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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Nov 20. 2021

Still-Life

1.

앙상한 겨울 나무에서 붉은 열매 톡 떨어졌다. 나는 그 터진 열매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이윽고 검은 개미 행렬이 점점이 이어져 조각난 과육을 모두 옮겨 씨앗의 속살이 보일 때까지. 


나는 인프피. 우리 종족은 독립적으로 뭉쳐 지낸다. 당신은 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눈을 보라. 넓다란 눈썹 아래 늘어진 구름처럼 눈을 꿈뻑꿈뻑 여닫는다면—퇴적된 눈동자는 암갈색인가—인프피, 우리와 같은 종족이다. 엉덩이 무거운 철학자, 나무 심는 플로리스트, 경기가 끝나고 돌아와 정성스레 고운 천으로 수석을 닦는 스모 선수. 모두 같은 결을 가졌다.


2.

네모난 생각이 혀와 입천장 사이를 긁으며 생동하듯 뜨겁게 움직인다. 나의 생각은 동그란데 네모의 형상을 띈 경우는 대게 아쉬운 경우다. 


작년 끝끝내 마무리 짓지 못한 소설 속 남자가 그려진다. 그의 모습은 나의 모습과 다름없다. 꿈처럼 15일 이내의 염원 따위겠지만, 오늘은 네모난 생각이 생동한 날이니 흘려보낼 수 없다. 정물로 담자. 종이와 펜을 꺼내 슥슥 대충 무언가 끄적인다. 이러한 마음은 항상 불같이 빠르게 타오르고 꺼지기에. 결국 나는 집중을 뺏겨 오늘 할 일을 몇 개 빼먹고 만다.


3.

긴 남자 머리에는 흰 새치가 듬성듬성 보였다. 나름 암울해보여도 나름 봐줄만하다. 채도 낮은 벽면 향해 남자는 굼뜨지만 강단있는 걸음 몇 디뎠는데 포트에 물이 끓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따땃한 잔 대충 쥐고 작업실로 향했다. 3년 전 가정 분양 받은 강아지가 거창한 일 해내는듯 비장한 표정으로 당신을 따른다.


층고 넓은 그곳에는 크고 작은 책장이 하나씩 나무뿌리처럼 박혀있다.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월넛 책장 곳곳마다 무언가 빼곡히 꽂혀 있었고 정중앙 선반 위 여러 도록들 놓여져 탐났다. 바로 옆 돋아난 작은 책장에는 남자의 흰 머리처럼, 제각기 다른 판형의 책들 제멋대로 갈겨 놓여 있었는데, 왠지 그를 닮은, 그가 쓴 책처럼 보였다. 맞은편 벽면으로 온갖 전시 포스터들 빼곡하다. 하단 작은 글씨 designed by 긴 남자, 를 보니 나름 자존감 높은 인간인듯 한데 당신 작업실이니 봐주도록 하자.


어수선한듯 채워진 작업실에 무너지듯 앉는다. 오전부터 그는 글을 쓴다. 오랜 루틴이다. 하지만 언제나 신문물 대하듯 타자를 쳐댄다. 몇 자 쓰지도 않고 머리털 쥐어 뜯는가하면 갑자기 노해 책상을 ‘탕탕’ 내려치는, 나잇밥 허투루 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기어이 두 시간은 버텨낸다. 새하얀 책상 위 연한 수증기 내올리던 잔이 차게 식었다. 격한 연주 후 뽑아낸 기록은 언젠가 작은 책장 위 한 부분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것 위한 전쟁을, 이른 아침부터 치른듯 하다.


오전부터 꺼져있는 아이폰. 정오 되어서야 무심한 시선으로 전원 킨다. 빛이 돌자, 긴 남자가 애정하는 사람들의 소소한 연락이 그에게 닿으려 비집고 쌓인다. 몇몇은 장문의 글 마치 일상인 양 갈겨 보냈는데 대부분 긴 남자와 안지 오래된 사람뿐이다. 개중에는 단번에 그의 암갈색 눈 속 환한 심지 태워버린 텍스트도 있었다. 이를테면 긴 남자를 대번에 작업실로 데려가 프린터기 돌리게 만든 문구다. 일정한 속도로 개미가 박힌듯 검정 글씨 빼곡한 시나리오 스크립트가 귀 간지러운 규칙적인 프린터기 소음과 함께 쏟아진다. 그새를 못참은 남자가 침침한 눈 비비며 안경 찾아 핸드폰 속 작은 텍스트 인상 써가며 읽는다. 긴 남자 옆, 그러니까 씩씩거리며 검정 활자 토해내는 프린터기 올려진 책상과 닿아있는 벽면으로 커다랗게 아크릴 회화 걸려있다. 그림의 색채 역시 당신을 대변한다.


