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눌, 수심결(修心訣) 해설-2
■ 제3 문답 – 돈오했는데, 왜 점수해야 하는가요
(질문) 스님께서는 단박 깨달음(돈오頓悟)와 점진적으로 닦아감(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이 모든 성인들이 밟아온 길이라 하였습니다.
깨달았다면 이미 돈오한 것인데 어찌하여 점점 닦아야 하며(점수), 또한 그 닦음이 점점 닦아야 할 것이라면 어찌하여 돈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뜻을 다시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끊게 해주십시오.
문여언돈오점수양문(問汝言頓悟漸修兩門), 천성궤철야(千聖軌轍也), 오기돈오(悟旣頓悟), 하가점수(何假漸修), 수약점수(修若漸修), 하언돈오(何言頓悟), 돈점이의(頓漸二義), 갱위선설(更爲宣說), 영절여의(令絶餘疑)
(답)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인 것을 우리 자신의 몸이라 여기고, 망상을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 여겨서, 자신의 본성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바로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해서 마음 바깥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그러다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한 생각이 일어남에 그 생각이 나온 자리로 의식의 빛을 돌이켜 자신의 본성을 똑똑히 보고서, 이 본성 자리는 원래부터 번뇌가 붙을 수 없는 자리이며, 이 번뇌가 없는 신령스러운 앎의 성품은 본래부터 자신에게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이를 돈오라 하는 것이다.
답돈오자(答頓悟者), 범부미시(凡夫迷時), 사대위신(四大爲身), 망상위심(妄想爲心), 불지자성(不知自性), 시진법신(是眞法身), 불지자기영지(不知自己靈知), 시진불야(是眞佛也), 심외멱불(心外覓佛), 파파낭주(波波浪走), 홀피선지식(忽被善知識), 지시입로(指示入路), 일념회광(一念廻光), 견자본성(見自本性), 이차성지(而此性地), 원무번뇌(原無煩惱),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 즉여제불(卽與諸佛), 분호불수(分毫不殊), 고운돈오야(故云頓悟也)
점진적으로 닦아감(점수)이라는 것은 (돈오를 하여) 비록 자신의 본성이 부처와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시작 없는 과거부터 오랜 세월 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단박에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그 깨달음(돈오)에 의지해 닦으면서(점수)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공부를 이루는 것이니, 성인의 태아(聖胎)를 잘 기르고 배양함이 오래된 뒤에야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이 이미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아직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하여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점수자(漸修者), 수오본성(雖悟本性), 여불무수(與佛無殊), 무시습기(無始習氣), 졸난돈제고(卒難頓除故), 의오이수(依悟而修), 점훈공성(漸熏功成), 장양성태(長養聖胎), 구구성성(久久成聖), 고운점수야(故云漸修也)
비여해자(比如孩子), 초생지일(初生之日), 제근구족(諸根具足), 여타무이(與他無異), 연기력미충(然其力未充), 파경세월(頗經歲月), 방시성인(方始成人)
돈오란 단박에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는 명상 수행자에게 오는 일생일대의 특별한 선물이다. 우선 자신의 본성을 찾는 명상(참선)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돈오란 없다. 오직 명상하는 사람에게서만 돈오라는 선물이 주어진다. 아니, 수행자는 돈오하기 위해 명상한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돈오가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돈오하면 우리의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돈오란 무엇인가? 단박에 깨닫는 것이라 하는데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돈오는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보았다’하여 견성(見性)이라 이름한다. 중생은 자신의 몸이, 마음이 생각이 본래 자기 자신인 줄 알며 살고, 이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산다. 그런데, 명상하면서 깊이 들여다보았더니, 나 자신이 이 몸, 마음, 생각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곧 돈오이다.
진짜 나, 참나를 만나면 곧바로 안다. 가짜 나(에고)의 욕구를 채워주려고, 아등바등 인생의 전부를 쏟아부었던 지난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안다. 그리고 가짜 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분노했는가를 알게 된다. 본성을 만나면 인생의 숱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마음은 환희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경전에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10가지 족쇄를 벗어야 한다고 했다. ① 육신에 집착하는 견해(유신견) ② 회의적 의심 ③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계금취견) ④ 탐욕 ⑤ 분노 ⑥ 색계에 대한 탐욕 ⑦ 무색계에 대한 탐욕 ⑧ 아만(자만심) ⑨ 들뜸(산란한 마음) ⑩ 무명 이렇게 10가지 족쇄를 말한다. 이 족쇄들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가 돈오했을 때 단박에 끊어지는 족쇄는 어디까지인가? ①~③까지의 족쇄가 단박에 끊어진다. 이 3가지 족쇄는 우리가 ‘참나’를 보지 못해서 생긴 환영같은 것이다.
