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닦는 비결(修心訣)》 해설-3

- 지눌, 수심결(修心訣) 해설-3

by 달빛타기



■ 제7 문답 – 깨달음에는 계급이 없는데, 어찌 점수 해야 하는가요


(질문) “이미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도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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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오차리(問旣悟此理), 갱무계급(更無階級), 하가후수(何假後修), 점훈점성야(漸熏漸成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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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깨달은 뒤에 점진적으로 닦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다 말했는데 의심을 풀지 못하니 거듭해서 설명해 주겠다.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는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섯 세계(五道,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계)에 흘러 다니면서 태어나고 죽고 하되,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妄想顚到:현재의 번뇌)과 무명의 습기(無明種習:근본 번뇌)가 오래되어 지금의 습성을 이루었다.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신의 ‘본성’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단박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익혀온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에, 힘든 경계(역경)나 편한 경계(순경)를 만나게 되면 성내거나 기뻐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여, 객관세계에 대한 번뇌가 그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지혜로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무명(無明, 정신적인 어두움)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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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오후점수지의(答悟後漸修之義), 전이구설(前已具說), 이부의정미석(而復疑情未釋), 불방중설(不妨重說), 여수정심(汝須淨心), 체청체청(諦聽諦聽)
범부(凡夫), 무시광대겁래(無始曠大劫來), 지어금일(至於今日), 유전오도(流轉五道), 생래사거(生來死去), 견집아상(堅執我相), 망상전도(妄想顚倒), 무명종습(無明種習), 구여성성(久與成性)
수도금생(雖到今生), 돈오자성(頓悟自性), 본래공적(本來空寂), 여불무수(與佛無殊), 이차구습(而此舊習), 졸난제단(卒難除斷), 고봉역순경(故逢逆順境), 진희시비(瞋喜是非), 치연기감(熾然起減), 객진번뇌(客塵煩惱), 여전무이(與前無異)
약불이반야(若不以般若), 가공착력(加功着力), 언능대치무명(焉能對治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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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지만, 수많은 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진리는 드러났으나 망상은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하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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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대휴대헐지지(得到大休大歇之地)
여운돈오수동불(如云頓悟雖同佛),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 풍정파상용(風停波尙湧), 이현념유침(理現念猶侵)

