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ㅆㅆㅆ] 해장 수영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안전을 생각한다고?

by 동그람

이틀 연속으로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사람을 즐기느라 몸이 많이 무거운 채로 토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분명 늦잠 자고 싶었지만, 모든 K-노예가 그렇듯이 출근 시간에 맞춰 깨고야 만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무척 개운하게 깨버리고 만다. 평일, 출근을 앞둔 그 시간에는 미친 듯이 피로한데도 주말 그 시간에는 몸과 뇌가 개운한 것이 K-노예 주말의 숙명이 아닐까. 비록 이틀 동안 술을 먹었고 배부른 채로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말은 되도록 많은 시간 깨어있어야만 하는 숙명이 분명하다. 물론,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고 늘 머리맡에는 몇 권이 책이 있었으니,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 누운 채로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갔다. 배고프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불과 12시간 전까지도 먹고 있었으니 당연히 배고프면 안 되지. K-노예의 또 다른 숙명 중 하나, 살려면 커피만큼은 꼭 마셔야 했다.


많은 커피 용품들이 있지만, 피곤한데도 드립백이나 캡슐 커피를 마시는 대신 핸드 그라인더를 꺼냈다. 돌고 돌아 아날로그, 돌고 돌아 손 맛. 아이스로 마시고 싶어서 굵기를 조절 한 뒤 모카포트 용으로 갈기 시작했다.

내가 캡슐 커피 머신을 사게 된 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생일이었고, 몇 주 동안 술을 마셨고, 몹시 피로했지만,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깼고, 마셔야 했는데 집에는 원두뿐이었기에 숙취와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핸드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았다. 벽에 기대어 갈다가 의자에 앉아서 갈다가 침대에 누워서도 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음 날, 백화점 오픈런을 처음 하면서 캡슐 머신과 캡슐커피를 사 왔다. 내 안에서 편의와 맛이 타협했던 경험이었다.

요즘 덜 힘든지, 도통 타협이 안 되는 나날들 속에서 캡슐 커피 머신은 인테리어 소품이 돼가고 있다. ‘돈지랄’의 추억에 잠깐 잠기는 동안 원두는 다 갈렸고 모카포트에서 추출된 커피는 얼음을 녹이며 적정한 온도와 그럴싸한 맛으로 바뀌었다.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자, 그제야 더운 게 느껴졌다. 아직 에어컨 틀기는 싫어서 창문 열고 선풍기만 틀고 잤는데, 술기운 때문에 몸에 열이 올랐는지 차가운 게 몸속으로 들어가서야 몸이 뜨겁다는 걸 느꼈다. 몸이 뜨거우니까 물속에 들어가고 싶었고, 그렇게 해장 수영을 하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수영장 점검시간이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몸을 더 덥게 만들기로 했다. (?)

그렇다. 나는 그런 애다.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 맞바람 치도록 온갖 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고 점점 지쳐갔다. 몸이 끈적거리고 땀이 흐르다 못해 장판에 얼룩을 내는 걸 보며, ‘계획대로 흘러가는군’ 하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해장 수영 전에 해장 청소를 하게 됐지만, 이런 뒤에 들어가는 수영장은 또 얼마나 달콤하겠냐는 생각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드디어 수영장으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자, 흥분이 뇌를 망쳤는지 길을 잘못 들었다. 집에서 수영장까지는 10분도 안 걸리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엄청나게 돌아서 돌아서 도착했다. 수영이 얼마나 즐거우려고 운명이 나한테 이래? 하는 생각으로, 짜증도 나지 않고 흥얼거리며 드디어 도착.

50미터 레인이 매력적인 수영장. 25미터보다 힘들어서 좋아하는 수영장. 나처럼 생각하는 수영인들은 차고 넘쳤다. 따라서 수영장에는 물 반 사람 반. 수영의 시작은 레인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적절한 인구밀도와 적절한 속도, 거의 없다시피 하는 트래픽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길 막러’가 없는 레인. 그날의 픽은 ‘상급’ 레인이었다.


