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닦는 비결》 해설-1

- 지눌, 수심결(修心訣) 해설-1

by 달빛타기

수심결(修心訣)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닦는 비결’을 말한다. 제목을 읽는 순간부터 마음이 벌써 청청해지는 기분이다. ‘수심결’이라 했을 때는 사실 잘 와닿지 않는데, ‘마음을 닦는 비결’이라 풀이하니까 직설적이지만 가슴에 ‘척’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이 <수심결>의 끝부분의 문장은 오늘날 방일하는 우리에게 준엄한 죽비로 내리치는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이 중병에 걸려있고 명의를 만나 처방받았음에도 약 먹을 줄을 모른다며 한탄하고 있다. 이 끝말이 너무 절절하여 서두에 스님의 말씀을 간추려 전한다.


【 당신은 수많은 과거에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보라. 온갖 지옥에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았던 시절이 몇천 겁이었으며, 진리를 찾고 싶어도 착한 벗을 못 만나 오랜 겁을 윤회의 세계에 빠져 어두운 정신으로 온갖 악업을 지으며 살아왔노라. 생각해보고 또 해보아도 긴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름을 피워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으려 하는가?


또한 누가 그대를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으며, 진리를 닦는 길을 훤히 내보여 주었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무판자를 만나고, 수미산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작디작은 겨자씨에 꽂히는 것과 같이 경사스럽고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지금 이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고 게으름 피며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또 악도에 떨어져 온갖 고통 받을 때, 그제야 다급히 아무리 한 구절 진리의 말씀을 찾아 고통을 면하려 해도 어디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불이 붙어 그 불을 끄듯이 지금 바로 살피고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라.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이 곧 저물 것이니, 비록 오늘은 내가 살아 있지만 내일은 보장하기 어렵다.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


경(능엄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세상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이 ’진리의 가르침‘을 바르게 생각함으로써 얻는 공덕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인 이 법문이 가장 높고 귀하여 모든 공덕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니,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훌륭하다. 칠보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룬다.”하였다. ……


그대는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부탁건대 간절한 나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지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가 있는 곳을 알고서도 그것을 구하지 않고, 가난과 환경 탓을 하며 두고두고 원망만 하고 있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 주머니(육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


아침에 출근길에 어린아이 한 무리가 선생님의 인도로 숨을 헐떡이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순간, 오십여 년 전 어느 시골길에서의 내 모습을 데자뷰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위의 말씀처럼,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이 곧 저물 것’이란 문구가 떠올랐다. 그래, 살아보니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구나, 이제 석양처럼 이 몸도 곧 저물어가겠지. 인생은 뜬구름 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너무 짧다. 어쩌다 사람의 몸을 받아 한바탕 놀다 보니 어느새 석양을 바라보고 서 있구나.


불교적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한다. 수많은 중생 중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남이 첫 번째 행운이고, 또 깨달음의 법(담마)을 설해줄 스승과 담마를 만날 수 있는 나라에 태어났으니 이것이 두 번째 행운이고, 의심을 풀고 정진하면 도과(道果)를 얻어 더 이상의 고통의 바다(윤회)를 헤매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이것이 지눌스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절절한 당부의 말이라 생각된다.


명상은 한마디로 ‘마음을 닦는 행위’이다. 수심결은 ‘마음을 닦는 요결’로써 보조국사 지눌이 참선하여 마음을 닦는데 필요한 내용과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히고자 하여 저술한 글이다. 비록 5천여 자의 짧은 내용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대장경에도 수록되었고, 국내외에 깊은 영향을 끼친 한국을 대표하는 선서(禪書)이다. 명상하는 사람은 반드시 곁에 두고 몇 번이고 읽어보아서 그 진리의 맛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수심결은 고려시대에 한국 고승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스님이 지은 <명상서>이다. 보조 지눌(1158~1210)스님은 고려 중기 이후 선종의 중흥 및 한국 선 사상의 확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고승이다. 지눌스님은 1158년(고려 의종 12년)에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했다. 휘는 ‘지눌’이고, 법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수심결은 지눌의 법호를 붙여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라 부르기도 하고, ‘보조국사수심결 (普照國師修心訣)’이라고도 한다.


수심결은 보조국사 지눌이 40세 이후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며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참선(參禪)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지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火宅比喩)를 인용하여 삼계(三界)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이처럼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부처를 이루는 일이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곧 참 부처이고 자신의 성품이 곧 참다운 법(法)임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만 찾으니,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은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론을 9문 9답을 통해 제시했다



위 표는 <수심결>의 9문 9답을 표로서 정리해 보았다.