제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오직 하나의 깨달음만 있고, 깨달음에 도달하면 전인적 완성체로 존재할텐데, 왜 깨친 뒤에도 계속 수행해야 하느냐고 거듭 묻는다. 스승은 답한다. 깨달음에는 계급이 없지만, 수많은 전생까지 포함한 아득한 옛날부터 이 몸이 나라는 생각에 빠져 깊게 뿌리내린 이 습기는 지금 깨달았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힘든 일을 만나면 노여워할 것이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기뻐할 것이다. 또 세상이 알음알이로 분별하도록 형성되어 있으므로 세상과 접촉하면서 옳다, 그르다 끊임없이 선과 악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절대계에서 참나를 보았지만, 객관세계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번뇌에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업장과 습관화된 탐진치 번뇌가 조건이 되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금에 단박 깨달았다고는 하나 점수로써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의 경지를 보임할 수 없는 것이다. 세찬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친다. 진리를 보았고 진리가 중심이 되었지만, 일정 조건이 되면 여전히 번뇌 망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또 대혜 종고(宗杲, 1089~1163)선사도 ‘간혹 영리한 근기의 무리들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런 이치를 알고는 아주 쉽다는 마음을 내어 다시는 닦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면 다시 전처럼 흘러 다니며 방랑하게 되니,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하였다. 그러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따르지 말 것이며, 버리고 또 버려서 무위(無爲, 에고를 극복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究境, 궁극의 경지)이니,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뒤에 소 기르는 수행(목우행牧牛行)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마음의 본성이 본래 청정한 것임을 ‘돈오’하였으니 악을 끊되, 끊어도 끊는 바가 없으며, 선을 닦되, 닦아도 닦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닦음이고 참다운 끊음이다.
그러므로 ‘온갖 행실을 모두 닦되, 오직 무념(無念, 참나, 공적영지)을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의미를 총괄하여 말하기를 ‘이 본성을 단박에 깨달으면, 본성에는 애초에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와 성품이 갖추어져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니, 이러한 깨달음에 의지해서 갈고 닦아가는 것을 ‘최상승선’(最上乘禪), 또는 ‘여래청정선’이라고 한다.
만약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면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백천 삼매(일상 생활이 모두 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達磨) 문하에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런 선(禪)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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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선사운(又杲禪師云), 왕왕이근지배(往往利根之輩), 불비다력(不費多力), 투발차사(投發此事), 변생용이지심(便生容易之心), 갱불수치(更不修治)
일구월심(日久月深), 의전유랑(依前流浪), 미면윤회(未免輪廻), 즉기가이일기소오(則豈可以一期所悟), 변발치후수야(便撥置後修耶)
고오후(故悟後), 장수조찰(長須照察), 망념홀기(妄念忽起), 도불수지(都不隨之), 손지우손(損之又損), 이지무위(以至無爲), 방시구경(方始究境),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 오후목우행시야(悟後牧牛行是也)
수유후수(雖有後修), 기선돈오망념본공(己先頓悟妄念本空), 심성본정(心性本淨), 어악단(於惡斷), 단이무단(斷而無斷), 어선수(於善修), 수이무수(修而無修), 차내진수진단의(此乃眞修眞斷矣)
고운수비수만행(故云雖備修萬行), 유이무념위종(唯以無念爲宗)
규봉총판선오후수지의운(圭峰總判先悟後修之義云), 돈오차성(頓悟此性), 원무번뇌(元無煩惱),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 여불무수(與佛無殊), 의차이수자(依此而修者), 시명최상승선(是名最上乘禪), 역명여래청정선야(亦名如來淸淨禪也)
약능염염수습(若能念念修習), 자연점득백천삼매(自然漸得百千三昧), 달마문하(達磨門下), 전전상전자(展轉相傳者), 시차선야(是此禪也)
즉돈오점수지의(則頓悟漸修之義), 여거이륜(如車二輪), 궐일불가(闕一不可)

송나라 대혜종고 스님(1089~1163) 간화선(화두를 들고 하는 명상)을 만드신 분으로 선불교의 거두이시다. 대 선사 대혜 스님이 말하길, 영리한 무리들이 이런 이치를 알고는 본성을 찾은 뒤에는 돈오(깨달음) 했다는 아만심에 빠져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다. 수행하지 않으니 수많은 무의식에 잠재된 습기로 인해 예전으로 돌아가고 결국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수행자들은 깨친 뒤에도 늘 자신을 비추고 망념을 다스려 완전히 에고를 극복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정진하여야 한다. 이 수행은 마치 소 키우는 것과 같아 이를 ‘목우행’이라 한다.

수행자가 돈오를 이미 이루었다면 돈오를 하지 못한 수행자와는 다른 닦음이 된다. 돈오한 수행자는 참 자아를 발견한 자이고, 그것이 텅 비어있음을 알고 신묘한 작용을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수행자와는 전혀 다른 수행법이 된다.

깨닫지 못한 수행자는 아직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조건으로 생성된 몸이 자신이라 여기므로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닦음이고, 돈오한 사람은 이 몸이 공(空)함을 알고 있기에 행하여도 행함이 없고, 닦아도 닦음이 없는 경지가 된다. 내 몸의 주인이 안이비설신의가 아니라 참나가 주인이 되어 자신을 관하여 통찰하는 것이다.


