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한 필수 코스는 비에이와 후라노 지역. 설경의 끝판왕. 애초에 이 여행을 계획하게 된 건 바로 하얀 눈이 주는 특유의 감성,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 이 필수 코스를 빼놓을 수 없었다. 초보 운전 실력으로는 이 지역의 눈을 뚫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당연히 무리라는 생각에, 일일 버스 투어를 미리 신청해 놓았다. 사실 홋카이도 겨울 여행의 핵심은 2월에 열리는 삿포로 눈 축제라는데, 나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요란한 축제 프로그램들이나 도라에몽 같은 캐릭터 모양으로 깎아놓은 거대한 눈 조각들보다는 홋카이도의 진짜 눈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축제보다 한 달이나 이른 시기에 예약을 해 두고는 혹시 인기가 없는 시기라서 인원 부족으로 취소되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별 걱정을 다 한다는듯 아침 8시 20분 오도리역 앞에 45인승 대형 버스가 두 대나 서 있었다. 심지어 여유 좌석도 거의 없이 가득 찼다. 대형 버스타고 다니는 패키지 여행을 몸부림치게 싫어하는 나지만, 자유여행을 하는 중에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일일 투어는 미리 마음에 드는 하루치 코스만 직접 고르니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은 것 같아서 좋다. 더구나 후라노나 비에이처럼 눈길 운전에 잔뜩 긴장해야 할 필요 없이 그저 풍경을 편안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면 투어 버스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나쁘지 않다. 가이드 두 명이 각자 맡을 팀의 출석을 불렀다. 가이드 한 명은 아재, 한 명은 오빠였는데 나는 오빠팀이 되어 괜히 신이 났다. 출석 부를 때 대답도 크게 하고 버스에 올라타니 수학여행 가는 여고생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해가 반짝 나 있길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했더니, 가이드가 10분에 한 번씩 바뀌는 홋카이도 날씨를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고 예언처럼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 하늘빛이 급세 바뀌더니 엄청난 눈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던 데다가 삿포로 시내를 막 빠져나갈 때쯤에는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고속도로에서 눈 때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전면 통행 금지가 내려졌다고 했다. 고속도로에 진입 자체를 못한다는 얘기. 첫날 JR열차도 그랬는데, 여긴 사고가 나면 도로를 전부 통제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더 신기한 건 일본 사람들은 그런 불편에 대해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조용히,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폭설이 내리는 그곳에서 불평을 하는 에너지를 아껴 묵묵히 제설 작업을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다보니, 그런 삶의 태도가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데 조바심을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담담하게 일정을 변경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모나지 않은 체념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경험으로 만들어진 '강인함'이다.
고속도로 진입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결국 비에이역까지 국도를 타야했는데, 가이드가 말하길 홋카이도가 원래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하지만 이날같이 많이 오는 날은 또 손에 꼽는다고 할 정도로 눈이 몰아쳤다. 빠른 제설 작업이 불가능할 만큼의 눈이었는데, 이렇게 계속 눈이 몰아치면 과연 투어를 계속하는 게 가능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기사아저씨가 운전하는 모습을 좌석 너머로 빼꼼히 쳐다봤다. 가이드가 그걸 본 건지 베테랑 기사 아저씨를 소개했다. 홋카이도에서만 운전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는 분이라는데, 운전 경력 20년보다 더 중요한 건 '홋카이도에서만'이었다. 운전 면허증 취득이 쉽지 않은 일본 내에서도, 홋카이도의 운전 경력은 다들 알아주는 스펙이 된다. 그러니까 홋카이도는 눈길 운전을 위한 거친 트레이닝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긴 설명 끝에 조금은 안심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고속도로를 탔으면 절대 볼 수 없었을 마을의 풍경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보였다.
저렇게 출근했다가 퇴근길에 길이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이 지역의 건물은 낮고 비스듬한 지붕이 대부분이었는데, 눈 무게 때문에 지붕이 무너지는 일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 신호등 불빛 속에 서 있는 사람도 유난히 외로워보였다.
제설 장비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아저씨, 고단해 보이는 어깨.