서문에서는 달마대사의 <혈맥론>에서 시종일관 강조하였던, 불성(佛性)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과 본성이 진리임을 선언하고 있다.


제1 문답에서는, 왜 범부는 불성을 보지 못하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불성(佛性)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곧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했다.


제2 문답에서는 견성하면 신통변화가 있는가에 대해 물었고, 이에 신통력은 본질이 아니므로 그것이 목표가 되면 ‘삿된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일갈하고 있다. 망상이 사라지면 저절로 신통력이 생기지만,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현상이므로 크게 생각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또한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은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점차로 닦아나감)의 두 가지 문(二門)이 있음을 밝혔다.


제3 문답에서는 이미 깨달았는데(돈오) 왜 점진적 수행(점수)이 필요한가에 대해 물었고, 이에 스님은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돈오란 자기의 본성이 곧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시 이래로 훈습(熏習: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업력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된 망념(妄念)을 점차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제4~6 문답에서는 어떤 방편으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스님은 돈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며 만약 방편을 써서 깨닫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으니, 눈을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영지(靈知:신령스런 앎)도 이미 자신의 마음이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면 곧 견성(見性:자신의 불성을 보고 깨달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7~9 문답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닦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물었고, 이에 스님은 점수의 방법론에 대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로 설명했다. 정혜(定慧)에서 정은 곧 자성(自性:자기가 본래 갖춘 성품, 곧 佛性)의 본체이고 혜는 곧 자성의 작용이므로 체·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정·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점수의 방법론은 정과 혜를 동시에 골고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나뉜다. 자성정혜를 닦는 자는 돈오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無功之功)으로서 정과 혜를 아울러 부리고 스스로 자성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정혜를 닦는 자는 깨닫기 전의 낮은 근기의 공부로서 마음마다 의혹과 번뇌를 끊고 고요함만을 취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비록 돈오 후에 점수라고는 하나, 망념은 본래 공(空)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수심관(修心觀)을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체계화했고 이는 곧 한국불교의 선수행(禪修行)의 지침이 되었다.


이 <수심결>은 여러 사람이 번역해 놓은 것을 참조하였다.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은 고어 체로 된 것도 있고, 어느 것은 전통적인 불교 용어와 난해한 낱말을 사용하기도 하여 이해가 선뜻 되지 않은 측면도 있어 여기서는 원문을 해치지 않고, 되도록 현대인이 알기 쉽게 쉬운 문장으로 풀어 해설을 시도하였다. 원문은 박스 안에 담아 누구나 원문임을 알도록 하였고, 원문만 보아도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 해설은 박스 아래에 서술하였다. 소제목은 서문과 9개의 문답을 기준으로 하였다. 독자에 따라 해설이 성이 차지 않을 수 있다. 나의 모자란 식견 탓이므로 원문을 중심으로 통독해주길 바란다.


■ 수심결 서문


삼계의 고통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기나긴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부처를 찾는 것밖에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진심眞心, 참마음, 참나)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그 마음은 이 육신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태어남이 있고 죽기도 하지만, 이 참마음(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르기를 ‘사람이 죽어 온갖 뼈마디가 모두 무너지고 흩어지면, 불이나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라고 한 것이다.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삼계열뇌 유여화택 기인엄류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감수장고 욕면윤회 막약구불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약욕구불 불즉시심 심하원멱
不離身中 色身是假 有生有滅 불리신중 색신시가 유생유멸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百骸潰散 진심여공 부단불변 고운백해궤멸
歸火歸風 一物長靈 蓋天蓋地 귀화귀풍 일물장령 개천개지


부처가 밝혔듯, 우리의 삶은 ‘고해(苦海)’이다. 고통의 바다, 즉 우리는 윤회의 굴레에 빠져 있는 미혹한 중생이다. 수행자는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하려고 굳은 마음을 낸 사람이다. 삼계는 세 가지 세계를 말하는데, 욕계(욕망의 세계), 색계(미묘한 형상의 세계), 무색계(순수한 생각의 세계)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감각적 욕망으로 점철된 세계, 욕계에 살고 있다. 수행자는 먼저, 우리의 삶이 ‘고(苦)’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주어지는 수행 미션이다. 삶이 ‘고(苦)’임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아직 그는 덜 성숙한 존재라 말할 수 있다. 불교 용어로는 ‘하근기’의 사람이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 태평가를 부르면서 희희낙락 노닥거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수행도, 명상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철모르는 아이와 같다.