규봉스님도 같은 말을 하였다. 본성을 단박에 깨닫고 나면 본성은 결핍이 없는 완벽한 존재로 존재해왔고 그것은 부처의 지혜와 똑같음을 안다. 참나에 의지 해서 수행하는 것은 여러 선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법(최상승선)이요,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하여 깨닫는 선(여래청정선)이라 부른다. 이런 수행법으로 계속 정진하면 모든 일상에서 삼매를 얻을 것이다. 달마스님이 이 법을 전하고 그 문하에서 이 법을 계속 이어온 최상승법이다. 그러니 돈오와 점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니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본성이 본래 텅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억압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는 것처럼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성문(聲聞, 소승小乘 수행자)은 마음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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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或者), 불지선악성공(不知善惡性空), 견좌불동(堅坐不動), 날복신심(捺伏身心), 여석압초(如石壓草), 이위수심(以爲修心), 시대혹의(是大惑矣)
고운성문(故云聲聞), 심심단혹(心心斷惑), 능단지심시적(能斷之心是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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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본성에서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한다면 일어나되,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일어나는 자리가 본래 고요한데, 어찌 다시 끊을 것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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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관살도음망(但諦觀殺盜婬妄), 종성이기(從性而起), 기즉무기(起卽無起), 당처변적(當處便寂), 하수갱단(何須更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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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잡념이 일어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잡념의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울 따름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이른바 ‘잡념이 일어나면 알아차릴 뿐이니, 알아차리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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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운(所以云), 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우운염기즉각(又云念起卽覺), 각지즉무(覺之卽無)

수행에도 순서가 있다. 돈오를 먼저 하고 점수를 나중에 해야 한다. 돈오를 하지 못한 채, 점수만을 하는 자는 본성을 보지 못한 자이고, 본성이 텅 비어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계속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억압하면서 수행이라 말한다. 천번 만번 절을 하고, 염불이나 사경을 수천만 번을 하고, 거꾸로 매달리거나, 불로 몸을 지진다든지, 숨을 오래 참는다든지, 그렇게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여 가열차게 자신을 학대한다. 마치 시한부 환자들이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를 맹신하여 기괴한 것을 먹어보기도 하고, 희한한 방법으로 자신을 학대하면서 치유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수행의 진척이 없으면 ‘수행이 부족하구나’ 스스로 여겨서 육체나 마음을 억압하는 다른 형태의 방법을 강구하다가 진척이 없으면 또 다른 것을 찾아다니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닦음을 하기에 진척이 없고 망상만 커져간다. 먼저 참나를 보지 못하면 오온이 주인인 줄 알기에 계속 헛발질하며 헤맨다. 그러기에 우선하여 본성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행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비록 밖에서 날아 들어온 망상과 번뇌가 있더라도 모두 제호(醍醐, 우유를 숙성시켜 만든 최고의 음식을 뜻하여 여기서는 부처의 성품에 비유했음)를 이룬다. 다만 미혹에는 뿌리가 없고 허공 꽃처럼 실체가 없는 삼계(三界)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으며, 허수아비와 같은 객관세계는 마치 끓는 물에 사라지는 얼음과 같음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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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인분상(故悟人分上), 수유객진번뇌(雖有客塵煩惱), 구성제호(俱成醍醐), 단조혹무본(但照惑無本), 공화삼계(空華三界), 여풍권연(如風卷煙), 환화육진(幻化六塵), 여탕소빙(如湯消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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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능히 이와같이 생각 생각마다 닦고 익혀서,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챙기면 곧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고, 자비(덕德)와 지혜가 자연스럽게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끊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 육신의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만약 여기서 '미세한 번뇌의 흐름'마저도 영원히 끊어지면, '원만한 깨달음의 위대한 지혜'(大圓鏡智)를 이루어 광명하게 홀로 존재하며, 천 백억의 화신을 시방세계 안에서 나타내어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달려가 감응하리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비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 영원한 쾌락을 얻은바 근심이 없으므로, 이를 일러 '크게 깨달아 세상에서 존중받는 분'(大覺世尊)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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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능여시염염수습(若能如是念念修習), 불망조고(不忘照顧), 정혜등지(定慧等持), 즉애악자연담박(則愛惡自然淡薄), 비지자연증명(悲智自然增明), 고업(辜業), 자연단제(自然斷除), 공행자연증진(功行自然增進), 번뇌진시(煩惱盡時), 생사즉절(生死卽絶)
약미세유주영단(若微細流注永斷), 원각대지낭연독존(圓覺大智朗然獨存), 즉현천백억화신(卽現千百億化身), 어십방국중(於十方國中), 부감응기(赴感應機), 사월현구소(似月現九霄), 영분만수(影分萬水)
응용무궁(應用無窮), 도유연중생(度有緣衆生), 쾌락무우(快樂無憂), 명지위대각세존(名之爲大覺世尊)


깨달은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온 수많은 번뇌 망상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깊은 호수처럼 평온한 상태가 된다. ‘평온’은 깨달은 자에게 나타나는 마지막 성품이다.