이 3가지 족쇄를 끊으면 ‘수타원과(예류과)’를 얻었다 하고, 더 정진하여 ①~⑤까지 결박을 끊었으나 ④, ⑤가 희미하게 남은 자를 ‘사다함과(일래과)’를 얻었다고 하고, ①~⑤까지 결박을 완벽하게 끊어낸 자를 ‘아나함과(불환과)’를 얻었다 하고, ①~⑩까지 완전히 족쇄를 끊은 자를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우리가 ‘돈오’라고 말하는 것은 첫 단계의 과인 수타원과를 얻은 것을 말한다. 본성을 보게 되면 3가지 그릇된 견해가 부서진다. 우선 ①육신에 집착하는 견해가 사라진다. 몸은 그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물질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한다. 그런고로 이 몸덩이에 집착하는 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어리석은 일이다. ② 회의적 의심 또한 저절로 사라진다. 본성이 있을까, 존재에 대한 회의적 의심,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라는 의심이 단박에 사라진다. ③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특정 계율이나 의식에 집착하여 해탈하려는 것이 번뇌 망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자는 묻는다.
돈오하여 깨달았거늘 스승님께서는 어찌하여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 건가요?
돈오가 인생에서 큰 깨달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본성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내 의식에 잠재되어있는 습기는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삶은 깨달은 사람들과 같이 사는 곳이 아니라, 중생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내가 깨달았다고 하나, 중생과 계속 맞닥뜨리는 상황에 부딪히면 언제든지 옛날 습성이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돈오했어도 점수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지키고 제반 상황에 지혜로써 대하는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보임(保任, 保護任持의 준말)’이라 한다. 깨달음(돈오)도 중요하지만, 그 깨달음을 유지(점수)하는 ‘보임’도 매우 중요하다. 앞서 말한 10가지 족쇄 중에 ④~⑩에 이르는 족쇄는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 돈오하여 조금은 희미해지더라도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점수가 필요한 것이다.
선방에서 좌정하여 몸과 마음을 멈추고, 깊은 명상에 이르러 진실로 본성을 찾는다. 마음에 환희심으로 가득 찼고, 세간에서 추구해왔던 모든 것들이 열정이란 이름의 또 다른 욕망임을 눈치채게 된다. 아, 이제 나도 부처의 마음을 찾았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간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중생과 부딪힌다. 가부좌를 틀고 선방에서 명상할 때는 마음의 고요와 평정심을 가졌었는데,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그전과 똑같은 방식의 버릇과 습관이 튀어나온다.
참나가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하는데, 돈오하고서도 정진하지 않으면 전과 같이 오온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방식에 하나둘 젖어 든다. 의심할 것이다. 돈오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한번 대청소했다고 하여 영영 청소하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치아 스케일링을 받았어도 치석은 생기기 마련이다. 내시경 하면서 장 청소를 완벽하게 하였어도 찌꺼기는 생기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먼지는 지속적으로 청소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번뇌는 무시로 다가오고 겹겹이 쌓인다. 따라서 좌선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명상이 필수적이다. 이를 ‘생활선’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수행법의 이름을 ‘위빠사나’ 수행법이라 한다. 수심결에서는 이렇게 매 순간 자신을 관하여 통찰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점수’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 제4 문답 – 어떤 방편으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가요
(질문)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본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답) 단지 그대 자신의 마음일 뿐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다는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자신의 본성에 대해)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그 눈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찌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본 것과 같을 것이다. 다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작하방편(問作何方便), 일념회기(一念廻機), 편오자성(便悟自性)
답지여자심(答只汝自心), 갱작십방편(更作什方便), 약작방편(若作方便), 갱구해회(更求解會), 비여유인(比如有人), 불견자안(不見自眼), 이위무안(以謂無眼), 갱욕구견(更欲求見)
기시자안(旣是自眼), 여하갱견(如何更見)
약지불실(若知不失), 즉위견안(卽爲見眼), 갱무구견지심(更無求見之心), 기유불견지상(豈有不見之想)
자신의 신령스러운 앎(靈知)도 또한 이와 같다.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기를 구한다면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른다는 것’만을 똑똑히 알면 되니,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을 본 것이다(見性:성품을 봄).
