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날
스페인 남부 네르하.
찌는 여름 날씨를 뚫고 간 식당은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곳이었지만
동네 주민이 사랑방처럼 찾는 곳처럼 보였다.
오징어튀김, 샐러드, 샹그리아 등등 맛있게 먹고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는데 아저씨들이 서너 명 앉아계셨다.
이내 주인분이 다가오다 씩 웃으며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샷 잔에 따라 권했다.
경계심 많은 여행자는 당황했지만
왠지 안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아무 일 없기를!’ 속으로 외치며 술을 넘겼다.
레몬청에 술을 탄 듯한 맛은
딱 그 여름날에 어울리게 상큼했고
그날의 날씨처럼 도수 높아 뜨거운 술이었다.
독한 술에 무심코 찡그리자
식당에 있던 모든 이들이 원했던 반응이었는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린 상황이 웃기고
이 사람들이 익살스럽고 좋아서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남이 주는 건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버리다니.
심지어 당시 일기장에 ‘앞으로는 조심해야지’라고 쓰고는
뒤에 ‘ㅎㅎ’를 붙여 두었다.
마치 마음에도 없는 말로 반성문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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