7각지((七覺支, satta bojjhan.ga)는 깨달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곱 가지 요소를 말한다. 초기불전에서는 칠각지가 반드시 순서대로 나타난다. ① 염각지는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깨달은 사람은 매 순간 마음챙김을 한다. ② 택법각지는 바른 법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③ 정진각지는 깨달음에 이르렀어도 방일하지 않고 항상 정진하는 요소이다. ④ 희열각지는 선정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환희심을 느끼는 마음 상태이다. ⑤ 경안각지는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다. ⑥ 정각지는 본삼매에 들어가게 된다. ⑦사각지는 이러한 모든 요소가 갖추어졌을 때 얻는 평안을 말한다.

세상은 강력한 태풍과 같아서 항상 감정을 흔들고, 쓸데없는 생각에 집착하게 한다. 그런 외부적인 환경에서도 깨달은 자는 그 평온을 잃지 않는다. 왜 그러겠는가. 몸과 마음과 생각이 자신이 아니라 그저 조건 지어져서 이루어진 오온덩어리임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오온덩어리는 무상하고, 고(苦)하며, 무아이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도 한순간의 깨달음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관조하면서 선정과 지혜를 닦음으로써 범부들의 마음가짐 상태인 탐진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탐진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면 윤회를 벗어나게 되고 생사의 굴레도 영원히 끊기게 된다. 미세한 번뇌까지 완전히 끊어내는 ‘멸진정’에 이르면 보름달처럼 스스로 광명을 나투어 그 빛을 중생에게 널리 비추어 줄 수 있다. 이런 분을 ‘크게 깨달아 세상에서 존중받는 분, 즉 ’대각세존‘이라 한다.





■ 제8 문답 –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닦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질문) “깨친 뒤에 닦아나가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가진다는 뜻을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말씀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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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후수문중(問後修門中), 정혜등지지의(定慧等持之義), 실미명료(實未明了), 갱위선설(更爲宣說), 위시개미(委示開迷), 인입해탈지문(引入解脫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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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법과 그 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은 선정과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대강을 들어보면, 자신의 본성에는 본체와 작용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앞에서 말한 ‘텅 비고 고요한 신령스러운 앎’(空寂靈知)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선정은 곧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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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약설법의(答若說法義), 입리천문(入理千門), 막비정혜(莫非定慧), 취기강요즉단자성상(取其綱要則但自性上), 체용이의(體用二義), 전소위공적영지시야(前所謂空寂靈知是也), 정시체혜시용야(定是體慧是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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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은 본체에 의존하는 바,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는다. 또한 본체는 작용에 의존하는 바,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정에 들면 지혜로워지니 고요하면서도 항상 아는 것이고, 지혜로워지면 선정에 들게 되니 투철히 알면 항상 고요한 것이다.
조계 스님(혜능, 638~713)이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기 본성의 선정이요, 마음자리가 어리석지 않음이 자기 본성의 지혜이다.’(《육조단경》)라고 한 말과 같다.
만약 이처럼 깨달아서 고요함과 아는 것에 자유로워서 선정(遮)과 지혜(照)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돈문’에 들어간 뛰어난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닦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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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체지용고(卽體之用故), 혜불리정(慧不離定), 즉용지체고(卽用之體故), 정불리혜(定不離慧), 정즉혜고(定則慧故), 적이상지(寂而常知), 혜즉정고(慧則定故), 지이상적여(知而常寂如)
조계운(曹溪云),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癡自性慧), 약오여시(若悟如是), 임운적지(任運寂知), 차조무이(遮照無二), 즉시위돈문개자(則是爲頓門箇者), 쌍수정혜야(雙修定慧也)

