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생각한다고?
입추가 지나고 밤공기가 선선해졌다. 이른 새벽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에어컨보다는 자연 바람이 그리워 창문을 열고 싶었다.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자 "열어도 되는데 차가 빨라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차가 빠른 것과 창문 여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기사님은 "차가 빨라서... 소리가 웡웡해서……"라고 말을 이었지만 끝맺지는 못하셨다.
‘소리가 웡웡거린다?’
익숙한 상황에 떠올린 기억은 엄마를 차에 태웠을 때, 창문을 열면 웡웡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아프다고 했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이석증이 있다.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역시나 기사님도 이석증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적으로 생긴다고 하시길래 저희 어머니도 그렇다고 하니 엄마 연세를 물어보셨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빠르셨네.” 하는 대답에 나도 수긍했다. 이석증 전문 병원도 알아봤는데 완치가 없고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거라고 해서 걱정이 많다고 했더니, 기사님은 당신의 딸도 걱정이 많다며 말을 이어 가셨다.
"노화는 못 막아요. 젊을 때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했어도 그래요. 나도 나이가 점점 들면서 은퇴도 하고 나니까 몸이 더 늙더라고요. 나도 내가 운동도 하고 그랬으니 계속 한창일 줄 알았지. 근데 점점 늙어요. 막아지질 않더라고.”
내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위로? 눈앞의 할아버지뻘 어른에게 내가 노화를 위로한다는 게 거드름 피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 얘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저희 엄마도 한창때는 겨울에도 설산 간다고 새벽같이 나가고, 지리산 다람쥐였는데 지금은 무릎 아파서 못 다녀요. 그래도 놀러 다니던 게 있어서 차 끌고 전국 방방곡곡 잘 다닙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대개 노화를 상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한때 ‘지리산 다람쥐’였던 사람이 이제는 무릎 아파서 못 다니게 되는 것. 점점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서의 노화.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인식이다. 노화를 인정하는 것까지가 섭리 일거다.
하지만 그날 밤 택시에서 들은 이야기의 진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기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자신의 노화를 신체적 변화로만 보는 게 아니었다. 관계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괜찮아요. 내가 나이 듦을 서서히 인지하고 느끼면서 많은 감정을 이미 뒤로 했거든요. 근데 딸이 내가 늙었다는 걸 인지했던 순간에 나도 딸이 인지했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어. 그게 난 더 슬프더라고요. 딸이 나의 나이 듦을 눈치채고 느꼈을 감정들이 참 안타깝고 슬프더라고요."
나의 나이 듦을 인정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보낸 뒤에 맞닥뜨리는 자식의 슬픔을 보는 기분이 어떨지, 나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어두운 시간인데도 쉽사리 집에 들어오지 못한 채 단지 내를 걸으며 한참이나 더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자신의 노화보다 자식이 그것을 인지했을 때의 슬픔. 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
당사자인 택시기사님과 내 엄마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생명체는 언젠가의 자신의 몸이 변화하는 과정을 매일매일 살아내면서 서서히 인지하게 될 거다. 어제보다 조금 더 뻣뻣한 무릎, 조금 더 느려진 걸음, 조금 더 흐려진 시야. 이런 변화들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이어서, 당사자에게는 받아들일 시간이 주어진다.
반면 관찰자인 자식들은 어느 순간 ‘강하기만 한 내 부모님의 나이 듦’을 일순간에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 보이거나, 갑자기 돋보기를 쓰신다거나, 전에는 쉽게 하시던 일을 어려워하시는 모습을 볼 때. 그 순간은 불연속적이고 갑작스러워서, 관찰자에게는 충격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같은 현실이지만 전혀 다른 시간성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시계가 가리키는 균질하고 측정 가능한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내적으로 경험하는 지속으로서의 시간이다.
택시기사님과 그의 딸, 모든 당사자와 관찰자들에게 측정 가능한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간다. 똑같은 1년, 똑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하지만 그 시간을 내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바로 여기에 노화를 둘러싼 두 시선의 차이가 있다.
