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ㅆㅆㅆ] 하체 운동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제한된 쉼'을 생각한다고?

by 동그람


에너지 관리에 아직도 애를 먹고 있다. 빠듯한 일정들 속에서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하는 게 계획의 첫 시작인데, 매번 골고루 분배하지 못하고 있다. 일정 관리를 수년간 해왔어도 작년 방식이 올해에 적용되지는 않아, 연초에 세운 계획은 한 분기가 끝나기도 전에 망가지고 만다. 이번에는 프로젝트 마감이 우선순위였기에 자연스럽게 헬스장은 일정표에서 빠지게 됐다.



등록하고 2개월을 안 갔다. 밤샘은 기본이고 먹는 것도 대충 때우다 보니 프로젝트 마감 이후 몸과 뇌가 망가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키보드를 눈으로 직접 보고 누르는데도 오타가 날 정도로 뇌가 망가져버렸다. 아무것도 안 하는 자체 방학 기간을 갖기로 하고, 뇌를 회복시키는 '놀이'들로 하루를 채웠다. 드디어 그동안 미뤘던 헬스장을 오랜만에 갈 수 있게 됐다.



'집중 모드'를 거친 뒤 쉬는 기간을 갖고, 다시 일상으로 서서히 회복하는 순서를 여러 번 겪으며 운동 복귀 순서도 생겼다. 큰 근육을 살살 데우고 작은 근육 순서로 옮기는 건데, 그걸 하루에 한 근육씩 다룬다. 오랜만에 복귀하는 건데 전신을 '조졌다가' 일주일 동안 괴로웠던 경험으로 깨우친 순서였다.



그날은 하체 운동을 하기로 했다. 케틀벨 스쿼트로 시작하려 했는데, 주저앉은 몸은 도저히 기운을 내지 못했다. 무릎이 후들거렸고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2개월 만에 돌아온 헬스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동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뭐, 복귀 날이니까.' 과감히 스쿼트를 포기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대신 무게는 증량하기로 했다. 자존심이었을까? 데드리프트, 레그 익스텐션, 힙 쓰러스트를 끝내고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스탠딩 어브덕션.

"아, 이건 자신 있지."

자연스럽게 원판을 겹겹이 쌓아 넣은 뒤, 자리에 섰다. 3개부터 자세가 무너지더니 결국 개수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걸? 내가? 못 한다고?"

복귀 전은 실패했다. 몸은 정직했다. 2개월의 공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작 두 달이었는데, 그동안 쌓아둔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너졌다. 오랜만이라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며, 체면을 위해서라도 다시 원판을 바꿔 끼웠다. 마음 깊은 데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깊은 빡침에 힘입어 원래 하던 만큼은 지켜서 한 세트를 끝낼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물통을 보면서 다음 세트에 마시기로 했다. 왠지 지는 거 같아서 도저히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였다. 타협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헬린이.



두 번째 세트까지 해치우고 물을 마시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그 물은 BCAA를 탄 거라 맛있기도 했고, 참았다가 마신 거라 더 꿀맛이었다.

'이제 슬슬 몸이 기억하나?'

신이 나서 세 번째 세트를 하는데 마지막에서… "으!"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도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목소리가 듣고 있는 노래와 전혀 어우러지지 않고 겉돌았다. 결국 마지막은 포기하고 내려왔다. 또 포기! 또!



물 마실 자격도 없다며 스스로를 다그치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에 비친 나. 초점 잃은 눈빛, 벌게진 얼굴, 땀에 번뜩이는 피부. 나도 모르게 뒤에 있는 기구에 주저앉았다. 물보다는 앉아있는 게 시급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고 생각했을 때 스마트워치가 심박수 수치 초과 알림을 알려줬다. 순간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안심이 됐다고 해야 할까?



너 힘든 거 맞고, 그게 정상이야. 그러니까, 잠깐 쉬어.



이런 합당한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앉아 있기로 했다. 보려고 한 건 아닌데, 거울에 비친 나와 또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왜 저러고 있지? 두 팔을 위로 올려 프레스 머신의 바에 걸치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고개를 떨군 모습이었다. 완전히 고릴라였다. 아니,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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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중간에 쉬는 나



도저히 팔을 내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이 자세로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팔을 내리면 몸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안에서 "그래도 좀 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뭘 하려는 게 귀찮았다. 지금은 체면보다 숨을 고르는 게 더 중요했다.

그 와중에 시간은 흘러 쉬는 시간 60초가 끝났음을 스마트 워치가 알려줬다. 다시 스탠딩 어브덕션에 원판들을 끼우고 세트를 시작했다. 물론 아프긴 했는데 왠지 끝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또 실패. 마지막은 하지 못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또 뒤에 있는 기구에 앉아 같은 자세를 잡고 쉬었다. 거울을 보면서도 '또 저러고 있네' 하고 자조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부끄러움, 체면, 자존심 같은 것들이 잠깐 사라졌다. 몸이 이 자세를 원하고 있었다.



마지막 세트가 끝나고 유산소까지 마무리 한 뒤 씻는데 문득 그 자세가 떠올랐다.

"왜 그랬지?"

쉴 때 앉아있던 프레스 머신의 의자는 인클라인이라서 기울어져 있는 형태였다. 그런 의자에서 편한 자세란 등을 대고 천장을 바라보고 눕거나 그게 아니면, 두 손을 위에 걸치고 상체 무게중심을 앞쪽으로 해서 기대는 자세였던 거다. 팔의 무게도 분산되고, 어깨와 등의 긴장도 풀어졌다. 무거운 머리를 팔에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불편한 의자에서 내 몸은 6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해답이었다. 기특했다, 내 몸.