앞서 수행은 반드시 돈오를 우선해야 하고, 후에 점수를 해야 한다고 <수심결>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자가 묻기를, 수행자가 돈오한 뒤에 점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묻고 있다. 선지식들이 돈오한 후에도 선정과 지혜를 동등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 뜻을 알려달라고 묻고 있다. 널리 알려진 ‘정혜쌍수’에 대한 물음이다.

스승은 답한다. 돈오 후에도 계속 수행해야 함은 분명하다. 돈오란, 자신의 본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인 참나는 사실 닦음이 필요없는 그 자체로 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러니 참나 자리에서는 닦음이 불필요하다. 다만 수많은 습기와 에고에 쌓여 참나를 망각하고 놓쳐버리는 탓에 수행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일테면 바위 속에 옥구슬이 박혀있어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옥구슬을 훤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군더더기인 바위를 깎아내야 한다. 옥구슬이 참나이고, 둘러쌓고 있는 바위는 에고 덩어리이다.

우리가 닦는다고 말할 때 무언가 결핍이 존재하므로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 결핍이란 말속에는 항상 채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 경전에 따르면, 닦아야 하는 대상은 소위 신수심법이란 4념처이다.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몸과 마음과 생각들이다. 이러한 오온에서 오는 것들은 모두 결핍되어 있고, 따라서 수행의 대상이 된다. 수행은 닦음으로써 향상되는 것을 기대한다. 이 몸과 마음, 생각은 매 순간 결핍의 상태이다. 조건에 의해 배고프다 하고, 잠자고 싶어 하고, 두려움에 싸이기도 하고, 갈애에 시달리게도 한다. 이런 모든 결핍이 발생하기에 우리는 사물을 직시하는 수행을 통해 통찰력을 높이게 된다. 그것이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깨침이 있고 난 후에도 수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비록 바위를 제거하고 옥구슬을 드러냈으나, 늘 먼지가 끼고, 이물질에 가려서 그 빛남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돈오 후에도 수행의 문은 수천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이 선정의 문과 지혜의 문, 이 두 가지 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지눌스님은 참나를 공적영지로 표현했다. 참나가 단순히 ‘진짜 나’임을 표현한 말이라면, 공적영지는 참나의 형질과 특질을 함의하여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참나의 다른 말인 공적영지는 ‘텅비고 고요한 신령스런 앎’이란 의미이다. 공적영지를 늘 밝게 빛나게 하는 것, 그곳에 번뇌 망상이 깃들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수행이다.

공적영지의 뜻에는 2가지의 요소가 섞여 있다. ① 고요함 ② 신령스런 앎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문에는 선정과 지혜가 필요하다. ① 고요함이란 번뇌 망상이 없는 상태이다. 고요함 속에 있을 때만이 비로소 옥구슬이 발현된다. 이것은 선정 수행을 통해서 이룬다 ② 신령스런 앎은 지혜를 말한다. 깊은 고요함을 이룰 때 신령스런 앎이 생긴다. 지혜 수행은 옥구슬에 먼지가 끼지 않도록 매일 매일 닦아주는 행위이다.

