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의 수확’에서 대실 해밋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그의 머리는 물렁해진다. 블러드 심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뇌는 옥수수죽처럼 되어버린다. 갑자기 금발의 천사, 그러니까 당신이 방금 땅에 묻은 사내의 아내는 이상한 전화를 받기 시작한다.
p.35
2.
영화는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네 가지 이야기를 한데 엮으며 여러 관점을 함께 보여주는데, 서로가 서로를 모순에 빠트리고,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저예산 스릴러 영화 중에 이렇게 내러티브가 풍부한 작품은 근래에 만나보기 힘들었다. 비록 때때로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자의식이 가득한 화려한 ‘예술적’ 장식들로 영화를 굼뜨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코언 형제는 소박한 스릴을 끊임없이 제공하며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도 만들면서 만회를 한다.
p.39
3.
블러드 심플이 신선하고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관객들에게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고자 하는 코언 형제의 욕망과 대중적 수완 덕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읽힐 때 가장 효과적이다.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창조해낸 누추한 텍사스 풍경의 기묘한 디테일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들의 유머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유쾌하고, 절제된 모습을 띤다. 그들의 캐릭터는 무뚝뚝한 지방 사투리를 내뱉는데, 제대로 된 방언이긴 하지만 살짝 비틀어져 있다.
P.40
4.
만일 누군가 영화를 만드는데, 그 영화가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면, 저는 대체 그 사람들이 뭐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해를 할 수 없어요, 제겐 논리에 맞지 않아요. 레이먼드 챈들러가 한 말이 뭐였죠? “모든 훌륭한 예술은 엔터테인먼트다. 누군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젠체하는 사람이거나, 삶의 기술에 있어서 미숙아다.”
p.49
5.
처음엔 유사 다큐멘터리처럼 시작을 하고, 이제 점차적으로 차가운 유머와 함께 모든 게 뒤틀리고, 부조리해지기 시작한다.
그건 부분적으론 스토리 자체의 본성에서 기인한 거예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숏이 하나 있는데, 캐릭터들이 자제력을 잃어감에 따라, 그 숏은 영화 후반에 변형되어서 다시 나오죠.
p.157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6.
우린 스토리를 좋아하는 거죠. 영화는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우린 우리에게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재주가 있다는 걸 발견했고, 실제로 그걸 실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p.329
*
위안된다.
“우린 스토리를 좋아하는 거죠.
영화는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우린 우리에게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재주가 있다는 걸 발견했고,
실제로 그걸 실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조엘 코엔이었나. 누가 했던 발언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책 덮고 든 생각은 다만 에단 코엔의 단편집을 읽고 싶다는 것. 하지만 불행하게도 번역본이 없더라. 여전히 많은 좋은 책이 번역되지 않았음에, 작년 겨울 건조한 방에서 번역가가 되고 싶다던 동생을 다그친 나를 자책한다.
영화제작 서적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는 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호기롭게 뽑아든 책의 첫 장이 노잼일 경우 보통 마지막 50페이지까지 견뎌야 맥락 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건 익숙해지고 있다. 그냥, 실감이 난다. 올해 안으로 어쨌든 소설 내고, 내년에 단편 하나 연출할 지도 모른다는. 신화 같은 일이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실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