曰如之何如之何者), 오말(吾末), 여지하야이의(如之何也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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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상의 인과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일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나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본래 자리는)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의 모든 하늘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의 무리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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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간유위지사(且世間有爲之事), 기상가견(其狀可見), 기공가험(其功可驗), 인득일사(人得一事), 탄기희유(歎其希有)
아차심종(我此心宗), 무형가관(無形可觀), 무상가견(無狀可見),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
고천마외도(故天魔外道), 훼방무문(毁謗無門), 석범제천(釋梵諸天), 칭찬불급(稱讚不及), 황범부천식지류(況凡夫淺識之流), 기능방불(其能髣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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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 동안 모든 성인을 받들어 섬겨서 모든 ‘선한 뿌리’를 심고 ‘지혜의 바른 원인’을 맺은 최상의 근기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이 글귀에 능히 믿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의 자리에서 모든 선의 뿌리를 심은 것으로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과 최상승의 근기를 지닌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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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부정와(悲夫井蛙), 언지창해지활(焉知滄海之闊), 야간하능사자지후(野干何能師子之吼)
고지말법세중(故知末法世中), 문차법문(聞此法門), 생희유상(生希有想), 신해수지자(信解受持者), 이어(已於), 무량겁중(無量劫中), 승사제성(承事諸聖), 식제선근(植諸善根), 심결반야정인(深結般若正因), 최상근성야(最上根性也)
고금강경운(故金鋼經云), 어차장구(於此章句), 능생신심자(能生信心者), 당지시인(當知是人), 이어무량불소(已於無量佛所), 종제선근(種諸善根), 우운위발대승자설(又云爲發大乘者說), 위발최상승자설(爲發最上乘者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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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컨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런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혹시 전생에 선한 원인을 맺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만약 자신이 뛰어난 근기임을 믿지않고, 스스로 하등하고 열등한 근기라고 자처하며,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내어 이번 생에 닦지 않으면, 비록 전생에 선한 뿌리를 심었다고 하여도 지금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되니,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부탁건대 부디 조심할지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가 있는 곳을 알고도 그것을 구하지 않으면서, 외롭고 가난함을 두고두고 원망할 수 있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 주머니(육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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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구도지인(願諸求道之人), 막생겁약(莫生怯弱), 수발용맹지심(須發勇猛之心)
숙겁선인(宿劫善因), 미가지야(未可知也)
약불신수승(若不信殊勝), 감위하열(甘爲下劣), 생간조지상(生艱阻之想), 금불수지(今不修之), 즉종유숙세선근(則縱有宿世善根), 금단지고(今斷之故), 미재기난(彌在其難), 전전원의(展轉遠矣)
금기도보소(今旣到寶所), 불가공수이환(不可空手而還)
일실인신(一失人身), 만겁난복(萬劫難復), 청수신지(請須愼之)
기유지자(豈有智者), 지기보소(知其寶所), 반불구지(反不求之), 장원고빈(長怨孤貧)
약욕획보(若欲獲寶), 방하피낭(放下皮囊)
마지막 구절은 보조국사의 마음이 너무 절절하여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다. 참으로 슬프도다, 좋은 음식을 만났으되 먹을 줄 모르고, 중병에 의사를 만났으되 약 먹을 줄 모르는 구나. 어렵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얻었건만, 사람들은 오욕락에 휘말려 세월을 탕진하고 집착의 늪에 허우적대고 있다. 그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들만의 세상에 머물며 저 바다의 넓음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이 법을 만난 것도 오래전의 공덕으로 이루어진 선근 인연이다. 용맹스러운 마음을 내어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최상승의 근기이고, 일생 최고의 공덕이고, 윤회를 벗어날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대가 큰 복덕이 있어 이렇게 보배가 넘치는 세상에 인연되어 찾아왔으니, 이생에서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은가. 보배는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육신에 집착을 놓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집착을 내려놓고 본성을 찾는데 방일하지 말라.
<결어>
지금까지 마음 닦는 비결(修心訣)을 해설해 보았다. 수심결은 아홉 개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의 비교적 짧은 경전이다. 질문과 답변을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해본다.
질1) 불성이 지금 내 몸에 있다고 하는데 범부는 왜 보지 못하나?
답1) 범부는 육신에 의지하고 오욕락에 집착하므로 불성(본성)을 보지 못한다.
질2) 견성을 했다면 신통변화가 생겨야 하는데, 왜 신통력을 나타내지 못하나?
답2) 견성이란 본래 성품(본성)을 본 것이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돈오 후엔 수많은 번뇌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다. 다만, 돈오 후에도 수많은 생 동안 잠재된 습기로 인해 망상들이 솟구치므로 지속적으로 수행(점수)해야 한다.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게 되면 전생의 업력에 따라 여섯가지 신통력 중에 본인의 업에 맞는 신통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집착이 되므로 돈오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
질3) 이미 돈오했는데 왜 점수가 필요한가?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완전한 돈오라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답3) 습기는 과거 오랜 생 동안 오욕락에 의지해서 살아온 마음에 잠재되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다. 그 에너지가 견성하여 한순간에 없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안타깝게도 습기는 돈오했다고 곧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본능처럼 불쑥불쑥 제멋대로 튀어 올라오는 것이다. 따라서 돈오했을지라도 지속적으로 매 순간 일어나고 소멸하는 마음을 관조하면서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정혜쌍수’이다. 이렇게 견성한 후 통찰하는 삶을 산다면 큰 지혜를 얻을 것이고, 중생이 보지 못하는 신통도 얻을 것이다.
