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생각한다고?
제대로 된 (기능이 꽤 많은) 스마트워치로 바꾸고 부터 운동 할 때 휴대폰이 굉장히 거추장 스러워졌다. 크고 무거워서 달리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등산 갈 때도 들고가고 싶지 않은 정도. 음악도 스마트워치에 넣을 수 있으니 전화 기능을 제외하고는 운동 할 때 필수 용품이 아니게 됐다. 헬스를 할 때는 전화를 잠깐 받는게 크게 상관 없었지만, 달리기나 등산 할 때는 전화 벨소리가 나를 방해했다.
스마트워치에 음악을 넣으려고 MP3를 다운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MP3’ 단어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직도 내 서랍에는 멀쩡하게 작동하는 MP3플레이어가 있던 것이다. 배터리 방전도 되지 않은 상태라 바로 전원을 켜보니 들었던 음악들이 그대로 들어가있었다.
“대박.”
기분이 무척 상기 됐다. 이 MP3플레이어와 함께 했던 경험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은 유튜브 뮤직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수십가지도 되는 불편한 것중 가장 불편한게 '선택한 것만 재생' 이 안되는 점이다. 따로 재생목록을 만들어서 재생해야되는 시스템이라서, 재생목록마다 겹치는 노래가 수두룩하다. MP3는 전체 리스트에서 몇 곡을 선택해서 재생할 수 있다. 전체 랜덤 재생, 전체 순서대로 재생도 물론 가능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곡을 모두 '때려넣은 뒤' 기분별로 상황별로 재생해버리면 그만. 선택한 곡만 재생하다가 갑자기 한곡만 듣고 싶다면 '한 곡만 반복' 을 할 수 있고 그 반복을 해제하면 다시 선택한 곡 재생 리스트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진다. 이 얼마나 편한 시스템인지. Nn년이 지난 뒤에 만져도 잊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직관적인 시스템이다. 게다가 가볍다. 운동을 함께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휴대폰을 버리고 MP3 플레이어로 결정했다.
옛날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곡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들고 나가서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어폰이 없네......
블루투스 기능이 없는MP3라서 줄 이어폰이 필요했다. 내가 갖고 있는 줄 이어폰은 휴대폰에 맞는 8핀 형식. 사야하는 번거로움 따위는 재미로 느껴졌고, 바로 쇼핑하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거슬리지 않는 이어폰을 알아보려고 후기를 찾다가 재밌는 걸 알게됐다. 요즘 다시 줄 이어폰 쓰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 레트로 열풍의 '이어폰' 버전인가보다. 이러다 '마이마이' 열풍이 불어 카세트 테이프 음반도 다시 나오는거 아냐? 묘한 기대감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길거리를 걷는 걸 좋아했는데, 길에서 말거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방해받기가 싫었던 나는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러그에는 아무것도 꽂지 않은 채로 주머니에 넣고 거리를 산책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음악도 안 듣는 이어폰. 순전히 '방해받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세상을 온전히 홀로 산책하기 위해 ‘인간’을 차단 하는 도구. 일종의 ‘공갈 이어폰’ 같은 개념이랄까.
지금도 캠핑 갈 때 밤에 캠핑 이웃이 코를 골거나 시끄러울 때를 대비해서 줄 이어폰을 가져간다. '차단'의 도구지만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다.
줄 이어폰은 내게 음악을 듣는 도구였던 동시에 오롯이 세상을 느끼기 위해 인간을 ‘차단’ 해주는 도구인 셈이다.
학교다니던 시절, 유난히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던 친구가 있었다. 방학이면 아무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와서 기다리곤 했고, 나는 당시에 즐겨하던 취미가 여러개였는데 즐기지도 못하고 번화가로 끌려나가 먹으러나 다닐 뿐 이었다. 하루는 새벽같이 일어나 카메라와 이것 저것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휴대폰을 보란듯이 거실에 두고 말이다.
정말 자유로웠다. 서랍에서 꺼낸 MP3는 그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친구는 여전히 거실에 앉아서 서운함, 외로움, 자존심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죄책감이 그날의 모든 자유를 집어 삼켰고, 자유를 갈망하는 것에 부채감 마저 들게 됐다.
연결을 거부하는 것보다, 스스로 연결을 강요하게 되는 마음이라니.
'언제든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건 '억압'이 아닐까?
‘연결’은 그럴싸한 말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왠지 좋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연결’은 누군가 내 시간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연결은 내게 묻지 않고 들어오는 예의없는 침범이다.
내가 사색에 잠겨 걷고 있을 때,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때,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만의 시간’에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고,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그 연결이 만들어졌다.
연결이란 그런 거다.
한국 사회에서 ‘연결’의 큰 획을 담당하는 건 카카오톡이다.