고요함은 선정수행을 통해서 이루고 이것이 곧 본체가 된다. 신령스러운 앎은 지혜이고, 이는 곧 작용이다. 이 지혜는 반드시 선정을 기반으로 해서 일어난다. 깊은 바다가 없으면 파도도 없다. 바다가 본체이고 파도는 작용이다. 선정이 있으므로 해서 지혜도 생긴다. 반대로 지혜가 생기면 저절로 선정에 들게 된다. 매 순간 마음챙김을 하면서 현존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선정이요 지혜다. 그리하여 텅 비어있어 아무것도 작용하지 못할 것 같은 공적영지가 ‘신령스러운 앎’이 생기는 것이다. 선정과 지혜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반드시 쌍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수행자는 이 둘을 항시 염두에 두고 정진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먼저 ‘고요함’으로써 분별 망상을 다스린 다음에 ‘깨어있음’으로 흐리멍덩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여, 선후를 따라 다스려 흐리멍덩함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들이 닦는 수행이다.
그는 비록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만을 취하는 수행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깨달은 사람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롭게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 스님은 ‘스스로가 깨쳐서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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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언선이적적(若言先以寂寂), 치어연려(治於緣慮), 후이성성(後以惺惺), 치어혼주(治於昏住), 선후대치(先後對治), 균조혼란(均調昏亂), 이입어정자(以入於靜者), 시위점문열기소행야(是爲漸門劣機所行也)
수운성적등지(雖云惺寂等持), 미면취정위행즉(未免取靜爲行則), 기위료사인(豈爲了事人), 불리본적본지(不離本寂本知), 임운쌍수자야(任運雙修者也), 고조계운(故曹溪云), 자오수행(自悟修行), 불재어쟁(不在於諍), 약쟁선후(若諍先後), 즉시미인(卽是迷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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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힘을 써서 노력한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자리에는 어떠한 인위적 조작도 발붙일 수 없으니,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한 특별한 경우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이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그러하고, 남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고, 내지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언제든지 항상 그러하다.
마치 빈 배가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이, 흐르는 물이 산을 싸고돌 때 굽이쳐 흐르기도 하고 곧장 흐르기도 하듯이, 마음 마음에 이리저리 따지는 알음알이가 없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도 무심하여 자유로워서 온갖 인연에 무심히 따르되, 어떠한 장애도 없어서, 악을 끊거나 선을 닦는다는 생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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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달인분상(則達人分上), 정혜등지지의(定慧等持之義), 불락공용(不落功用), 원자무위(元自無爲), 갱무특지시절(更無特地時節), 견색문성시(見色聞聲時), 단이마(但伊麽), 착의끽반시(着衣喫飯時), 단이마(但伊麽), 아시송뇨시(屙屎送尿時), 단이마(但伊麽), 대인접화시(對人接話時), 단이마(但伊麽), 내지행주좌와(乃至行住坐臥), 혹어혹묵(或語或默), 혹희혹노(或喜或怒), 일체시중일(一切時中一), 일여시(一如是)

사허주가랑(似虛舟駕浪), 수고수하(隨高隨下), 여류수전산(如流水轉山), 우곡우직(遇曲遇直), 이심심무지(而心心無知), 금일등등임운(今日騰騰任運), 명일임운등등(明日任運騰騰), 수순중연(隨順衆緣), 무장무애(無障無碍), 어선어악(於善於惡), 불단불수(不斷不受)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수행을 말한다. 깨쳤다 해도 수행을 멈춰서는 안된다. 돈오한 수행자는 2가지의 방향성으로 계속 수행한다. ① 고요함(평온, 선정수행)을 얻는 것 ②신령스런 앎(깨어있음, 지혜)을 얻는 것이다. 비록 돈오를 하였어도, 낮은 근기를 가진 사람들은 선정 수행하여 고요함을 증득한 뒤에 비로소 깨어있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선후를 따져서 수행하는 것은 열등한 근기를 가진 수행법이다. 육조대사의 말씀처럼, 수행은 선후를 분별하는 데 있지 않다. 선후를 따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깨친 사람은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 평등하게 가지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정혜쌍수는 마치 두 팔이나 두 발이나 두 눈과 같다. 선정과 지혜는 따로 분리하고자 해도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친 뒤에 수행자는 행주좌와 모든 행위에서 선정과 지혜를 자유롭게 동등하게 가지고 닦는다.



