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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un 23. 2021

아무튼, 서점(7)

서점과 나의 이야기

    서점에 가든,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접속하든,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화제가 되는 책들을 훑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인기 있는 책을 전부 읽어보겠다는 의도에서라기보다는, 동시대 사람들이 유영하고 있는 정신문화의 흐름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추측 놀이를 할 때는 대형서점에 가는 것이 독립서점보다 더 유리하다. 장르별 베스트셀러와 신간 도서에 친절하게 특별한 조명을 비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출판사들의 각종 프로모션 행사들이 화려하고도 깔끔하게 홍보되어 있으니, 고개만 몇 번 돌리면 소위 ‘핫한’ 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팔리고 있는 책과 앞으로 잘 팔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는 책들은 몸에 현란한 띠지를 두르고 평대 위에 줄을 맞춰 서 있다. 판매수익에서 한참 밀리거나 마케팅 전략이 시원찮은 출판사의 책들은 고개를 천장까지 꺾어 찾아낸 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꺼낼 수 있다.      


    돈 많은 출판사가 마케팅 전략에 힘을 쏟아 억지로 만들어 낸 화제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의 운명은 그에 지속적으로 호응하는 독자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낸 작가의 마음과, 하필이면 그 책을 선택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독자의 마음 그 사이에 의미 있는 교차점이 전혀 없다면 잘 팔리는 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최초의 독자가 그 책을 집어 든 행위가 잘 설계된 마케팅의 낚시질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단지 마케팅으로 독자를 낚은 책이 입소문을 잘 타기는 어렵다. 작가와 성공적으로 교감한 독자가 다른 이에게 그 경험을 말로 전달하든, SNS에 짧은 서평을 올려 전달하든, 그렇게 이어지는 독자들의 경험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개인 독자들의 경험이 비슷한 다른 독자들의 경험과 만나 거대한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서 ‘교차점’이나 ‘교감’과 같은 단어는 그 책에 대한 독자의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의 문제와는 별개다. 독자가 작가와 교감한 결과가 분노나 비판이 되더라도 그건 이미 작가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변론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그런 다양한 반응에 얽혀 들어갈 용기를 내는 일이다.

       

    10년쯤 전에 서점에서도, 언론에서도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이라는 책이 꽤 오래 뜨거운 관심을 받았었다. 무서운 속도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고 공격적인 서평들이 줄이어 등장하면서 한창 아픈 청춘들을 잘못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청춘은 왜 아파야만 하는가’, ‘기성세대에게 과연 청년들이 처한 고단한 현실을 젊음의 특권으로 정당화시킬 자격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더니, 또 다른 베스트셀러 ‘88만원 세대’와 더불어 더 거친 세대 담론으로 이어졌다. 장기하의 노래 ‘싸구려 커피’를 들으며 한숨 쉬던 청춘들은 당시 유행하던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한 개그맨이 “아프면 환자지, 청춘이냐.”를 외치는 바람에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장강명 작가의 등단작 <표백>에는 청년들에게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선배와 그에게 대드는 후배의 대화가 나온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27쪽) 


    최근에 자주 보이는 에세이들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토닥인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니까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고,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결심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면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기에 이른다. 제목들만 훑어봐도 우리가 영혼을 갉아먹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위기 속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극도의 압박감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글로 풀어냄으로써 자가 치유하겠다는 것에 대찬성이지만, 에세이가 그저 자기연민과 자기 위로에 대한 무한 허용의 장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을 땐 좀 서글프기도 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겨냥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책의 형태를 띠고 남게 된 글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작가의 치유 경험이 곧 독자의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비슷한 내용의 글들이 장르 하나를 거의 잠식하다시피 할 때는 그 위험성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유정 작가는 <완전한 행복>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감지한 위험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주었다.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다. 다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마땅하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믿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인간이 아닌 위험한 나르시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위와 같은 주제로 유행하고 있는 에세이들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도 떠올린다. 인터넷에 ‘글쓰기’나 ‘독립출판’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관련 서적과 워크숍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출판계의 오래된 불황과 서점들의 줄이은 폐업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더 늘어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자기 치유적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높은 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꼭 전문적이고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어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 가치를 가진다는 깨달음이 많은 이들에게 공유된 데에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에세이들이 일정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돈 들여 독립출판으로라도 책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원고는 대부분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한 개인 서사와 거기에 곁들인 감상들이 주를 이루는데, 창작물 개개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는 역동적이며 미래가 밝다.     


    서점은 세상을 읽는 공간이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요즘 세상이 이런데, 넌 어떻게 살래?’하고 질문하는 공간이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을 구입하든, 인터넷 서점에서 전자책을 구입하든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국어 교과서를 읽는 수업만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흐르는 지성’이 꿈틀대는 공간이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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