삼계의 고통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기나긴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부처를 찾는 것밖에 없다.


삼계의 고통이 마치 불타고 있는 집과 같음을 보아라! 지눌스님은 <수심결>의 맨 첫 문장에서 ‘고(苦)를 직시하고 고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본성(부처)을 찾아야 한다.’고 선언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첫 문장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책이 의미가 없어진다. 당신의 집이 불타고 있지 않으면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아직은 그대가 수행해야 할 때가 아닌 것이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진심眞心, 참마음, 참나)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그 마음은 이 육신을 떠나지 않는다.


부처는 곧 본성이다. 본성은 곧 부처이다. 그러하므로 멀리서, 밖에서 찾을 게 아니라 이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태어남이 있고 죽기도 하지만, 이 참마음(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르기를 ‘사람이 죽어 온갖 뼈마디가 모두 무너지고 흩어지면, 불이나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조건이 되어 만들어졌다. 육체는 조건이 다하게 되면 다시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돌아갈 것이다. 조건화된 몸은 모두 무상하여 늘 변하기 마련이다. 조건에 따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소멸한다. 몸은 이렇게 흩어져 사라지지만 한 물건(마음)은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한 물건’이 그것이다. 육체는 어떤 인연의 조건으로 생겨나고 소멸하지만, 육체 안에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참으로 슬프구나, 요즘 사람들은 미혹된 지가 오래되어, 자기의 본성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본성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를 구하려고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본성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알음알이에 단단히 집착하여 부처의 길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몸을 불로 태우고 팔을 불사르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뽑아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껴 쓰며,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참선만 하며, 하루에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서 대장경을 전부를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모두 닦는다 해도 이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단지 자신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를 찾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嗟夫今之人 迷來久矣 차부금지인 미래구의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불식자심시진불 불식자성시진법
欲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욕구법이원추제성 욕구불이불관기심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堅執此情 약언심외유불 성외유법 견집차정
欲求佛道者 縱經塵劫 燒身燃臂 욕구불도자 종경진겁 소신연비
敲骨出髓 刺血寫經 長坐不臥 고골출수 자혈사경 장좌불와
一食卯齋 乃至轉讀一大藏敎 일식묘재 내지전독일대장교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수종종고행 여증사작반
只益自勞爾 但識自心 恒沙法門 지익자로이 단식자심 항사법문
無量妙義 不求而得 무량묘의 불구이득


참 슬픈 일이다. 미혹한 중생은 마음의 고통을 여의고자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고 잠시의 고통을 잊기 위해 감각적 욕망을 부추기는 일에 몰입한다. 또는 무당이나 점집을 찾아다닌다. 유행 따라, 시류 따라 몰려다니고, 또는 각가지 기도를 하고, 사경을 하고, 절을 하고, 의식을 치룬다. 심지어 각종 해괴한 방법으로 진리를 찾고 있으니 수고스러움만 있을 뿐 진리를 찾지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서 해답을 찾으면 될 터인데, 미혹한 중생은 저잣거리를 헤매고만 있다. 이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모든 중생들을 두루 관찰해보니 모두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하시고, 또 이르시되 ‘모든 중생의 허망한 생각들이 다 원만한 깨달음의 신묘한 마음(참나)에서 생겨난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를 이룰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도 오직 이 마음(참나)을 밝히신 분들일 뿐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도 역시 이 마음(참나)을 닦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응당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진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본성은 깨끗하여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단지 허망한 인연을 떠나기만 하면 곧 항상 그대로인 부처인 것이다.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 고세존운 보과일체중생 구유여래
智慧德相 叉云一切衆生 種種幻化 지혜덕상 차운일체중생 종종환화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離 개생여래원각묘심 시지이
此心外 無佛可成 過去諸如來 차심외 무불가성 과거제여래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지시명심저인 현재제현성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역시수심저인 미래수학인
當依如是法 당의여시법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心性無染 원제수도지인 절막외구 심성무염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본자원성 단리망연 즉여여불


세존께서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해보니 모든 중생의 허망한 생각들이 다 신묘한 마음(참나)에서 생겨난다’라고 하셨다.


무상정등각을 성취한 붓다가 모든 중생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마음에 깨달음의 자리가 있음에도 온갖 번뇌에 묻혀서 신묘한 마음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수천, 수만 가지 수행이 있어도 마음을 닦아야 곧 부처를 발견하게 된다. 그 마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 안에 있으니 찾고자 하면 고요한 곳에 좌정하여 앉아 그 마음을 관하여야 한다. 명상을 통해 본성을 찾아라.