자기영지(自己靈知), 역부여시(亦復如是), 기시자심(旣是自心), 하갱구회(何更求會)
약욕구회(若欲求會), 편회부득(便會不得),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제자는 돈오를 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묻는 사람은 답답해서 묻겠지만, 스승 또한 너무 쉬운 방법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가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 그렇다하여 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매 순간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눈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눈이 있느냐 없느냐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본성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앎의 주인이 되어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 좌정하여 고요히 깊은 명상을 하라. 그러면 볼 것이고 만날 것이다. 본성이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보름달처럼 훤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 제5 문답 –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방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질문)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은 듣는 즉시 쉽게 이해하겠지만 중간 근기나 아래 근기의 사람들은 의심이 생길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미혹한 사람들도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답) ‘도는 안다는 것에 속해 있지도 않고 모른다는데 속해 있지도 않다. 그대는 어리석음을 간직한 채로 깨닫기를 바라는 허황된 마음을 버리고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모든 현상(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오감과 의식의 대상(塵境 진경:감각의 대상인 객관세계. 즉 眼, 耳, 鼻, 舌, 身, 意에 비춰지는 대상인 色, 聲, 香, 味, 觸, 法을 말 함)은 본래 텅 빈 것이다.
모든 현상(法)이 텅 빈 그 자리에서도 ‘신령스러운 앎’은 어둡지 않으니, 이 ‘텅 비고 고요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이 마음’(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이야 말로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성품을 말함)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하게 서로 전해온 진리이다.
만약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모두 삼계를 초월하고 집에 돌아가(歸家: 본래 부처인 마음자리를 뜻함) 단박에 의심을 끊는 경지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할 것이니, 하루에 황금 만 냥을 소비하듯이 한량없는 귀한 공양을 인간과 천상으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다면 참다운 대장부로서 일생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다 끝냈다고 하겠다.’
문상상지인(問上上之人), 문즉이회(聞卽易會), 중하지인(中下之人), 불무의혹(不無疑惑), 갱설방편(更說方便), 영미자취입(令迷者趣入)
답도불속지부지(答道不屬知不知), 여제각장미대오지심(汝除却將迷待悟之心), 청아언설(廳我言說), 제법여몽(諸法如夢), 역여환화(亦如幻化), 고망념본적(故妄念本寂), 진경본공(塵境本空)
제법(諸法), 개공지처(皆空之處), 영지불매(靈知不昧), 즉차공적영지지심(卽此空寂靈知之心), 시여본래면목(是汝本來面目), 역시삼세제불(亦是三世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 밀밀(密密), 상전저법인야(相傳底法印也)
약오차심(若悟此心), 진소위불천계제(眞所謂不踐階梯), 경등불지(徑登佛地), 보보초삼계(步步超三界), 귀가돈절의(歸家頓絶疑)
편여인천위사(便與人天爲師), 비지상자(悲智相資), 구족이리(具足二利), 감수인천공양(堪受人天供養), 일소만량황금(日消萬兩黃金)
여약여시(汝若如是), 진대장부(眞大丈夫), 일생능사기필의(一生能事己畢矣)
제자는 거듭해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방편을 말해달라고 한다. 수행자가 부처가 되겠다고 세속을 떠나 입산했는데, 은산철벽이 가로막힌 듯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을 때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사실 본성을 보지 못하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공부가 모두 도로 아미타불이다. 하지만 단 며칠만의 수행으로 본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진일보가 될 것이다. 하근기의 사람들은 계속 의심하고 미혹함이 두터워 세월만 붙잡고 있게 되고, 상근기인 사람은 순식간에 이해하여 혜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대저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생각)와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봄·들음·냄새 맡음·맛 봄·느낌·의식)은 본래 텅 빈 것이다. 만져지고 느껴지는데, 왜 텅 비어 있다고 하는가. 그러니 명상을 해서 텅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몸을 더 잘게 부수고 나중에는 원자까지 이르러 그 원자를 또 분해하여 보았더니 텅 비어 있더라는 현대과학적 해석도 있다. 텅 비어 있는 그곳에는 하나의 에너지만 있고 물질로써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질, 즉 안이비설신의가 텅 비어 있으니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도 당연히 텅 비어 있게 된다. 그렇다면 텅텅 비어 있는 이 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텅 비고 고요한’(空寂) 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이 마음’(영지 지심靈知 之心)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본성이다. 그 본성을 발견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오직 명상 수행법만이 그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하게 전해온 진리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곧바로 그 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본성을 깨닫게 되면 천상의 스승이 되고, 본인과 타인을 이롭게 하며, 인간과 천상으로부터 귀한 공양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이처럼 돈오하게 되면, 참다운 대장부로서 일생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다 끝냈다고 보는 것이다.