또한 순박 솔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보고 들음에 무심하여 한 티끌도 상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단 하나의 생각도 헛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않으니 마음에 경계가 반영되는 것을 잊으려는 노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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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직무위(質直無僞), 시청심상(視聽尋常), 즉절일진이작대(則絶一塵而作對), 하로견탕지공무(何勞遣蕩之功無), 일념이생정(一念而生情), 불가망연지력(不假忘緣之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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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습기는 무거우며, 관조하는 힘(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으며, 선악의 경계에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떠오른 대상을 잊어버리고 털어 없애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육근이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의식에 반영된 대상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어리석음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이것은 비록 수상문(隨相門, :각각의 대상에 따라 처방을 하는 문)의 선정과 지혜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라지만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문’가운데서는 그러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망상이 들끓거든 먼저 ‘선정의 문’을 활용하여 순리대로 이리저리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이 의식에 떠오른 이런저런 대상들을 따라가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해지도록 한다. 만약 마음이 흐리멍덩해지거든 이번에는 ‘지혜의 문’을 활용하여 진리를 분별, 선택하고 모든 현상계가 모두 텅 비어있음을 관조해보아 비추어보고 관찰함에 어리석음이 없게 하여 본래의 ‘신령한 앎’에 합해지도록 한다.

이렇게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한 상태(無記)를 다스린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잊고 대상(어지러운 생각과 멍한 상태)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선정·지혜)가 끝나면, 바깥 경계를 대하여도 생각 생각이 모두 근본으로 돌아가고, 인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합하게 되어, ‘고요함·신령한 앎’을 쌍으로 닦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비로소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챙겨서 ‘부처의 본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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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농습중(然障濃習重), 관열심부(觀劣心浮), 무명지력대(無明之力大), 반약지력소(般若之力小), 어선악경계(於善惡境界), 미면피동정호환(未免被動靜互換), 심불념담자(心不恬淡者), 불무망(不無忘), 연견탕공부의(緣遣蕩功夫矣)
여운육근섭경(如云六根攝境), 심불수연(心不隨緣), 위지정(謂之定), 심경구공(心境俱空), 조감무혹(照鑑無惑), 위지혜(謂之慧)
차수수상문정혜(此雖隨相門定慧), 점문열기소행야(漸門劣機所行也), 대치문중(對治門中), 불가무야(不可無也)
약도거치성(若掉擧熾盛), 즉선이정문(則先以定門), 칭리섭산(稱理攝散), 심불수연(心不隨緣), 계호본적(契乎本寂), 약혼(若昏), 침우다(沈尤多), 즉차이혜문(則次以慧門), 택법관공(擇法觀空), 조감무혹(照鑑無惑), 계호본지(契乎本知)
이정치호난상(以定治乎亂想), 이혜치호무기(以慧治乎無記), 동정상망(動靜相亡), 대치공종(對治功終), 즉대경이염염귀종(則對境而念念歸宗), 우연이심심계도(遇緣而心心契道), 임운쌍수(任運雙修), 방위무사인(方爲無事人), 약여시즉진가위정혜등지(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 명견(明見), 불성자야(佛性者也)

하근기의 사람들에게는 업장이 크고 습기가 무거우므로 관조하는 힘이 약하므로 쉽게 선악의 경계에서 동요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정으로 들어가는 문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마음에 떠오르는 번뇌 망상을 우선하여 없애도록 한다. 이처럼 하근기의 사람들에게는 선후를 지정하여 근기에 맞게 수행법을 알려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이를 수상문이라 한다. 수상법은 각각의 대상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문으로, 각각 중생의 근기에 맞게 어떤 사람에게는 고요함에 치중하는 수행법을 알려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깨어있는 수행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본래의 수행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망상이 많은 중생은 선정의 문을 일러주어 흩어진 번뇌 망상을 거두어서 본래 고요함의 자리에 합해지도록 할 것이고, 만약 망상은 그다지 없지만, 마음이 흐리멍덩한 상태의 중생이라면, 지혜의 문을 일러주어 매 순간을 관조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를 해야 할 것이다. 선정(사마타)은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는 데 특효이고, 멍한 상태를 다스리는 데는 지혜 수행(위빠사나)이 특효이다. 이렇게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닦아서 걸림없는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이 세상에 나와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부처의 본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하겠다.



..........《수심결(修心訣))》해설-4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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