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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Feb 18. 2019

마스다 미리 입문, '오늘의 인생'

짧은 글과 그림들이 움직여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위로해요.

*'서평'이나 '독후감'을 제대로 써 보자고 하면 괜히 부담스러워 미루게 되는 것 같아, 새로운 공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바로 그 장소, 그 순간의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책 사진을 또 한 장 찍은 다음 두 장의 사진을 겻들여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공간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면 긴 글이 되기도 하고, 몇 개의 단어뿐이라면 짧은 글이 되겠지요. 부담 없는 독서 기록 공간입니다.  



  중학생 때 '판타스틱 러버', '유리가면', '꽃보나 남자'류의 만화책을 친구들하고 돌려본 이래(그마저도 친구들이 대여해 온 것들이었다) 만화책을 찾아 읽은 기억이 거의 없으니, 내 돈 주고 구입한 건 당연히 처음이다. '마스다 미리'라는 만화가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애청하던 '알쓸신잡3'의 마지막회에서 유희열이 '밤하늘 아래'라는 만화책을 추천할 때였다. 그런 책이 있구나 정도로 흘려들었다가, 대형 서점에 '유희열이 추천한 바로 그 책'이라는 광고지가 너무 화려해서 이상하게 심드렁해진 채로 또 한 번 지나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 찾는 책방 당인리책발전소에 갔더니 책꽂이 맨 아래칸에 주인장이 좋아하는 책이라 무조건 많이 주문한다는 메모와 함께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 주루룩 꽂혀 있었다. 세 번 눈에 들어온 작가의 책은 인연이라는 조금 이상한 이유를 붙여 결국 구입했는데, 혼자 쿡쿡 웃어대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오늘의 인생'에는 전혀 컬러풀하지 않은 흑백의 짧은 만화들이 이어져 있다. 주인공 빼고 나머지 인물은 다 졸라맨으로 그리는 무심함이 그림체의 특징이라고 할 정도로 애써 공들인 컷이 없어보인다. '먼나라 이웃나라'같은 만화만 아니면 만화가 다 그렇겠지만 글귀도 부담없이, 편안하게 술술 읽힌다. 전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고 그린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포착한 순간의 의식에는 아주 귀엽고 소박한 가운데 '삶이란 이런 것이니까요' 하는 그녀만의 소신이 있다. 소신이 뼈대가 되어 경쾌한 춤을 추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서는 그래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슬금슬금 움직여 편의 시가 되었다가 노래가 되어 잔잔하게 마음을 데우는 글과 그림들이 정겹다.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책을 이렇게 쓰다듬고 저렇게 쓰다듬어 보다가 인터넷에 마스다 미리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진솔함과 담백한 위트로 진한 감동을 주는 만화를 그려 일본에서 3~40대 여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신적 지주'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해서 만화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분위기와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어쨌거나 30대인 나 역시 여러 편의 만화에 일관되게 숨어있는 그녀의 소소한 생각들이 꽤 마음에 든다. '그래, 역시 그런 거야'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림 없이 긴 글로 이어진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져 조만간 에세이 '영원한 외출'도 읽게 될 것 같은데, 만화책도 몇 권 더 봐야겠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알게 되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인데, 그 사람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심지어 그림까지 볼 수 있다는 건) 훨씬 더 매력적인 일이다.  

 

  마음에 들었던 글귀를 몇 개 옮겨보자면,


  입만 열면 독기 어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느낀 불쾌함이나 불안함들을 마음 속에 붙들어두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게 또 습관이 되어버리고 계속 그러고 살면 불쾌함이나 불안함에 점점 민감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반응해버리고 결국, 본인한테 부담이 될 것 같단 말이지.(16~17쪽)


  …… 알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을 도와주었다. 그런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들이 지지대가 되어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 영화나 음악이나 공연이나,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난간'을 만드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53쪽, 154쪽)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에 위치한 당인리책발전소. 도라미가 그려져 있는 벽면 바로 아래 자리가 제일 애정하는 나의 자리.

 

프론트 바로 맞은편에는 역광이 근사한 창가 자리가  있다.


곳곳에 주인장의 메모들이 붙어 있다. 김소영 또는 오상진 아나운서가 직접 쓴 메모들이다.

+ 공간에 대한 여담을 덧붙이자면 당인리책발전소는 방문할 때마다 운이 좋았던 건지 김소영, 오상진 부부를 항상 마주쳤다. 위례점이 더 크게 오픈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나는 아늑한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책방에서는 그저 책방 주인장으로서 충실하겠다는 포즈로 이리저리 책을 나르고 묵묵히 노트북 작업을 하는 그들을 볼 때면, 굳이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불편한 요청은 하고 싶지 않아진다. 대형서점과 달리 작은 서점의 성공 요인은 서가에 주인장의 취향이 개성 있게 반영되어 있는지, 그 취향과 코드가 맞는 방문객들의 마음에 닿을 만한 분위기의 공간인지 두 가지에 있다. 대형 서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동일한 책이라 하더라도 주인장의 선택을 신뢰하고 찾는 방문객에게는 대형 서점에 쌓여 있는 그 책과 동일한 책일리 없다. 완전히 독립출판물만 다루는 서점보다는 어떤 책이든 경계 없이 주인장이 직접 재구성해서 메모를 겻들인 서가가 있는 이런 곳이 좋다.  물론 여기는 취향과 생각이 통하는, 책으로 맺어진 셀럽 커플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특별한 공간이기도 해서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도 성공 요인으로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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