■ 제1 문답 –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왜 보지 못하나요


(질문)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면, 이미 이 몸 안에 있어서 범부를 떠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는 지금 여기서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설명하시어 투철히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문약불성(問若佛性), 현재차신(現在此身), 기재신중(旣在身中), 불리범부(不離凡夫), 인하아금(因何我今), 불견불성(不見佛性), 갱위소석(更爲消釋), 실령개오(悉令開悟)

(대답)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가운데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는 것을 알고, 춥다, 덥다는 것을 알고, 혹 화내고 있다거나, 기뻐할 줄 아는데 이것을 아는 자는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 듣고,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알아차리는 것이 반드시 그대의 불성이니라.

답재여신중(答在汝身中), 여자불견(汝自不見), 여어십이시중(汝於十二時中), 지기지갈(知飢知渴), 지한지열(知寒知熱), 혹진혹희(或嗔或喜), 경시하물(竟是何物), 차색신(且色身), 시지수화풍(是地水火風), 사연소집(四緣所集), 기질완이무정(其質頑而無情), 기능견문각지(豈能見聞覺知), 능견문각지자(能見聞覺知者), 필시여불성(必是汝佛性)


제자가 질문한다. 스승께서는 누구나 불성(본성)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일반 사람들은 불성을 볼 수 없는가요. 그러자 스승이 답한다. 본성은 반드시 있는데 그대가 보지 못할 뿐이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춥다, 덥다, 화낸다, 기뻐한다. 그것이 곧 그대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임제(臨濟, ?~867) 스님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은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하고 단지 그대 눈앞에 밝음이 또렷한 형상이 없는 그것(참나)이야말로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옛 성인들이 도를 깨친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고임제운(故臨濟云), 사대불해설법청법(四大不解說法聽法), 허공불해설법청법(虛空不解說法聽法), 지여목전(只汝目前), 역역고명(歷歷孤明), 물형단자(勿形段者), 시해설법청법(始解說法聽法), 소위물형단자(所爲勿形段者), 시제불지법인(是諸佛之法印), 역시여본래심야(亦是汝本來心也), 즉불성(則佛性), 현재여신(現在汝身), 하가외구(何假外求), 여약불신(汝若不信), 약거고성(略擧古聖), 입도인연(入道因緣), 영여제의(令汝除疑), 여수체신(汝須諦信)


육신이라는 것은 4대(지수화풍)로 이루어져 있다. 언뜻 보면 입이 말하고, 코가 맡으며,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질을 이루는 4가지 원소들, 지수화풍의 무더기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없다. 물질을 아무리 많이 모아놓거나 이리저리 합성하여도 알아차리는 재주가 없다. 따라서 4대의 조건으로 이루어진 육신은 말하지 못하고, 맡지 못하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오직 본성만이 알아차릴 수 있으며, 말하고, 맡고, 보고, 들을 수 있다.

사람과 거의 똑같은 형태의 인공지능 로봇을 생각해보자. 로봇에도 눈, 코, 귀, 입, 팔다리가 있을 것이다. 로봇의 다섯 기관은 겉에 나타난 표면에 불과하고 그것을 판단하고, 명령하고, 알아채는 것은 중앙처리장치라는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 눈, 코, 귀, 입은 그냥 중앙처리장치에 딸린 부속품에 불과하다. 눈, 코, 귀, 입, 팔다리가 로봇의 주인이 될 수 없다. CPU에서 칩을 빼내면 로봇은 시체와 같다.


옛날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婆羅提) 존자에게 물었다.
[이견왕]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존자] “견성(見性)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이견왕] “스님은 견성을 했습니까”
[존자] “나는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이견왕] “그 불성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견왕] “어떻게 작용하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 “지금도 나타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왕께서 스스로 보시지 못할 뿐입니다.”

[이견왕]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존자]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왕께서는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이견왕]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 “나타날 때는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이견왕] “그 나타나는 여덟 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주십시오.”
[존자] “태(胎)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봄’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들음’이라 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 맡음’이라 하고, 혀에 있을 땐 ‘말함’이라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음’이라고 하며, 발에 있으면 ‘분주히 걸음’이라고 합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이라고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영혼(情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리었다.