당사자가 경험하는 노화의 시간은 지속적이다. 노화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침투하고 축적되면서 연속적으로 흘러간다. 노인에게 어제의 무릎 아픔과 오늘의 무릎 아픔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경험 속에 스며들어 있고, 오늘의 변화는 내일의 적응을 위한 준비가 된다. 매 순간이 이전 순간과 연결되어 흘러가는 연속적 시간 속에서, 변화는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적응되어 간다. 이 시간 속에서 노화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노화는 섭리이니까.
그런데 자식이 경험하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내적으로 경험하는 지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직시의 시간이다. 또 다른 철학자는 '순간'은 단순히 찰나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존재자의 존재가 갑자기 드러나는 특별한 시간, 일상적 망각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시간. 즉,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처럼, 존재의 의미가 번개처럼 드러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자식이 부모의 나이 듦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평상시에는 크고 강하게만 여겨졌던 부모의 존재가, 갑자기 유한하고 취약한 존재로 드러나는 순간. 시간이 흐른다는 추상적 사실이 구체적 현실로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이 순간은 이전과 이후를 명확히 구분 짓는다.
이런 순간은 우리를 일상의 안주 상태에서 깨워 존재의 근본적 조건들인 유한성, 죽음, 시간성을 직면하게 만든다. 자식에게 부모의 노화를 깨닫는 순간은 단순히 한 사람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유한성과 자신의 미래를 동시에 직시하게 되는 존재론적 각성의 순간인 것이다.
이 두 시간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한다. 지속 없이는 순간이 가진 깊이를 이해할 수 없고, 순간 없이는 지속이 가진 변화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노화라는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 두 시간성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결국 다른 입장에서 오는 감정적 간극은 어느 시점에서 만나게 된다. 관찰자였던 자식도 언젠가는 당사자가 될 거니까. 모두가 언젠가는 사회로부터, 관계로부터 똑같은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은 늙었다’라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늙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순환적 구조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타자의 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장 깊은 차원의 공감이 완성되는 것이다.
당사자가 가장 슬퍼하는 건 정작 자신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를 타인이 알아차리는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다. 왜 그럴까?
아마도 자신의 노화가 더는 혼자만의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객관화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내밀하게 받아들여온 변화가 갑자기 외부의 관찰 대상이 되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나만의 속도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 슬픈 것이다. 물리적 노화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시선’이다.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관계와 사회가 먼저 늙음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우리는 관계와 사회적 역할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와 존재를 정의하곤 한다.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관계의 중심을 잡아왔던 누군가가 이제는 천천히 그 중심에서 밀려난다. 늙었다는 이유로. 가르치고 이끌고 보호했던 자리에서 이제는 설명을 들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기다려야 한다. 늙었기 때문에.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변한다는 건, 단지 ‘약해졌다’는 의미를 넘어 나의 존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더 외롭다. 늙는다는 건, 실은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 안에서 거울을 통해 타인의 표정에서 비추어지는 게, 나이 듦인 거다.
우리는 으레 노화를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노화는 당사자나 관찰자 모두에게 슬픔을 주고, 유한한 존재라는 각성과 함께 일종의 비장하고 비통함을 안겨준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종종 ‘역할이 끝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노인은 ‘지혜를 주는 어른’ 혹은 ‘조용한 지지자’로만 남길 기대받는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너무도 단조롭다. 그들은 여전히 감각하고, 느끼고, 배우며, 존재한다. 그 또한 ‘현재형 인간’이다.
존재는 단지 기능이 아니라 감각이다. 움직임이 멈추기 전까지,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존재론적 중심축이 서서히 기울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중심을 어딘가에 다시 두려는 본능을 가진다. 다시 돌봄의 위치로, 관심의 위치로, 사랑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건 실은, 중심을 복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일지 모른다.
나는 인간에게 사회적 역할 안에서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사회가 존재를 유용한 뒤에 남은, 관계에서 중심축 밖으로 밀려난 뒤에 남은, 순수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시작될 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할 새로운 이유를 찾게 된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어서.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랑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마땅한 섭리.
산책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졸렸는데도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아 차가운 얼음의 도움을 받아 한참을 생각했다. 노화를 둘러싼 두 시선의 차이, 그 간극이 메워지는 순환적 과정,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궤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만난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지나게 될 시간의 지형, 시선의 무게, 존재의 방향에 대한 예고였다.
어느새 창문 너머 보이던 달이 모습을 감췄는데도 나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노화는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이라는 관념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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