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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un 26. 2021

아무튼, 서점(8)

서점과 나의 이야기_경주 황리단길 '어서어서'

    여름 휴가나 주말여행을 가더라도 장소가 결정되면 나는 일단 그 지역의 작은 서점부터 검색해서 여행 코스에 적절히 끼워 넣는다. 여행지에서 서점을 방문하면 그 서점에서 주로 어떤 책으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어 아쉬울 때도 있지만, 타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 서점의 최근 독서 모임이 선정한 책들을 따로 모아두는 서점들도 많다. 그럼 반드시 그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사온다. 간혹 온라인 공간에 모임 후기를 올려두는 서점들도 있는데, 같은 책을 읽고 나서 그 후기를 읽다 보면 시차는 있어도 장거리 독서 모임에 참석한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어 즐겁다. 그럼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책을 볼 때마다 책을 만났던 서점이 떠오르고, 그 지역이 떠오르고, 그 책으로 오고 간 이야기가 떠오르고, 거기 들를 수 있었던 여행까지 함께 추억하게 된다. 유통기한이 아주 긴 귀한 기념품을 얻어오는 셈이다.      


    작년 여름, 경주에 갔다가 들른 서점의 이름은 ‘어서어서’다. 서점은 느림과 여유의 공간인데 뭔가 서두르는 느낌의 단어가 서점 이름이라니 신선하면서도 궁금했다. 알고 보니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을 줄인 말이었다. 가게 위에 흔히 걸어놓는 간판도 따로 없고 쇼윈도 유리창 위에 시트지로 긴 이름을 붙여 놓기만 해서 그런지, 서점을 발견하면 숨은 명소를 찾아낸 것처럼 쾌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서점이 아니라 디자인 소품 가게인 줄 알았지만, 어떤 서점을 만들고 싶었는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근사한 이름이었다. 경주의 핫플레이스 황리단길 초입에 있는 문학전문서점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방문했는데, 7-8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서점에 호기심 어린 눈빛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했다. 이미 서점 자체가 황리단길만큼 유명해져서 조용히 책을 읽기에 적절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카페와 맛집들이 즐비한 관광지 거리에 책으로 가득 찬 그 작은 공간에서 흘러넘치는 생기가 즐거웠다.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아야 서점인 걸 알 수 있다.(왼쪽), 사장님의 애착이 담긴 각종 소품들과 책이 빼곡하다. 보물찾기를 하고 싶어지는 책방 내부.(가운데, 오른쪽)
글씨체에서 정성이 느껴지는 약봉투. 함께 올려 놓은 책갈피는 스탬프를 찍어 직접 만들었다.

    특히 여기서는 손님들이 구입한 책을 ‘읽는 약’이라고 쓰여 있는 크래프트 봉투에 담아주는데, 나도 읽는 약을 한 권 처방받아 왔다. 직접 책을 추천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결제할 책을 들고 가면 조심스럽게 이름을 묻는 사장님 덕분에 오직 나만을 위한 책을 받아오는 것 같은 간지러운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튼, 여름>을 읽고 김신회 작가의 매력에 빠져있던 터라, 그녀의 신작 <심심과 열심>이 눈에 띄었다. ‘나를 지키는 글쓰기’라는 부제가 특히 더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사장님은 약 봉투 위에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내 이름과 날짜를 적어주셨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스탬프를 골라 책갈피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셨다. 사장님은 약 봉투를 완성하고 나는 책갈피를 만드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봉투 속에 든 책으로 약이 만들어지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시간이 바로 어디에나 있는 서점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 되는 시간인 듯했다. 경주의 황리단길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 위해 여행 중인 사람들이 많을 테니, 약 봉투 컨셉은 ‘어서어서’만의 정체성과 아주 잘 어울렸다. 일과 사람이 주는 온갖 스트레스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치유해줄 약이 담긴 봉투 덕분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든든했다.      


    예상대로 <심심과 열심>은 ‘나를 지키는 글쓰기’의 비결을 지침처럼 나열하는 따분한 책이 아니라, 그저 글 쓰는 생활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들려주는 선배 작가의 편지 같았다. 글을 쓰면서 떠올린 사람들에 대하여, 오래 글을 쓸 체력을 위해 결심한 운동에 대하여, 자기 글에 대한 썩 유쾌하지 않은 피드백을 듣고 씩씩거렸던 기억에 대하여 허세 없이, 아니 허세까지 스스로 인정하면서 고백한다. 김신회 작가가 ‘나를 지키는 글쓰기’를 위해 달려온 시간의 기록은 나에게 정말로 보약이 되었다. 마지막 연애와 결혼이라는 인생의 과업을 수행하느라 내려놓고 있던 글쓰기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만 만지작거리던 글감들을 엮어 서툴지만 뿌듯한 습작들을 다시 이어 쓰게 되었다.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된다. 책을 출간했는지와는 무관하게, 읽는 사람은 종이에 혼자 끄적거릴 메모라도 반드시 쓰고 싶은 욕구가 찾아온다. 거꾸로, 쓰고 싶은 사람은 읽는 사람이 된다.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더 잘 끄집어내고 싶어서 더 좋은 걸 집어넣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서점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서점 이름과 같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동네 서점 최초 재고 완판! 월 매출 4,000만원! 동네 서점의 성공 모델! 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면 이 책이 굉장한 상업적 비결을 담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장님 양상규 작가는 그저 책에 대한 본질과 가치를 잃지 않는 꾸준함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결국 본질에 충실한 꾸준함을 뛰어넘는 상업적 비결이란 있을 수 없고, 있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어서어서’가 경주에서 책 문화 생산의 터줏대감으로 오래오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경주는 식상한 수학여행지였고, 불국사와 첨성대와 동궁과 월지의 포토존이 있는 관광지이기도 했지만, ‘어서어서’가 있어 다시 들르고픈 곳이 되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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