여담으로 인도 사람들의 인생관을 살펴보자. 수행에 진심인 인도 사람들은 인간의 수명을 최장 100년으로 가정하여 삶을 25년씩 4개의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를 ‘아슈라마’라 한다. 각 단계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해탈을 의미하는 ‘목샤(Moksha)’에 도달하는 데 있다.
① 브라흐마차리(Brahmacharya)는 ‘학생 단계’를 뜻한다. 0세부터 25세까지의 기간으로 학습과 영적 성장을 위한 시기이다. 삶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다.
② 그리하스타(Grihastha)는 ‘가정주부(가장) 단계’를 뜻한다. 25세부터 50세까지의 시기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이루며, 그들을 부양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시기이다.
③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는 ‘은퇴단계’를 뜻한다. 50세부터 75세까지의 시기로 은퇴 이후에 세속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은둔 수행과 자아 성찰에 들어가는 시기를 말한다. 경전 공부와, 명상수행 등에 집중하게 된다.
④ 산야스(Sanyas)는 ‘수행자 단계’를 의미한다. 75세 이후의 삶으로 세속적 욕망을 완전히 차단하고 순수하게 영적 수행에만 매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세속과 완전히 단절하여 오로지 탁발을 통해 생존하며, 그동안 충실히 쌓아놓은 영적인 성취를 바탕으로 목샤에 도달하기 위한 마지막 정진에 힘을 쏟게 된다.
당신이 수행자가 아닐 수도 있고, 명상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인생의 목적을 목샤에 두고, 그 시기에 맞게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도 나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참으로 귀한 공덕이고 귀한 인연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욕망, 욕정, 욕구하면서, 평생을 분노하고 어리석음을 간직한 채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생을 다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 제6 문답 – 공적영지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질문) 어떤 것이 저의 ‘텅비고 고요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空寂靈知之心) 입니까?
(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다.
어찌하여 그 자리를 곧장 돌이켜 보지 않고서 밖으로 찾아 헤매는가?
내가 지금 그대의 경지에 근거하여 그대의 본래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 그대로 하여금 깨닫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내 말을 잘 들어라.
문거오분상(問據吾分上), 하자시공적영지지심야(何者是空寂靈知之心耶)
답여금문아자(答汝今問我者), 시여공적영지지심(是汝空寂靈知之心)
하불반조(何不返照), 유위외멱(猶爲外覓)
아금거여분상(我今據汝分上), 직지본심(直指本心), 영여변오(令汝便悟), 여수정심(汝須淨心), 청아언설(聽我言說)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혹은 화를 내거나 기뻐하거나, 옳다, 그르다고 하면서 갖가지로 활동하고 움직인다. 자, 말해 보라! 능히 이렇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자는 누구인가.
만약 육신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무슨 이유로 방금 죽은 사람의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도 눈으로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로 말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붙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하는가?
이렇게 볼 때 능히 보고, 듣고, 동작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래 마음이지, 그대의 육신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는 그 본성이 텅 비어 있어서 거울 속의 모양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그런데 어찌 항상 또렷하게 알며, 분명하고 어둡지 않아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이 셀 수 없는 신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데(일상 생활에서 육근을 사용하는 것) 있다.’ 하였다.