오랜만에 담그는 수영장 물에 닿는 감촉이 참 좋았다. 그리웠다. 몸 풀고 나서 스마트 워치 기록을 시작했다. 1시간만 하고 가려는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물이 무겁지 않아, 즐거운 ‘놀수’(놀면서하는 수영)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찾아온 그 타이밍, 물 잡는 게 무거워졌다. 근육에 힘이 빠진 모양. 빈 속이고, 해장 수영이고, 오기 전에 한 참 진땀을 뺐으니 오늘은 ‘놀수’ 콘셉트로 가는 게 맞아. 논리적이고 증거가 뒷받침된 자기 합리화는 잘 먹혀들었고, 속도를 늦추기로 마음먹었다. 레인을 바꿔야 할까 싶어 두리번거렸는데, 유지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출발하는 텀을 길게 두면서 거리를 맞췄는데, 천천히 할 거라면 텀을 좁게 잡고 출발하면 적절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손끝에서 앞사람의 발차기가 일으키는 물보라가 느껴질 정도로 내가 빨리 따라잡고 있었다. 서둘러 속도를 줄였지만 이미 늦었다. 앞에 가시던 할머니가 중간에 멈춰 서셨다. 나도 즉시 멈추며 습관대로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누가 따라오고 있었다면 충돌에 대비해야 했지만, 여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요”라고 하셨다.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해졌다. “편하게 가세요, 괜찮아요”라고 했는데도,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돌아오는 방향으로 옮겨가셨다. 나는 다시 스트로크 하면서도 할머니의 모습이, 방금 그 찰나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끝지점에서 바로 턴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도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호흡할 때 보이는 오른쪽은 초급 레인인데, 사람이 따닥따닥 붙어서 수영하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물이 일렁여서 오히려 그런 곳이 더 힘들다. 사방으로 흔들리는 물살에서도 저항을 최소화하는 스트림라인을 잡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저항을 많이 받게 되고 더욱 힘든 수영을 하게 된다. 초급 코스는 어느 스포츠나 북적거린다.




스노보드를 처음 배울 때도 비슷했다. 야간 슬로프에서 친구에게 간단히 배우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자꾸 누가 뒤에서 부딪혔다. 결국 자꾸만 뒤에서 받치던 나를 보던 친구가 그 사람에게 가서 왜 안 멈추느냐 물었다. “멈추는 법을 몰라요.” 스키를 타던 그 사람에게 친구가 A 자로 멈추는 걸 알려줬지만 쉽게 익혀지지 않았고 결국 "못 멈추시겠으면 넘어지세요"라고 알려줬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넘어지는 게 무섭다"라고 하면서 계속 남을 들이받았다. 나는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뒤에서 치니까 나는 그 사람이 오는 걸 볼 수도 없으니 소리라도 질러서 신호를 주라고 했더니 하는 말. “무서워서 소리가 안 나와요.” 우리는 그 사람이 무서워서 정말 아무 소리도 못 했다.


결국 내가 먼저 도망치기로 했다. 스노보드에 발을 끼운 지 1시간도 안 돼 중급 슬로프로 올라갔다. 거기서부터는 달랐다. 다들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서로의 속도를 알고 있었고, 작은 틈도 자연스럽게 비켜 주었다. 오히려 안전하게 낙엽 치기를 연습하고, 곧 잘 타게 됐다.




서핑을 배울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첫날이라 나 역시 거품 파도를 타면서 보드 위에 일어나는 테이크 오프 연습을 한 끝에 열 번에 한번, 다섯 번에 한번, 세 번에 한번 성공하는 식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건방지게도 발목에 스냅을 줘 방향을 바꾸는 연습을 해보기 시작했는데, 어린이 강습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피차 초보인 입장이라 누가 누굴 봐주는 게 불가능 한 거품 파도 존은 난장판이 됐다. 틈을 먼저 보고, 거품 파도가 오는 걸 잡아 타고 테이크 오프 한 순간, 내 시야가 하늘을 바라보게 됐다. 굉장히 찰나의 찰나였다. 누군가의 보드가 내 보드와 다리 사이로 치고 들어와, 나는 허공에 붕 뜬 채 하늘을 바라보고 등부터 보드 위로 떨어진 뒤 보드가 전복되며 바다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래도 이미 파도에 빠지는 ‘통돌이’를 연습해 두어서 침착하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보드 주인은 어린이. 그 친구는 얼굴에 묻은 바닷물을 닦으면서 울먹였고, 보호자는 모래사장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바다에 들어올 생각조차 없었는지, 슈트 아닌 일상복 차림이었던 데다 이 충돌로 인해 거품 파도 존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돼, 맨 몸으로 들어오기에는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얼마나 난장판이었냐면 어린이의 보드는 파도에 휘청이며 여러 사람을 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보드는 잡는 이가 없었다. 많은 보드들이 충돌하고 많은 사람들이 '통돌이' 당했는데 물론 어린이 초보 강습생들과 어른들이 한 데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파도 속에서 주인의 통제를 잃고 보드들이 춤을 추며 사람들을 때리고 있었다.