이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제설 작업이 곧 일상이어야만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출근하기 전에 한 번, 퇴근하고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하루에 최소 네 번 이상의 제설 작업을 해야 해서 웬만한 제설 장비들이 가정집에도 종류별로 잘 갖춰져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작은 제설차를 소유하고 있는 집들도 있다는데, 그들에게 눈은 결코 여행자의 낭만과 같은 것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낮은 지붕의 집 앞에 나와 자기 키보다 높게 쌓인 눈들을 치우느라 땀범벅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하얀 눈에 파묻혀 '오갱끼데스까'를 외쳐보겠다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차창밖을 즐기고 있던 내가 너무나 무안해졌다. 내려서 돕지는 못할망정 턱을 괴고 차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내가 마치 수해 현장에 하이힐을 신고 나타난 어느 영부인이 된 것마냥 민망해질 때쯤, 버스가 양 옆이 소나무로 가득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에 무겁게 쌓인 눈뭉치가 후두둑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던 민망함을 간신히 떨궈내고 있는데, 곧 비탈길에 접어드니 안전벨트를 확인하라는 멘트가 들렸다. 슬쩍 안전벨트를 쥐어보다가 20년 경력 기사아저씨는 경사진 눈길도 많이 다녀봤겠거니 생각하고는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몸이 앞으로 살짝 쏠리는 듯하더니, 자이로드롭이나 바이킹이 최고 높이에서 툭 떨어질 때의 그 아찔하고 메스꺼운 느낌에 앞좌석 등받이에 달려있는 작은 손잡이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한 번 더 앞으로 세게 쏠린 후 정신을 차려보니 비명같은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고작 3~4초 정도였던 것 같은데 숨이 멎는 듯 식은 땀이 흘렀다. 버스는 이 정도 스릴은 당연한 거라는듯 곧 다시 출발했는데, 삿포로에서 비에이역까지 2시간 30분이면 갈 거리를 5시간 동안 거의 탐험하듯 기어갔으니 낭만과 현실 사이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살아서 비에이역에 도착했다. 무려 5시간 만에!
자작나무는 역시 겨울에 어울리는 나무. 말그대로 '막 찍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완벽한 배경.
이런 유치한 포즈도 너그럽게 허락해주는 곳, 겨울의 비에이.
눈 때문인지 비에이역 주변 식당들이 문을 많이 닫아 점심도 어렵게 먹고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탁신관. 마에다 신조라는 사진 작가의 갤러리인데, 비에이 지역 사진을 아름답게 찍어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기리기 위한 차원에서 유족들이 관리하는 곳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김영갑 갤러리가 떠올랐는데, 김영갑 갤러리보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주변에 자작나무숲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꼭 가볼 만한 곳이다. 탁신관 건물도 예쁘긴 했지만 눈 쌓인 자작나무 숲길 산책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이 추운 날 메이크업에 드레스까지 입고 이 험난한 눈길을 몇 시간씩 달려서 웨딩 촬영을 하러 온 예비 부부가 있을 정도였으니, 일본인들에게도 겨울의 비에이는 인생샷의 명소인 듯했다. 추위에 빨갛게 얼어버린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절대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그 옆에 신랑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얼어붙은듯 서 있었다. 핫팩으로라도 신부의 어깨를 녹여줄 자상함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비에이에서 웨딩촬영을 하고 싶다고 주장한 건 아마도 신부쪽이었나보다.
다음 코스는 닛산 자동차 광고에 나와서 유명해졌다는 켄과 메리의 나무. 그냥 설경 위에 덩그러니 한 그루 서 있는 나무였는데 유명해진 게 신기했다. 나무가 있는 곳은 사유지라서 더 가까이 가지는 못하니 멀리서 사진을 찍으라는 안내사항에 따라 잠깐 버스에서 내려 풍경을 감상했다. 어차피 유명한 나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광활하게 펼쳐진 설경을 보는 게 목적이었으니 나무는 어떤 나무든 상관 없었다. 몰아치던 눈폭풍이 잠깐 그쳐서 눈 쌓인 대지의 맑은 공기로 마음껏 호흡했다. 이곳 사유지 대부분은 농작물을 기르는 밭인데, 외부인의 신발에 묻어있는 흙의 미생물이 밭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밭 주인들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라 한다. 어쩌면 이 지역의 관광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하니 지킬 건 지켜주자는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비에이 땅은 대부분 발로 밟기보다는 눈으로 담고 숨으로 느꼈다. 그걸로 충분했다.
원래 비에이 투어를 신청하면서 제일 기대했던 건 청의 호수(아오이 이케)였는데 푸른 물빛을 전혀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쌓인 상태여서 들르지 않고 지나쳤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이 해 여름, 다시 비에이를 찾게 된다. 여름 홋카이도는 다른 글에서 다시 다룰 계획이다.) 대신 흰수염폭포는 수산화 알루미늄이 포함된 따뜻한 온천수가 에메랄드 빛을 내면서 눈 쌓인 절벽 사이사이로 흘러내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청의 호수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 아쉬움을 달래주느라 더 열일하고 있는 것 같았던 흰수염폭포는 근처 다리 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여행 책이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본 사진들이 거의 사진발이겠거니 생각했다가, 같이 보러간 사람들 전부 탄성을 지르며 한참을 넋 놓고 쳐다보다 왔다. 다리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잘 찍어볼 각도를 연구했지만, 이곳은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실제 풍경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 여름 비에이 여행을 다녀오고보니, 여긴 확실히 겨울 풍경이 더 멋지다.