종조지모(從朝至暮), 십이시중(十二時中), 혹견혹문(或見或聞), 혹소혹어(或笑或語), 혹진혹희(或瞋或喜), 혹시혹비(或是或非), 종종시위운전(種種施爲運轉), 차도필경시수(且道畢竟是誰), 능이마운전시위야(能伊麽運轉施爲耶)
약언색신운전(若言色身運轉), 하고유인(何故有人), 일념명종(一念命終), 도미괴란(都未壞爛), 즉안불자견(卽眼不自見), 이불능문(耳不能聞), 비불변향(鼻不辨香), 설불담론(舌不談論), 신불동요(身不動搖), 수불집착(手不執捉), 족불운분야(足不運奔耶)
시지능견문동작(是知能見聞動作), 필시여본심(必是汝本心), 불시여색신야(不是汝色身也)
황차색신(況此色身), 사대성공(四大性空), 여경중상(如鏡中像), 역여수월(亦如水月), 기능요요상지(豈能了了常知), 명명불매(明明不昧), 감이수통항사묘용야(感而遂通恒沙妙用也)
고운신통병묘용(故云神通幷妙用),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
본성과 공적영지는 같은 말이다. ‘사람’과 ‘인간’이 다른 낱말이지만, 결국 의미상 같은 말이듯이, 본성이 곧 공적영지이다. 다만 공적영지는 본성의 신묘함을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제자는 계속 갑갑하여 단어를 바꾸어 재차 물어본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공적영지란 말 그대로 우리 안에는 텅 비어 있고 고요한 그 자리가 있는데,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진공묘유이다. 참되게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묘하게 존재한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텅 비어 있는데 스스로 동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상식일 터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본성의 자리는 텅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모든 행동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 자체가 참으로 신령스러운 것이다. 다만 중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알아채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만약 육신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무슨 이유로 방금 죽은 사람의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도 눈으로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로 말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붙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하는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육신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지금 바로 죽은 사람의 눈은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코는 왜 냄새 맡지 못하는가? 지금 바로 죽은 사람은 산 사람과 다르지 않은데, 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단 말인가? 결국 죽은 사람은 산 사람과 달리 무언가가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본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는 육체는 그저 로봇과 같아서 메인 장치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온갖 행위를 하지만, 그 행위는 몸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있어 신묘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보조] 진리에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대에게 하나의 문을 가르쳐 주어 그대가 근원(참 자아)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스님] “예 듣습니다.”
[보조] “그렇다면 소리를 듣고 있는 ‘그대 자신’을 돌이켜 들어보라. 그 듣는 본성 자리에도 이런저런 많은 소리가 있는가?”
[스님] “그 자리에는 일체의 소리와 어떠한 분별도 없습니다.”
[보조] “훌륭하다! 이것이 바로 ‘소리를 관(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觀音入理之門)이다.
[보조]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그 자리(소리를 듣는 그대 자신)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어떠한 분별도 얻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 “원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가 않습니다.”
[보조] “그렇다면 어떤 것이 텅 비어 있지 않은 본체인가?”
[스님] “형상과 모양이 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보조]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차입리다단(且入理多端), 지여일문(指汝一門), 영여환원(令汝還源)
여환문아명작조지성마(汝還聞鴉鳴鵲噪之聲麼)
왈문(曰聞)
왈여반문여문성(曰汝返聞汝聞性), 환유허다성마(還有許多聲麽)
왈도저리(曰到這裏), 일체성일체분별(一切聲一切分別), 구불가득(俱不可得)
왈기재기재(曰奇哉奇哉), 차시관음입리지문(此是觀音入理之門)
아경문이(我更問爾), 이도도저리(爾道到這裏), 일체성(一切聲), 일체분별(一切分別), 총불가득(總不可得), 기불가득(旣不可得), 당이마시(當伊麽時), 막시허공마(莫是虛空麽)
왈원래불공(曰元來不空), 명명불매(明明不昧)
왈작마생(曰作麽生), 시불공지체(是不空之體)
왈역무상모(曰亦無相貌), 언지불가급(言之不可及)
왈차시제불제조수명(曰此是諸佛諸祖壽命), 갱막의야(更莫疑也)
스승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친철하게도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대는 지금 저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렇다면 소리를 듣고 있는 ‘그대 자신’을 돌이켜 들어보라. 그 듣는 본성 자리에도 이런저런 많은 소리가 있는가?”
“그 자리에는 일체의 소리와 어떠한 분별도 없습니다.”
귀로는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으로는 까마귀가 보인다. 이렇듯 안이비설신의 육처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감각으로 받아들이지만, 본성 자리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고, 보여짐도 없고, 촉감도 없다. 마치 달이나 태양처럼 그저 고요히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훌륭하다! 이것이 바로 ‘소리를 관(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觀音入理之門)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그 자리(소리를 듣는 그대 자신)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어떠한 분별도 얻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리를 예로 들었으니 ‘소리를 관하여 들어가는 문’이라 하겠다. 만약 보이는 것을 예로 들었다면 ‘보이는 것을 관하여 들어가는 문’이라 할 것이다. 만약 맛을 예로 들었다면, ‘맛을 관하여 들어가는 문’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안이빌설신의 육처가 모두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문이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본성에 이르게 되면 본성의 자리에는 어떠한 소리나, 보임이나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본성이 허공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원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텅 비어 있지 않은 본체인가?”