결국 어린이에게 다가가 발을 들게 해 리쉬 줄을 잡아당겨 어린이에게 잡으라고 했다. 리쉬 줄만 잡으면 보드는 계속해서 파도에 몸을 맡기고 바다 위 무기가 돼버린다. 보드를 잡으라고 했지만 아직도 패닉 상태의 어린이는 리쉬 줄만 잡았고, 결국 내가 보드 두 개를 잡고 모래사장으로 가야 했다. 결국 그날도 라인업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그날 파도는 초보가 타기 적당해서 안전하게 타고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수영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초급 수준은 아니었다. 수영하는 자세를 잘 잡고 있었지만, 조금 느렸을 뿐. 상급 레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빠른 것도 아니라서, 적절하게 서로 속도를 맞추며 출발하고 스트로크 하며 수영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할머니는 다른 레인으로 가버리셨다. 내 속도 때문에. 일렁이는 초급 레인 물살을 보면서 ‘그냥 여기서 하시는 게 더 나으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느리고 서툰 사람들끼리 모이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그 반대다. 각자의 방향과 속도가 제멋대로면, 오히려 더 자주 부딪히고, 더 자주 사고가 나고 간혹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로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상급자 레인은 초급 레인에 비해 빠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급을 나누는 건 속도보다는 자기 통제력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고, 언제쯤 멈춰야 하는지도 안다. 작은 신호를 주고받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자주 부딪히고, 가끔은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간다. 그러다 서로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수영장에서는 그런 호흡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망쳤다. 오늘 상급 레인의 ‘샤크’는 나였던 것 같다. 타인과의 간격보다 내 수영에 열중하느라 손 끝에 느껴지는 감촉을 신경 쓰지 않아 결국엔 다른 레인으로 쫓아내고 말았다.



스노보드와 서핑 때의 일과는 여러모로 달랐지만, 비슷하기도 했다. 초급자, 어린이, 노인. 이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니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취약함. 숙련되지 못한 취약함, 아직 배우는 중인 취약함, 노화로 인한 취약함. 모두 다른 이유지만 결국 예측하기 어렵고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스노보드와 서핑에서는 그들을 위험요소로 봤다. 수영장에서는 할머니를 템포를 맞춰 같이 갈 수 있는 길동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아쉬웠고, 그래서 미안했다.


어디에서 그 차이가 생기는 걸까. 야간 슬로프와 바다에서는 나 자신도 초보였다. 내 안전을 지키기만 해도 벅찬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취약함까지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수영장에서는 달랐다. 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였고, 할머니는 초급도 아니었던 데다가 내가 그분의 취약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이 됐었다.




아마추어 스포츠의 영역에서 안전이란 결국, 취약함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핵심일지도 모른다. 너무 느리면 부딪히고, 너무 빠르면 충돌한다. 그 사이에서 서로를 살피고 간격을 맞추는 일, 그게 아마 조금 덜 위험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또 다른 관점이 생겼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취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나이로 인한 취약함, 경험 부족으로 인한 취약함, 몸의 한계로 인한 취약함.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안전성을 결정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배제하고 분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그들과 함께하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내가 이런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건 그 순간마다 내가 상대적으로 더 숙련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영장에서는 그랬고, 스노보드를 탈 때도 결국 나는 멈추는 법을 알고 있었고, 서핑에서도 어린이보다는 오래 연습한 쪽이었다. 그러니 그 상황들을 조금은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었고, 누군가의 취약함을 살피는 마음을 가질 여유도 있었다. 우리가 취약한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안전성이 달라진다는 말이 ‘참’이라면 그 첫걸음은 아마도 내가 먼저 내 자리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쯤 서 있고, 내가 가진 여유는 어느 정도인지,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 그리고 그다음은, 상대방의 취약함을 이해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 배려도 결국은 내 기준에서 멈추고 만다.


생각해 보면, 안전은 그렇게 대단한 기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느리게 바라보고, 한 걸음 더 간격을 두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게 수영장이든, 스노보드 슬로프든, 서핑하는 바다든, 혹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자리든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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