카카오톡이 초기에 내세운 아이덴티티는 '연결'이겠지만, 사회는 '강제' 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흘러갔다. 카카오톡의 시스템이 '연결' 이 아닌 '선택의 거세' 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전화번호만 알면 친구의 친구가 자동 추천되며, 인간 관계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가족, 과거 연인, 심지어 전화번호 당사자도 모르는 스쳐지나가는 관계까지 모두 강제로 연결 시켜버렸다. 연결될지 말지 선택할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최근엔 오픈채팅방에 ‘전체 멘션’ 기능이 생겼다. 회사라는 공간, 업무 중이라는 시간에 울리는 전체 멘션은 절대로 긴급하지 않은 알림이 대부분이고, 그건 그냥 쓰레기 투척이다. 그 알림이 폭력적이라서, 결국 나는 모든 알림을 껐다.
그 뒤로는 모임마다 이벤트가 있는 시기에는 성실하게 공지 사항을 확인했고 일정에 달린 댓글도 꼼꼼하게 확인하게 됐다. 모든 알림을 끈 순간, 오히려 더 자주 확인하게 됐다. 연결을 거부했더니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되는 아이러니.
선택 없는 연결은 언제나 폭력을 남긴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
그건 요즘 사람들이 갑자기 예민해져서 만든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그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왔던 거다.
‘연결’에는 권리가 아닌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가족과 연결되면 안부를 묻고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친구와 연결되면 우정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연인과 연결되면 소통하고 배려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의무와 책임 없는 연결은 존재할 수 없다.
연결에는 그에 따른 가치와 기능들이 있어서, 연결되지 않는 것보다 중요시 돼 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하며 연결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혼자다. 각자의 몸속에, 각자의 마음속에 홀로 존재한다. 연결되지 않은 상태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다만, 사회에 속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연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외로움이나 소외감, 정보 부족, 위급상황에서의 도움 부재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연결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연결을 위해서는 스스로 '의무와 책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한 발 내디뎌야 하는 게 기본 순리가 아닐까.
연결은 본래 선택이어야 한다.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연결이 되든 되지 않든, 무조건 반드시.
인간에게 '연결'이 가진 의미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뀐다.
20대에는 연결이 신나고 자극적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 새로운 경험. 하지만 30대가 되면 연결이 부담스러워진다. 직장,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힘들어진다. 40대가 되면 연결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정말 중요한 관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정리한다. 50대가 되면 "이제 내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60대에 되면 ‘사회 구성원’ 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잃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더욱 ‘연결’을 갈망하게 된다. 마치 10대처럼. 10대에게 ‘연결’은 거의 생존과 같다. 단체 채팅방에서 소외되는 것만으로도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차단’이나 ‘손절’은 존재의 전부를 부정당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70대부터는 영유아기와 비슷해진다. 몸이 불편해지고, 선택의 자유가 줄어들고,‘연결을 원하느냐’는 질문조차 받지 못한 채, 타인의 손에 의해 강제되거나 방치되는 연결만이 남게 된다.
결국 연결은 우리가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감정의 뼈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결이 끊어진다는 게 ‘관계의 종결’을 의미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좋은 관계는, 연결을 ‘잠시’ 끊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건강하다. 상대가 지금 연결되고 싶지 않다고 할 때, 그것을 거부나 무관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그런 ‘인정’이 연결에 따른 의무과 책임 중 하나다.
의무과 책임을 다한 연결된 관계는 나 자신과 당신, 더불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그럼,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연결되지 않은 상태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다. 이름 짓지 않은 사물처럼, 방향 없이 떠다니는 입자처럼,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시간. 그 고요함 안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무를 해야한다는 압박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보여줘야한다는 긴장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가 있을 뿐이다. 연결되지 않은 시간은 텅 빈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로 회복되는 시간이다. 이름 없는 사물이자,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나’의 의미에 대해 여행하고 ‘나 자신과의 연결 된 시간’이다. 그러니 연결은 기본적으로 ‘침범’을 동반하는 수 밖에는 없다. 기본 연결 존재인 자신과의 연결을 단절 시키는 개념이니까.
'연결'이라는 단어가 기본 개념인 것처럼 자명하게 여겨지기에 '연결되지 않은 상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 보이지만, 사실 연결되지 않은 상태가 인간 본성상 기본값이기 때문에 그걸 일컫는 단어가 생성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헌법에서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생긴 이유가 수많은 차별과 혐오, 전쟁을 거친 뒤 평등하다는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처럼, '연결'이라는 개념 역시 본래 자연스럽지 않았기에 일부러 강조되고 미화된 것은 아닐까. 진짜 자연스러운 상태에는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에 특별한 이름이 없고,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에 별도 명칭이 없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은 상태, 즉 혼자 있는 상태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면, 그 상태를 굳이 '무엇무엇하지 않은'이라고 부정형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연결'이 이토록 당연한 것처럼 포장된 것 자체가, 사실은 그것이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것임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이따금 ‘연결’이 아니라 ‘여백’이 필요한 때가 있다.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무 음악도 듣지 않은 채 세상을 산책하며 ‘나의 존재’를 한껏 즐기며 걷던 그 시절처럼.
줄 이어폰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온다면, 음악을 듣는 도구일수도 있지만 세상을 오롯이 산책하며 나 자신과 연결하는 도구로 쓸 수 도 있다. 어느 쪽도 꽤 괜찮은 연결이다. 아니면 괜찮은 단절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