질4) 어떤 방편으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나?
답4) 방편이 따로 없다. 그저 여섯 감각기관을 멈추고, 마음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어 내면을 들여다보아라. 보고자 하면, 반드시 보이고 찾고자 하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질5) 중하근기 범부를 위해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방편을 말해 달라.
답5) 본성을 보는 데 도움 되는 힌트를 주노라. 내 몸이라는 것은 원래 텅 비어있음을 알라. 이렇게 멀쩡하게 만져지고 보여지는데 어찌 텅 비어 있다고 말하는가. 모든 여섯 감각을 닫되 그 의문 하나만을 가지고, 깊은 명상을 하여라. 그러면 반드시 본성을 보게 될 것이다. 텅 비어있음을 아는 마음이 곧 본성이고 그 본성의 특징은 공적영지(텅 비어 고요하고 신령스런 앎) 하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그것이 돈오 요, 일생 해야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질6) 공적영지의 마음은 무엇인가?
답6) 공적영지는 텅비어 고요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으로 형상과 모양이 없다. 공적영지는 오고감도, 생사도, 부처와 중생도 구별되지 않는 자리이다.
질7) 깨달음에는 계급이 없는데, 어찌 점수를 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답7) 깨달음에 계급이 없지만,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는 깨친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돈오는 큰 불을 끄는 것이고, 잔불을 정리하는 것이 점수이다. 잔불을 방치하면 또다시 큰불로 번질 수 있기에 잔불 정리를 위해 점수는 불가결한 수행이다.
질8)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닦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8) 위에서 본성은 ‘공적 영지’의 바탕이 있다고 했다. 즉, ①고요함 ②신령스런 앎, 두 가지가 그것이다. 선정은 깊은 명상을 의미한다. 여섯 감각기관을 닫고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선정 수행이다. 고요함을 얻기 위해 선정 수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떻게 얻는가? 지혜는 신령스런 앎이다. 신령스럽다는 것이 너무 거창하고, 신비롭고, 초월적인 그 무엇이라 여기지 말라. 지혜는 쉽게 말해 꿰뚫어 통찰하는 안목을 말한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도 일정 부분 지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온 우주를 관하고, 사물을 현상을 본질적으로 꿰뚫어 통찰하는 능력은 이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요함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무정물의 바위와 같고, 지혜만 있고 고요함이 없으면 꽃은 화려한데 뿌리가 없는 조화(造花)와 같다. 아니 전제가 잘못되었다. 지혜는 고요함이 바탕되지 않으면 애초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니 정과 혜는 상호 의존적이고 둘이 아니다. 선정으로 깊은 삼매를 이루고, 지혜로써 신령스런 통찰력을 얻는다.
질9)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닦는데, 두 가지 수행법에 대해 말해달라.
답9) 선정과 지혜를 닦는 두가지 문(자성문, 수상문)이 있다. 이제 막 입문한 초발심자나 열등한 근기의 사람이 수상문으로 먼저 닦아나가면 자성문에 이르게 된다. 자성문 자기본성의 문이고, 돈문이며, 부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문이다. 그리하여 자성문으로 본성을 깨치게 된다.(돈오)
돈오 후에도 잠재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수상문이 필요하다. 수상문은 대상을 따르는 문이고, 점문이며, 열등한 근기가 닦는 수행법이다. 자성문을 통해 깨달은 자도 수상문의 방편을 빌려 남은 습기를 제거하여 완전한 지혜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긴 시간 마음 닦는 비결(수심결)을 정리해보았다. 어느 날 원불교 경전을 읽다가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수심결>이었다. 제목부터 직관적이다. ‘마음을 닦는 비결’이라니. 삼복더위에 시원한 얼음물을 들이키듯 온몸의 갈증이 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조국사님이 현전하여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수심결>에 감동하여 여러 자료를 더듬어서 제 딴에는 쉽게 풀이한다고 했는데, 대사의 말씀을 제대로 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것은 원문이 함께 있으니 독자가 나의 설명만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염려가 조금 줄어든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처러 ‘자등명 법등명’, 타인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마음에 불을 밝히고, 부처의 가르침에 불을 밝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길 소망하는 바이다.
- 終 –
1. 임철호 블로그,《수심결(修心訣) 해석》
2. 윤홍식, 《윤홍식의 수심결강의》, 봉황동래(2013)
3. 원불교 교화부, 《원불교전서》, 원불교출판사(1995)
4. 기타자료 다수
修心訣 終
..........《수심결(修心訣)》해설-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