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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Feb 07. 2022

영화를 찍으라고요?

1.

독백 하나를 준비하는 건 그림 작품 하나 완성짓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의 경우 늘 독백이 심각하게 어려워 마음 쏟아 연습하기 여간 쉬운 일 아니다. 원인은 암기. 그림과 연기의 차이점이다. 문과 성골 출신에 글을 사랑하지만 글자 암기란 늘 다른 세상 얘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사 암기는 기본 중에 기본이며. 같은 계열로는 스케치를 위한 연필깎이, 다도를 위한 물 끓이기가 있다. 오디션 지정대사라도 주어지면 며칠 혹은 절망적인 몇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 배우 일 한다며 인생 건 사람치고 본전도 못 건질 발언이지만 분명 걱정거리다.


최근 작법서를 닥치는대로 읽었다. 계기는 친한 형의 제작 지원 약속.


“제작비는 걱정하지 마. 옛날 우리 그랬던 것처럼, 같이 재밌게 촬영한다고 생각해줘. 그럼 된거야.”


너무 고마우면 입술이 굳는다. 그래서 도무지 고맙다 한 마디를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 보다 글로 표현하는게 편한 저주를 받아 나는 오늘도 침묵했다.


“배우로 너가 나와야지 동윤아 네 영환데. 그렇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


제목은 알파카 목장으로 바뀔 것 같다


작법서 파야 할 이유 두 가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그 영화를 잘 만들고 싶다. 첫 연출의 무게에 겁이나 배우를 양보하려 했다. 하나라도 잘해야지 병이 도졌기 때문, 하지만 애초에 가정은 성립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연기도 모자라고 더욱이 연출은 처음이기에 어차피 둘 다 잘 해내기 어렵다. 결과에 책임은 오롯이 내일의 내가 지겠지만 약한 소리 하기에는, 그럼에도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2년 전부터 품어온 상상처럼 내 영화에 내가 출연하기로 했다. 또한 영화는 모두가 힘 모아 만드는 작업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 다 껴안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함께 해내려는 생각이다. 이런 민폐가 또 있을까. 그래서 각본에 힘 쏟는 중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일이 아닌 작품이 좋아서 모이길 바란다. 준비물은 태생부터 추상화인 성질 가다듬어 태어난 명확한 의도 가진 시나리오. 시작 전엔 두려움만 가득했는데 막상 초고를 내놓고 나니 세상 안이쁠 수 없다. 8고까지 아무쪼록, 재밌게 덤비려는 마음이다.


2.

독백 루틴.

1 문학적인 리딩

2 자유연상 글쓰기

3 분석

4 암기

5 무한 시행착오

6 영상 촬영 및 셀프 피드백

7 레슨 때 시연

8 후회와 반성

9 새로운 독백 찾기


3.

그래서 늘 독백은 내게 난제였다. 독백 자체에 재미를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 소모적이라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불씨에 기름을 얹어준 건 <유퀴즈>에 나온 박정민 배우의 인터뷰다.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남의 독백을 연습해서 뭐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현업 연기 선배의 말에 나는 책상을 때렸다. 물론 지금에서야, 그는 박정민이고 나는 여동윤인데 자중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마는, 어쨌던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다.


독백 분석에서 잉태한 캐릭터는 온전히 나만의 창작물이다. 자유연상 글쓰기를 끝내고 소모적인 글뭉치로 태어난 아이들. 글감. 나는 그 아이들을 아프게 기억한다. 대부분의 독백이 그러하듯 상처있고 모난 사람들이다. 이름까지 붙여준 아이들이, 대사 한 마디만 뱉어도 아려오는 그 아이들 모아 하나 둘 플롯을 쌓으면. 캐릭터와 이야기가 된다. 그러한 생각의 변화 뒤에 독백이 재밌어졌다 따위의 드라마틱한 결말은 없다. 여전히 나는 독백을 앓는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조금은 영리하게,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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