석이견왕(昔異見王), 문바라제존자(問婆羅提尊者), 왕왈(王曰) 하자시불(何者是佛), 존자왈(尊者曰), 견성시불(見性是佛), 왕왈(王曰), 사견성부(師見性否), 존자왈(尊者曰), 아견불성(我見佛性), 왕왈(王曰) 성재하처(性在何處), 존자왈(尊者曰), 성재작용(性在作用)

왕왈(王曰), 시하작용(是何作用), 아금불견(我今不見), 존자왈(尊者曰), 금현작용(今現作用), 왕자불견(王自不見), 왕왈(王曰), 어아유부(於我有否), 존자왈(尊者曰), 왕약작용(王若作用), 무유불시(無有不是), 왕약불용(王若不用), 체역난견(體亦難見)

왕왈약당용시(王曰若當用時), 기처출현(幾處出現), 존자왈(尊者曰), 약출현시(若出現時), 당유기팔(當有其八), 왕왈기팔출현(王曰其八出現), 당위아설(當爲我說), 존자왈(尊者曰), 재태왈신(在胎曰身), 처세왈인(處世曰人), 재안왈견(在眼曰見), 재이왈문(在耳曰聞), 재비변향(在鼻辨香), 재설담론(在舌談論), 재수집착(在手執捉), 재족운분(在足運奔), 현구해사계(現俱該沙界), 수섭재일미진(收攝在一微塵), 식자지시불성(識者知是佛性), 불식자환작정혼(不識者喚作精魂), 왕문심즉개오(王聞心卽開悟)


이견왕은 달마대사의 조카이다. 달마대사는 원래 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견왕은 왕의 첫째아들의 아들이다. 즉 달마대사의 큰형의 아들이다. 이견왕은 달마대사가 삼촌임에도 불교를 한때 탄압하였다. 그러자 달마대사의 제자 바라제 존자라는 분이 가서 설득하게 된다. 위의 문답이 그 내용이다. 이견왕의 물음도 핵심적이고 존자의 대답 또한 진리를 통찰하고 있다.


‣ 무엇이 부처입니까?

-견성하는 것, 즉 본성을 보는 것이 부처입니다.

‣ 스님은 부처를 보았습니까?

- 나는 부처(불성)를 보았습니다.

‣ 그 불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 어떻게 작용하길래 나는 보지 못합니까?

-항상 작용하고 있는데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왕께서는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 그렇다면 작용할 때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나타날 때에는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 그 나타나는 여덟 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주시오

- ① 태 안에 있을 때 ‘몸’ ② 세상에 나오면 ‘사람’ ③ 눈에 있으면 ‘봄’ ④ 귀에 있으면 ‘들음’ ⑤ 코에 있으면 ‘냄새 맡음’ ⑥ 혀에 있을 때는 ‘말함’ ⑦ 손에 있으면 ‘붙잡음’ ⑧ 발에 있으면 ‘분주히 걸음’ 이것이 여덟 군데입니다. 작용을 나타내면 온 세계를 감쌀 정도로 나타낼 수 있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거두어들이는 이것을 불성이라 하지만 모르는 자들은 ‘영혼’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작용’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작용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현상이나 행동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화에서 작용은 사람의 행주좌와 일거수일투족 행위를 알아차리는 ‘참 마음’을 의미한다. '참 마음'은 온 우주의 본체이자 뿌리이면서 동시에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작용이 본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본체도 작용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명상은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한다. 무의식적인 삶이 아니라 늘 성성하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한다. 그래서 명상을 이루는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사띠(sati)’이다. 그 뜻은 ‘알아차림’, ‘마음 챙김’이다. 모든 존재는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어 알아차릴 수 있다.


범부는 감각에 의존한다. 다섯 감각에 따른 느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즐거운 느낌에 욕망하고, 괴로운 느낌에 악의를 가진다. 그러나 명상하는 자는 느낌을 먼저 알아채고, 행위 하나하나를 알아채어 깨어있게 한다. 걸을 때, 밥 먹을 때, 말할 때, 일 할 때에, 호흡할 때 모두 깨어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깨어있다.


깨어있으면 알게 된다. 깨어있게 하는 자가 곧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원효대사는 그것을 마음이라 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불성이라 하기도 하고 다른 여러 이름으로도 불린다. ‘참나, 진아, 참 마음, 한 마음, 제3의 눈, 순수의식, 진여, 한 물건…’ 등으로 불린다.


