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ㅆㅆㅆ] 도서관에 갔을 뿐인데 갑자기

'유연성'에 대해 생각한다고?

by 동그람


퇴근 이후의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모임 사람들과 함께 '세컨 쉬프트 나잇'을 하고 있다. ‘세컨 쉬프트 나잇’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내 삶의 두 번째 근무 시간처럼 쓰자는 일종의 루틴 챌린지다. 퇴근하고 나면 각자 하고 싶은 게 있음에도 쉬게 되는데, 자기가 작업하는 걸 사진으로 인증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며 서로에게 자극이 돼주고 있다. 나 역시 집에 가면 늘어지게 되니까, 평소 자주 가던 도서관에서 '세쉬나잇’을 보내기로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선호하던 자리를 찾아갔다. 종합자료실 안쪽, 컴퓨터존에 있는 쇼파 자리. 테이블이 넓고 혼자 앉을 수 있는 '내 영역'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는 자리였다. 퇴근 후 시간이라 다행히 그 자리가 비어있어서 기분 좋게 앉았는데, 이상하게 답답한 기분이 느껴졌다.


산책이나 할 생각으로 테라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인포데스크와 대여 키오스크 앞에 널다란 테이블이 연달아 있는, 사람들의 동선이 교차하는 그 자리. 책을 빌리고 나가는 사람들, 문의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잠깐 앉아서 쉬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곧바로 짐을 옮겨서 그 자리에 앉았더니 되려 집중이 '빡'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고, 내 뒤로는 책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했다. 인포데스크에서 용무를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크게 들리는 위치였다.


그런데 묘하게 집중이 잘 됐다. 평소에는 그런 소음이 신경 써서 이어폰을 꽂고 ASMR을 들으며 집중하던 내가, 그날은 귀를 막지 않고도 초 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소리가 안 들린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인포데스크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도 했지만, 집중이 끊기지는 않았다.


결국 원하던 만큼의 작업을 끝내고 홀가분하고 충만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그 시간이 무척 기분이 좋아서 다음 날도 운동 끝난 뒤 도서관으로 향했고, 또다시 열린 공간 테이블에 앉아서 '세쉬나잇'을 보내며 설정한 목표치를 이룰 수 있었다.


충만한 한 주를 보내고 쉬는 주말, 가볍게 책이나 읽어볼 요량으로 카페를 갔다가 자리가 없어서 어디로 갈지 찾아보면서 '도서관의 열린 공간 테이블 같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자리를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지? 쇼파자리는 왜 싫어졌을까?'


쇼파 자리는 분명히 편했다. 몸을 기댈 수 있고, 넓은 테이블을 혼자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움직임에 방해받지 않는 집중하기에 편한 자리였다.

우리는 흔히 편안한 자리를 좋은 자리라고 여긴다. 푹신한 쿠션, 조용한 공간, 혼자 있는 자리.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몰입'은 그런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몰입은 뇌가 필요로 하는 자극과 안정 사이의 균형점에서 발생한다. 너무 조용하면 졸리고, 너무 시끄러우면 산만해진다. 그런데 그 미묘한 균형은 항상 같지 않다. 나의 상태에 따라, 뇌의 요구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날의 나는 너무 편한 공간에서 오히려 불편해졌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스트레스. 지친 몸은 쉬고 싶어 했지만 마음은 완수하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내 몸은 소파 자리에 남고 싶었고 내 뇌는 도망쳤다. 어디로? 아이러니하게도, 약간의 스트레스와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열린 공간 테이블로. 언제든 누군가 지나갈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소음이 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일종의 각성 상태를 만들어냈다. 역설적으로 그 불편함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내 몸이 원하는 편한 자리와 내 마음이 원하는 적정한 자리는 달랐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걸 원했다. 몸은 여전히 소파 자리가 편하지만, 뇌는 다른 종류의 자극을 필요로 했다. 좋은 자리가 언제나 논리적인 건 아니다. 그 자리는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분명하게도 ‘좋은 자리’ 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생기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시간 축에서 움직이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은 지금 이 순간의 편안함에 반응하지만, 마음은 미래의 성취를 위해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려 한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내 몸은 하루 종일 일하고 운동까지 한 피로를 달래고 싶어 했지만 마음은 지금 포기하면 얻는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둘 다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몸이 편안함을 원하는 것도 당연하고 마음이 목표 달성을 원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였다. 도서관이라는 전체 공간은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긴장감을 주는 공공장소였고, 그 안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편함을 선택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불편함까지 감수 할 것인지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내 영역’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

글을 쓰다보니 공간이 주는 의미가 변하게 된 건, 도서관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게 침대는 오롯이 잠을 자기 위한 장소였는데, 잠을 자기 전에 잠깐 가벼운 책을 읽는 정도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책 읽는 용 조명을 두고, 책을 두기 시작했다. 누워서 책보는 게 좋아지는 바람에 누워있는 시간이 늘어버렸지만 책 읽는 시간도 늘었다. 누워서 책보는 스킬도 늘었다. 가벼운 책만 보다가 스킬이 늘면서 요즘은 조금은 두꺼운 책도 보기 시작한다. 확실히 읽은 책 권수가 늘었다. (목 주름도 늘었다)

침대라는 공간이 '잠자는 곳'에서 '책 읽는 곳'으로 의미가 넓어진 거다. 공간의 물리적 특성은 그대로인데, 그 공간을 활용하는 내 방식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공간에 대한 선호도가 바뀌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결국 공간에 대한 선호도 변화는 내 안의 유연성이 늘어났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그 공간이 주는 안전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다른 종류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몸의 반응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불편함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예전에는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불편함을 집중의 도구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 소음이 방해 요소가 아니라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자극이 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긴장감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촉매가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쩌면 이런게 진짜 유연성이 아닐까. 환경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을 때, 환경에 맞춰 나를 조율하는 능력. 소파의 편안함에 맞춰 몸을 늘어뜨리는 대신, 소음이 있는 공간에서도 내 집중을 지켜내는 힘.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 속에서 유연해지는 태도. 환경을 탓하기보다 환경을 활용하려하는 유연성은 선택의 폭을 넓혀 주기도 한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아도,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거다.


항상 편안하고 통제 가능한 환경만 찾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일부러 약간의 불편함과 불확실성이 있는 상황에 나를 두는 것. 그게 진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소파 자리는 여전히 좋은 자리다. 다만 지금의 내게는 더 이상 최적의 자리가 아닐 뿐이다. 나는 이제 '내 영역'이 가진 의미를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맞는 감각의 지점으로 여긴다.

필요가 달라지면 자리가 바뀌고, 자리가 바뀌면 나도 달라진다. 그러니 변화는 어쩌면 불안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 다른 자리를 찾게 되겠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좋은 자리는 원래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변하는 만큼 내 자리는 다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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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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