에메랄드빛 신비로움은 사진의 열 배. 흰수염폭포는 꼭 겨울에 보길 추천한다.
일일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후라노 리조트 안에 오두막으로 만든 공방이 여럿 모여 있는 곳인 닝구르테라스. '닝구르'는 숲을 지키는 지혜의 요정을 뜻한다는데, 왜 지혜의 요정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밤에 가니 확실히 요정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이긴 했다. 눈, 겨울, 통나무 오두막, 그리고 공방. 닝구르테라스를 설명하는 네 가지 키워드가 마법처럼 잘 어울린다. 오두막 하나하나에 아기자기한 핸드메이드 소품을 직접 팔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있었는데, 사실 특별해 보이긴 했지만 일본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것 같지도 않고 고가의 돈을 주고서라도 가지고오고 싶을 정도의 물건은 없어서 사진만 열심히 찍었다. 불이 반짝반짝 켜진 닝구르테라스를 보기 위해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한 탓인지 이미 문을 닫은 공방들도 많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목적은 쇼핑이 아니라 풍경이었으니 크게 아쉽지 않았다. (여름 후라노 여행에서 모든 공방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몇 군데에서 지름신이 내렸다는 건 안비밀...)
투어를 마치고 삿포로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행히 고속도로 통행 금지가 해제돼서 2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오도리공원 역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지연된 시간 때문에 2시간이 더 걸려 투어가 끝난 시간은 밤 9시 20분. 비에이역에서 거의 들이마시다시피 먹었던 라멘은 소화된 지 이미 오래였고, 이후에 거의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은 채로 버스에서 내리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밤늦게까지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스스키노 거리에 많았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힘들어도 삿포로에서의 마지막밤을 기억할 만한 특식을 먹어야겠단 생각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어코 걷고 걸어 스프카레집을 찾았다. 스스키노 거리에 있는 빈티지한 인테리어의 스프카레 식당 '사무라이'. 비밀스러운 철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이미 맛집임을 확신했다. (여행 갔다온 후 짠내투어를 보니 정준영이 여길 맛집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어떤 메뉴든, 치킨이 들어가면 무난히 성공일테니 치킨 스프 카레를 주문했다. 홋카이도의 모든 식재료는 일본 전역에서 최고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생각날 정도로 싱싱하고 건강한 맛의 재료들이 가득 담긴 카레였다. 한국식으로 밥을 비벼 먹으면 안된다길래 밥 따로, 카레 따로 떠먹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걸쭉한 카레가 아니라 말 그대로 스프에 가깝고, 따뜻하게 막 나왔을 때는 야채가 잔뜩 들어간 카레탕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도 또 한 잔씩! 맥주 한 모금이 온 몸으로 찌르르 퍼져나가 흡수되는 느낌은 이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사무라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무뚝뚝한 느낌과는 달리, 춥고 지치고 배고팠던 우리에게 따뜻한 휴식을 선물해 준 식당인 데다가, 오다기리 조 느낌으로 구부정하게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음식을 만드는 직원들마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일본 하이틴 무비를 찢고 튀어나온 것 같은 일본풍 꽃미남들이 서빙해주는 이런 식당은 아마 오랫동안 잘 될 것 같다는 지극히 사심 가득한 예감.
빈티지한 느낌의 인테리어. 철문을 열고 올라가면 2층과 3층이 사무라이다. 좁아보이지만 좌석은 많은 편.
춥고 지치고 배고픈 와중에 찍은 티가 난다. 화질이 흐릿하고 흔들린 건 사진 찍은 이의 상태를 반영한 거라 어쩔 수 없다.
3박 4일 간의 짧은 홋카이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홋카이도의 맨살이 궁금해졌다. 분명 눈을 보러 온 여행이었지만,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곳에서 3~4일을 있다보니 후라노든, 비에이든, 삿포로 시내든 눈이 다 녹은 거리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일정이 빠듯해서 생략했던 노보리베츠 온천까지 떠오르고, 오도리공원 맥주 축제에서 마시는 세계 맥주의 맛은 어떨지 궁금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여름 홋카이도 여행을 다시 계획하고 만다.
김신지 작가는 '여행이란 타인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의 일상이 아닌 타인의 일상은, 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낭만의 필터를 끼워 감상하기 쉽다. 원하는 분위기의 필터를 계속 갈아끼우며 그렇게 계획한 며칠 동안 타인의 일상을 즐기다보면, 곧 내가 처한 현실도 한걸음 떨어져서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감수성에는 유효기간이 있으니, 여행은 낭만과 현실 사이에 허락된 작은 길을 걸으며 새로운 감수성을 충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