범부는 위의 여덟 가지 형태 또는 행위를 함에 있어 각기 이름을 달리 붙여 마치 다른 별개의 것이 각자의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본다. 그러나 수행자는 알아차린다. 태안에 있는 몸이나 태 밖에 있는 몸이나 형상만 달리할 뿐 다르지 않다는 것을. 눈, 귀, 코, 혀, 손, 발에 각각의 행위가 다르지만, 그 행위를 지켜보는 하나의 눈(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만 그것을 범부는 인식하지 못하고, 수행자는 알아차리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그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왜 중요한 차이인가? 주인으로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 화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 화상이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화상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의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우승(又僧), 문귀종화상(問歸宗和尙), 여하시불(如何是佛), 종운(宗云), 아금향여도(我今向汝道), 공여불신(恐汝不信), 승운(僧云), 화상계언(和尙誡言), 언감불신(焉敢不信), 사운(師云), 즉여시(卽汝是)


경(금강경)에서 이르길, 범부들은 ‘중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생상’은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여 스스로 닦음을 포기하는 견해를 말한다. 중생상은 또한 사람들이 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죄의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미약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닦아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거대한 신적인 존재를 찾고 그것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가 신이 아니건만 돌부처, 금부처를 모셔놓고 온갖 공양물을 올리고 의식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임을 귀종 화상의 일화를 통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스님이 말했다.
“어떻게 보임(保任:깨달은 경지를 잘 보호하며 닦아가는 것)해야 합니까?
귀종 화상이 답하시길,
“‘하나의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허공의 꽃(空花: 눈병이 생기면 때로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무늬 같은 헛것이 보인다)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묻던 그 스님은 이 말에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옛 성현이 도에 들어간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공안(公案:즉 공부의 규범이 되는 것)에 의지해서 믿음과 이해가 있게 되면 옛 성현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승운(僧云), 여하보임(如何保任), 사운(師云), 일예재안(一穢在眼), 공화난추(空花亂墜), 기승(其僧), 언하유성(言下有省)
상래소거고성(上來所擧古聖), 입도인연(入道因緣), 명백간이(明白簡易), 불방성역(不妨省力), 인차공안(因此公案), 약유신해처(若有信解處), 즉여고성(卽與古聖), 파수공행(把手共行)


보임(保任)!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음 자체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깨달음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돈오'가 애를 낳은 것이라면, '점수' 즉 '보임'은 애를 잘 길러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양육하는 것이다. 제자가 어떻게 ‘보임’해야 하는지 물었다. 귀종 화상의 답은 지속적인 수행(점수)을 말하고 있다. 제아무리 깨끗한 눈이라도 티끌 하나만 들어가도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깨끗한 방이라도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끼게 마련이다. 그러하므로 보임을 지켜내기 위해서 매일 매일 마음을 닦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수심결>이 ‘마음을 닦는 요결’이므로 돈오와 더불어 점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임을 표출하고 있다.



■ 제2 문답 – 견성을 했는데, 왜 신통변화가 없는 것인가요


(질문) ‘스님은 성품을 보았다(견성)고 하시는데, 성품을 보았다면 즉시 성인이 되어 신통 변화를 나타내서 보통 사람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요즈음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까?

문여언견성(問汝言見性), 약진견성(若眞見性), 즉시성인(卽是聖人), 응현신통변화(應現神通變化), 여인유수(與人有殊), 하고금시수심지배(何故今時修心之輩), 무유일인(無有一人), 발현신통변화야(發現神通變化耶)


(답) ‘그대는 미친 소리를 함부로 하지 말라.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그 마음은 뒤로 빠질 궁리만 해서 도리어 성인에 이르는 것은 내 분수에 없다(無分之失: 중생으로서는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없다는 착각)는 착각에 빠지고 마니, 모두 그대가 의심하는 자리에서 막혀있다.
도를 공부하면서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선후先後)을 모르고, 진리를 말하면서 본질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본말本末)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이를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이는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답여불득경발광언(答汝不得輕發狂言), 불분사정(不分邪正), 시위미도지인(是爲迷倒之人)
금시학도지인(今是學道之人), 구담진리(口談眞理), 심생퇴굴(心生退屈), 반타무분지실자(返墮無分之失者), 개여소의(皆汝所疑)
학도이불지선후(學道而不知先後), 설리이불분본말(說理而不分本末者)자, 시명사견(是名邪見), 불명수학(不名修學)
비유자오(非唯自誤), 겸역오타(兼亦誤他), 기가불신여(其可不愼歟)


‘견성이라 하면 성품을 본 것이고,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초월적인 능력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의 물음에 스님은 다소 거친 말로 제자에게 호통친다. 도에는 사도와 정도가 있다. 정도를 가고자 하는 자가 왜 삿된 마음을 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가 되묻고 있다. 도를 구하는 자는 그 과정에 있어 선후가 있고, 추구함에 있어 본말이 있는 것이다. 걷지도 못하면서 뛸 생각부터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먼저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고, 나중에 할 일을 먼저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근본 도리를 먼저 깨닫도록 해야지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것을 우선한다면 잘되어봐야 잔 재주꾼이다. 설령 어쩌다 자그마한 신통을 얻었다 한들 이를 이용해 재주를 부리는 것은 자신도 망치고 남도 망치는 일이니 절대로 삼가야 한다.