“형상과 모양이 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제자가 반문한다. ‘그 자리는 허공과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름날 한밤중에 뜨는 만월처럼 어둡지 않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묻는다. ‘만약 그것이 텅 비어 있지 않으면 어떤 형상이 있을 것이다. 그 형상을 말해 보라.’ 제자는 다시 답한다. ‘빛나고는 있습니다만, 형상과 모양이 없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윽고 스승은 제자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내어주신다. ‘형상과 모양이 없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그것, 그것이 모든 일어남을 알아채고 있는 본체이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수행자 시절에 그토록 찾으려 했던 진리이자 생명이므로 더 이상 그것을 의심하지 말라’
(참나 안에서는) 이미 형상과 모양이 없으니 어찌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이미 크고 작음이 없으니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한계가 없으니 안과 밖이 없으며, 안과 밖이 없으니 멀고 가까움이 없다. 멀고 가까움이 없으니 나와 남이 없으며, 나와 남이 없으니 오고 감이 없다.
오고 감이 없으니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으니 예전과 지금이 없다. 예전과 지금이 없으니 미혹함과 깨달음이 없으며, 미혹하고 깨달음이 없으니 중생과 부처가 없다. 중생과 부처가 없으니 오염됨과 청정함이 없으며, 오염됨과 청정함이 없으니 옳고 그름이 없다. 옳고 그름이 없으니 일체의 이름과 언어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일체의 의식과 감각기관과 그 대상, 일체의 망령된 생각이 모두 없다면 갖가지 형상과 모양과 갖가지의 이름과 언어를 모두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이야말로 어찌 본래에 텅 비어 고요(공적)하며 본래부터 어떤 물건(物)도 없는 그 자리가 아니겠는가?
기무상모(旣無相貌), 환유대소마(還有大小麽), 기무대소(旣無大小), 환유변제마(還有邊際麽), 무변제고(無邊際故), 무내외(無內外), 무내외고(無內外故), 무원근(無遠近), 무원근고(無遠近故), 무피차(無彼此), 무피차즉무왕래(無彼此則無往來), 무왕래즉무생사(無往來則無生死), 무생사즉무고금(無生死則無古今), 무고금즉무미오(無古今則無迷悟), 무미오즉무범성(無迷悟則無凡聖), 무범성즉무염정(無凡聖則無染淨), 무염정즉무시비(無染淨則無是非), 무시비즉일체명언(無是非則一切名言), 구불가득(俱不可得), 기총무여시(旣總無如是), 일체근경(一切根境), 일체망념(一切妄念), 내지종종상모(乃至種種相貌), 종종명언(種種名言), 구불가득(俱不可得), 차기비본래공적(此豈非本來空寂), 본래무물야(本來無物也)
본성을 보아라.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다. 물적인 모양이 없으므로 비교 대상이 없다. 따라서 크고 작음이 없고, 안과 밖 또한 없다. 멀고 가까움도 없다. 나와 남도 없다. 오고 감도 없다. 오고 감이 없으니 태어남과 죽음도 없다. 또한 그 자리엔 무시간성이다. 과거나 미래가 없다. 미혹함도 깨달음도 없다. 그 자리에서는 중생이나 부처나 오직 텅 비어있을 뿐이다. 그러니 오염됨과 청정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다. 모양이 없으므로 일체의 이름과 언어가 없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있지 않으니 생각에서 만들어진 갖가지 이름과 언어가 없다. 그래서 본체를 텅 비어 고요한 자리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형상 모두 텅 빈 그 자리에 신령스럽고 지혜로우며 어둡지 않아서 무정물과는 다른, 신령스러운 인식능력을 지닌 본성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텅 비고 고요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청정하고 텅 비어 고요한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의 뛰어나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일체 중생의 뿌리가 되는 깨달아 아는 본성(각성覺性)이니, 이 본성 자리만 깨닫고 지킬 수 있다면 앉은 자리에서 움직일 필요도 없이 그대로 해탈할 것이며, 이것에 어리석어 등진다면 여섯 가지 세계를 돌고 돌면서 끝없는 세월을 윤회할 것이다.