15시, 햇빛이 적지도 강하지도 않은 시간. 누군가 현관문에 익숙한 패턴 찍고 들어왔다. 아침 일찍 제 일 치르고 온 남자의 연인이다. 수수한 그녀의 손에 세피아 톤 바게뜨 빵, 델베르데 스파게티면, 진녹색 대파 따위의 길다란 식재료가 들려있다. 남자와 여자는 익숙하게 포옹한다. 공간은 서로의 안온한 향으로 결합된다. 누구보다 먼저 여자를 알아본 강아지가 달려와 품에 폭 안긴다. 여자는 아이를 안아주고, 남자는 그런 둘 모습 눈에 담으며 재료를 정리한다. 간단한 작업 구상이 끝나면 둘은 밖으로 나가 산책할 것이다. 각자가 품에 안은 고민 웅숭깊게 내놓으면서, 서로에게 서로만이 도움 줄 수 있는 적절한 이야기들로 공간 메울 것이다. 품 안의 강아지는 익숙한 시간대 다가옴 느꼈는지 행복하게 더운 콧김 뿜는다.


3.

Still-Life [정물화]

정의 : 정지된 물체 배치하여 구도를 잡아 그리는 그림.


4.

작가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1882년 1월 25일-1941년 3월 28일)는 남편 레너드와 함께 호가스 프레스 Hogarth Press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직접 손으로 식자를 하고 제본한 책을 출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출판사가 존재했다. 1921년에 출판한 <월요일 또는 화요일 Monday or Tuesday> 단편집과 같은 울프의 소설 초기 판본 대부분에는 그녀의 언니 바네사 벨 Vanessa Bell(1897년 5월 30일-1961년 4월 7일)이 그린 목판화 삽화가 들어가 있다. 오늘날 호가스 프레스는 크라운 출판 그룹 Crown Publishing Group에 속하며 랜덤 하우스 Random House Inc.의 자회사이다.


Virginia Woolf, Monday or Tuesday, The Hogarth Press:London 1921.

[버나드 셀라, 레오 핀다이센, 아그네스 블라하, NO-ISBN/ 독립 출판에 대하여, Salon für Kunstbuch, ENKR, 2021] - p.141 부분 발췌


5.

1+0=2


뜬 눈으로 밤의 절반 보내야만 얻을 수 있는 것과

예약한 연습실 시간 20퍼센트 남겨서야 비로소 느끼는 것은 같다


서울 시내 곳곳의 지하 스튜디오

정성스레 다림질한 옷 고이 접어 담은 캐리어 끌고 방문하는 자와

경기를 넘어 강원도까지

허연 차 몰고 촬영지 향하는 자의 마음가짐은 같다


홀로 선 몸에 암만 빵 구겨 넣어도 채워지지 않다지만

채워지지 않아도 채워진 것으로 마침내 1은 2가 된다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 말한다


언젠가 1은 2가 될거라 믿어버린 사람들이 여기 있다

우리는 신념에 거창한 단어 붙이지 않는다


묵묵히 또 꾹꾹 누른 마음 가벼이 지고

오늘도 내일도 내일의 내일도

커다란 항아리에 영을 쌓는다

그렇게 2가 되리라, 언젠가 3이 되리라


어릴 때 그들을 막연히 바라본 나와

굵어진 머리 달고 같은 쪽 선 나의 감상은 다르다

1은 확실히 2가 된다

꽉 막힌 목구멍새로 작은 바람 들자 0.1

좌절하던 시간이 굳어져 0.2 된다


사람들은 그걸 기적의 셈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어느날 어떤 이는 2가 된다


6.

모란디 Giorgio Morandi 도록을 득템했다. 자그마치 아마존 판매가 10분의 1도 못 미치는 헐값에, 하여 한동안 도록 속 그림 모작하며 시간 보냈는데 페이지 넘길수록 감탄이 석류알 터지듯 쏟아짐에 주체할 수 없다.


여러 소재에 관심 생기고 욕심 나는 건 평생 동반 될 것 같다만 그는 정물에 헌신했다. 단조롭고 평평한 일상. 생애 또한 주변시와 비슷하게 흘러가셨다는데 그림을 보면 '아..

절로 고개 끄덕여진다. 그림은 당신 무의식 투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비슷한 사람 만나고 그 안에만 연녹색 싹 심는다

가까운 친구 세상 돌고 오면

우리는 서로의 안경 벗겨 흐릿한 뺨을 맞댄다


여전히 달팽이 꼴로 빙빙 도는 내가 있다

라섹 했음에도 시력 떨어지는 데 이유가 있다

이유와 연녹색 싹은 오랜 친구다

마주선 모양으로 둘은 작게 묶여 있다

오늘 그것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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