또한 경에서 이르기를, 견성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크게 보면 수타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이렇게 4단계의 도과가 있다. 마치 에베레스트를 올라감에 있어 단번에 올라갈 수 없듯이 중간중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있는 것이다. 돈오는 어쩌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길을 정확히 알고 그 길목을 진입한 것과 같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수행자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돈오 했다고, 즉 성품을 보았다고 단박에 부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돈오에도 단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갈수록 전생의 인연에 따라 이런저런 신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대개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 말하면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 점진적으로 닦아감)라는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돈수(頓修)는 최상의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수많은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으면서 차츰 익혀왔기에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듣자마자 즉시 깨달아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하지만 사실 이것(돈오돈수) 또한 먼저 깨닫고 난 뒤에 닦은 근기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들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갔고, 그 닦은 바에 따라 경지를 증득하였다.
그대가 말한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가는 중에 점진적으로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았다고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부입도다문(夫入道多門), 이요언지(以要言之), 불출돈오점수양문이(不出頓悟漸修兩門耳)
수왈돈오돈수(雖曰頓悟頓修), 시최상근기득입야(是最上根機得入也), 약추과거(若推過去), 이시다생(已是多生), 의오이수(依悟而修), 점훈이래(漸熏而來), 지어금생(至於今生), 문즉발오(聞卽發悟), 일시돈필(一時頓畢), 이실이론(以實而論), 시역선오후수지기야(是亦先悟後修之機也)

즉이차(則而此), 돈점양문(敦漸兩門), 시천성궤철야(是千聖軌轍也), 즉종상제성(則從上諸聖), 막불선오후수(莫不先悟後修), 인수내증(因修乃證), 소언신통변화(所言神通變化), 의오이수(依悟而修), 점훈소현(漸熏所現), 비위오시(非謂悟時), 즉발현야(卽發現也)


이제부터 수심결의 본론에 들어가는 내용이다. 구도자 앞에는 2개의 큰 문이 있다. 그것은 ‘돈오문’과 ‘점수문’이다. 그런데 이 2개의 문에는 반드시 선후가 있다. 먼저 돈오(단박에 깨달음)문을 통과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깊은 명상으로 본성을 보았다면 그는 돈오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런 다음 매 순간 점수(점진적으로 닦아감)로써 닦아나가야 한다. 돈오라는 것은 자신의 본성(불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보지 않고 아무리 점수로써 도과를 얻으려 한들 수행에 큰 이득이 없다. 과거 모든 성인들이 먼저 돈오 한 다음, 점수로써 보임하면서 닦아나갔다. 간혹 수많은 생애에 걸쳐 수행을 해왔던 최상근기의 사람은 돈오하면서 돈수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돈오돈수’라 한다. 이는 한꺼번에 깨달음을 가지고 또 한꺼번에 일생의 모든 수행을 마친 자이다.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므로 <수심결>에서는 돈오와 점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의 방편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본성을 본 다음, 점수로써 그 깨달음을 유지하고 살면서 먼지처럼 달라붙는 번뇌 망상을 계속 닦아나가는 것이다.


경(능엄경)에 이르기를 “진리(理)는 단박에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닫자마자 진리를 가리는 장애가 사라지지만, 그릇된 습기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차례대로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규봉(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9세기 당나라 승려. 교종과 선종을 모두 공부하여,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말자는 교선일치를 주장)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는 뜻을 분명히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 있는 연못이 온전히 물인 줄 알더라도 햇빛을 빌려야 실제로 녹여서 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범부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진리(법)의 힘을 빌려서 익히고 닦아야만 실제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흐르고 적실 수 있어야 그 물에 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과 광명한 작용이 나타난다.” 하였다.