그런고로 이르되 "한 마음(一心)에 대해 어리석어 여섯 가지 세계를 돌고 도는 자는 진리를 떠난 것이며, 진리의 세계를 깨달아 한 마음을 회복한 자는 진리에 다시 복귀한 것이며 고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어리석다•깨달았다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라고 해서 더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연(然), 제법개공지처(諸法皆空之處), 영지불매(靈知不昧), 부동무정(不同無情), 성자신해(性自神解), 차시여(此是汝), 공적영지청정심체(空寂靈知淸淨心體), 이차청정공적지심(而此淸淨空寂之心), 시삼세제불(是三世諸佛), 승정명심(勝淨明心), 역시중생(亦是衆生), 본원각성(本源覺性), 오차이수지자(悟此而守之者), 좌일여이불동해탈(坐一如而不動解脫), 미차이배지자(迷此而背之者), 왕육취이장겁윤회(往六趣而長劫輪廻), 고운미일심이왕육취자(故云迷一心而往六趣者), 거야동야(去也動也), 오법계이부일심자(悟法界而復一心者), 래야정야(來也靜也), 수미오지유수(雖迷悟之有殊), 내본원즉일야(乃本源則一也), 소이(所以), 운언법자(云言法者), 위중생심(謂衆生心), 이차공적지심(而此空寂之心), 재성이불증(在聖而不增), 재범이불감(在凡而不減)
이렇게 본성은 텅 비어 있는데, 묘하게도 본성은 신령스럽고 지혜로우며 어둡지 않으며 신령스러운 인식능력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공적영지, ‘텅 비고 고요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공적영지는 모든 부처님이 깨달아 아는 마음이며, 일체중생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나 다만 중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이 본성 자리를 깨닫게 되면 이곳저곳 헤매지 않아도 곧바로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해탈을 할 것이며, 어리석게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육도를 계속해서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란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직 본성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계속해서 여섯 세계를 수만 생 거듭해서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수만 번을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지라도 깨닫지 못하면 다람쥐 쳇바퀴처럼 계속 생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니 수행자여, 진리란 본성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본성은 성인이나 범부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것이므로 곧바로 본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라고 해서 빛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다고 해서 어둡지 않다’하였다. 이미 성인이라 해서 불어나는 것도 아니오, 범부라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부처나 조사들이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 마음을 잘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만약 (그대 안에 존재하는 ‘참 마음’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면 의심이 담박 없어지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참되고 바른 견해를 일으켜서 직접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깨달은 자리(解悟處)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계급이나 차례가 없으므로 ‘돈’(頓:문득, 또는 담박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원인이 모든 부처의 과덕(果德:최상의 결실로 얻어지는 덕)과 일치하여 조금의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故云在聖智而不輝 隱凡心而不昧 고운재성지이불휘 은범심이불매
旣不增於聖 不少於凡 기부증어성 불소어범
佛祖奚以異於人 而所以異於人者 불조해이이어인 이소이이어인자
能自護心念耳 汝若信得及 능자호심념이 여약신득급
疑情頓息 出丈夫之志 發眞正見解 의정돈식 출장부지지 발진정견해
親嘗其味 自到自肯之地 친상기미 자도자긍지지
則是爲修心人 解悟處也 즉시위수심인 해오처야
更無階級次第 故云頓也 갱무계급차제 고운돈야
如云於信因中 契諸佛果德 여운어신인중 계제불과덕
分毫不殊 方成信也 분호불수 방성신야
거듭 말하거니와 본성의 자리는 성인이라 해서 더 밝게 빛나고, 범부라 해서 어둡게 비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나 범부나 그 본성의 빛남은 다 같다. 또한 본성을 찾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직시하면 곧바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성인은 점수로써 그 찾은 마음을 잘 보호하지만, 범부는 본성을 발견하려는 마음도 부족하고, 어쩌다 믿음을 내어 본성을 발견하여도 세파에 휘둘려 그 마음을 보호하기도 어려우니 금세 놓치고 만다. 수행자여, 바른 견해로 마음을 직시하여 깨달은 자리를 발견하라. 여기에는 계급도 없고 나이도 없고 오로지 깨달은 마음만 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내라.
..........《마음을 닦는 비결(修心訣)》 해설-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