몸이 무의식적으로 편한 자세를 찾는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끝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팔꿈치를 댈 수 있어 한 손으로 폰을 보기 편한 자세. 신호등에서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는 것도, 복사기 옆 벽에 기대는 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등을 대는 것도. 모두 짧은 시간 동안 몸이 찾아내는 최선의 쉼이었다. 본능적으로 만들어지는 자세는 다소 웃길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그게 최선인 거다.



플라밍고가 한 다리로 서서 자는 것, 거꾸로 매달려 자는 박쥐, 이상한 자세로 잠들어 버린 고양이, 강아지들은 다리를 허공에 쭉 뻗고 배를 드러낸 채 코를 골고 자는 모습은 어딘가 웃겨 보여도 가장 안전하고 편하게 쉬는 자세일 것이다. 내가 ‘원숭이’ 같은 그 자세가 편했던 것처럼. 최소한의 에너지만 쓰면서 최대한의 회복을 얻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가성비 좋은 쉼.




나도 모르게 '쉼'에 가성비를 붙이게 됐을 때,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원래 쉼은 더 단순했을 텐데. 몸이 원하는 대로 멈추고, 다시 움직이면 되는 거였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쉼마저 효율과 생산성으로 설명하게 된다. 언제부터 그게 당연해졌을까.



원시인류도 동굴 벽에 기대어 쉬었을 것이고, 나무 그늘을 찾아 몸을 맡겼을 것이다. 사냥 후 지친 몸을 회복시키는 자세를 그냥 편한 자세를 찾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쉼은 생존 그 자체였다.

농경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농번기에는 바쁘고 농한기에는 느긋하게. 계절의 리듬이 곧 쉼의 리듬이었다. 몸이 피곤하면 쉬고,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쉼의 기준은 자연에게 맡기며 인간은 그저 노동과 쉼을 누리기만 하면 됐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시계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쉼이 시간 단위로 측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주말과 휴가라는 개념도 생겼다. 연간 며칠, 정확히 계산된 날짜와 시간들이 '쉼'을 카운트한다. 현대인의 쉼은 완전히 측정 단위에 갇혔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니까 1시간만큼 쉬고, 주말은 이틀이니까 이틀만큼 쉬고, 연차는 열흘이니까 열흘만큼 쉬는 것이 '적절한' 쉼이라고 받아들인다. 내 몸이 기준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준 시간이 기준이다.



이제는 스마트워치가 내가 얼마나 쉬었는지도 대신 판단해 준다. 심박수가 안정된 시간이 몇 분인지, 밤사이 깊은 수면이 얼마나 지속됐는지까지.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일어나서 움직이세요'라는 진동이 온다. 쉼조차 기계에 의해 측정되고 관리되는 것이 당연해졌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쉼도 마찬가지다. '힐링', '소확행', '멘탈 케어'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면서 마음의 쉼조차 카테고리가 됐고, 지금은 쉼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몸도 쉬어야 하고 이제 마음의 쉼도 챙겨야 하는 일이 돼버리자 쉬어야 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해 쉬는 방법을 알려주는 상품이 생겼다. '이걸 누리면 쉬는 겁니다'라고 미리 정의된 패키지를 사고파는 하나의 산업이 돼버린 거다. 쉬기 위해 돈을 내고,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한다. 이제는 쉬는 것마저 쉽지 않다.



현대인의 삶은 마치 내가 헬스장에서 세트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출근-점심-퇴근-잠, 월요일부터 일요일, 이번 달부터 연말이 지나면 내년. 모든 것이 연속적인 과제로 이어져 있어서 쉼조차 '다음을 위한 준비'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내가 충분히 쉬었는가'를 판단할 기준이 내 몸이 아니라 '다음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가'가 된다. 진짜 피곤해도 시간이 되면 쉼을 끝내야 하고, 아직 덜 쉬었어도 다음 일정이 있으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언제쯤 진정으로 쉴 수 있을까? 생산성에 대한 강박, 시간 관리의 효율성, 사회적 기대와 책임, 경제적 압박을 모두 내려놓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만큼 쉴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헬스장에서 했던 것이 답일 수도 있다. 60초라는 시간 제약은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만큼은 몸이 원하는 대로 쉬는 것.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의 최선의 자유를 찾는 것. 지하철에서 끝자리에 앉아 팔꿈치를 기대는 것도, 신호등에서 한쪽 다리에 체중을 기대 서 있는 것도, 복사기 앞에서 벽에 기대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짧은 시간, 제한된 조건 안에서 몸이 찾아내는 최선의 쉼. 모두 어딘가 어색하고 우아하지 않은 자세들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 현대인 모두가 매일매일 그런 자세를 하고 있는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원숭이’ 자세가 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경이롭지 않나. 그 잠깐의 시간, 그 빡빡한 조건 안에서도 몸은 포기하지 않고 쉴 방법을 찾아낸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 순간 스스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몸을 기특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가끔은 ‘원숭이’가 된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그런 현명한 원숭이.



비가 세차게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은 어제보다 더 자주 ‘원숭이’가 될지도 모른다. 괜찮다. 그게 최선이니까. 오늘도 어딘가에 있을 원숭이, 화이팅.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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