여경운(如經云), 이즉돈오(理卽頓悟), 승오병소(乘悟倂消), 사비돈제(事非頓除), 인차제진(因次第盡)
고규봉(故圭峰), 심명선오후수지의왈(深明先悟後修之義曰), 식빙지이전수(識氷池而全水), 차양기이용소(借陽氣以鎔消), 오범부이즉불(悟凡夫而卽佛), 자법력이훈수(資法力以薰修), 빙소즉수류윤(氷消卽水流潤), 방정개척지공(方呈漑滌之功), 망진즉심영통(妄盡則心靈通), 응현통광지용(應現通光之用)


“진리(理)는 단박에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닫자마자 진리를 가리는 장애가 사라지지만, 그릇된 습기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차례대로 없어진다.


스님은 능엄경에 나온 말을 빌어 점수의 필요성을 이어간다. 진리는 단박에 깨달아 알 수 있다. 본성을 본 순간 수많은 장애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왜 아니겠는가? 내 몸이, 내 생각이, 내 감정들이 한치의 의심없이 모두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본성을 마주하는 순간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인지하게 된다. 이러니 가짜(거짓 자아)가 진짜 행세하게 된 지난날의 모든 행위가 뒤바뀌어 스스로 경천동지하게 되는 것이다. 몸, 감정, 생각 등의 거짓 자아들은 본성(참 자아) 앞에 엎드려 조복하게 된다.

그러나 가짜 자아로부터 조복 받았을지라도 오랫동안 그릇되고 습관화된 습기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계에 따라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이다.


막 돈오한 수행자는 얼어 있는 연못이 물인 줄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그 물을 실제로 녹여서 활용하려면 햇빛을 빌려야 비로소 얼음을 녹일 수 있다. 얼음을 발견한 것이 돈오요, 그 얼음에 햇볕을 비추는 것이 점수이다.


원(元)나라의 고승 몽산 스님의 <몽산법어>에 이런 말이 있다.

'만약 옛날 행동하는 버릇을 고치는 데 미진함이 있다면 곧 범상한 무리로 떨어질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한 쌍이듯이 돈오와 점수는 한 쌍으로 수행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통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익히고 닦아야만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사실상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보면 오히려 요사하고 괴이한 일이고, 또한 성인에게도 말단의 일이라서 비록 신통력이 나타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그 즉시 끝없는 신묘한 작용이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른바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先後)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본질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本末)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불도(佛道)를 구하려 한다면 마치 네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끼우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方便,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절망적인 생각을 하여 스스로 포기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알’을 끊어버리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깨달음까지도 믿지 않고, 이해하고 깨달은 바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신통력이 없는 이를 보고 곧장 무시하려고 든다.
이것은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시지사상신통변화(是知事上神通變化), 비일일지능성(非一日之能成), 내점훈이발현야(乃漸熏而發現也), 황사상신통(況事上神通), 어달인분상(於達人分上), 유위요괴지사(猶爲妖怪之事), 역시성말변사(亦是聖末邊事), 수혹현지(雖或現之), 불가요용(不可要用)
금시미치배(今時迷癡輩), 망위일념오시(妄謂一念悟時), 즉수현무량묘용신통변화(卽隨現無量妙用神通變化)
약작시해(若作是解), 소위부지선후(所謂不知先後), 역불분본말야(亦不分本末也), 기불지선후본말(旣不知先後本末), 욕구불도(欲求佛道), 여장방목(如將方木), 두원공야(逗圓孔也), 기비대착(豈非大錯)
기불지방편고(旣不知方便故), 작현애지상(作懸崖之想), 자생퇴굴(自生退屈), 단불종성자(斷佛種性者), 불위불다의(不爲不多矣)
기자미명(旣自未明), 역미신타인(亦未信他人), 유해오처(有解悟處), 견무신통자(見無神通者), 내생경만(乃生輕慢), 기현광성(欺賢誑聖), 양가비재(良可悲哉)


돈오하고 점수하는 수행자에게서는 수행의 부산물로 얻을 수 있는 여섯 가지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육신통이라 하는데, ①천안통(天眼通), ②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盡通) 이렇게 여섯 가지 신통력이다.

천안통은 자기와 남의 미래세에 관한 일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고, 천이통은 보통 들을 수 없는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동물과 귀신의 말까지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타심통은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그 유명한 궁예의 미륵관심법이 바로 타심통이다. 숙명통은 자기와 타인의 전생과 과거를 알 수 있다. 신족통은 몸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생각하는 장소로 나타나고 날아갈 수 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존재감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다. 누진통은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누진통을 얻어야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이 경지를 얻어 모든 번뇌와 오욕을 끊어냈다.



..........《마음을 닦는 비결(修心訣)》 해설-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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