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과 나의 이야기
논현동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시간은 꽤 걸렸지만 오는 내내 묘한 안도감에 휩싸여 기분 좋은 밤이었다. 첫 번째 독서 모임에서 느낀 희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점이 단지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독서 촉매제를 촉촉하게 뿌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구상하여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문화 살롱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역 곳곳에 작은 서점들이 나타나 기발하고 개성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키워가고 있었다. 덕분에 자기 방에서 조용히 혼자 책 읽던 사람들이 책을 들고 나올 액티브한 공간이 늘어났다는 안도감, 그게 이상하리만치 흐뭇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스마트폰을 뒤져가며 가까운 곳의 서점과 참여해 볼 만한 다양한 행사들을 검색했다. 독서와 인터넷의 발달은 그리 좋은 친구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숨어 있는 서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인터넷의 발달에 감사했다. 인터넷 서점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망하기도 한다지만, 사실 인터넷이 있어서 주택가 골목 안에 숨어 있는 서점들도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으니 다행이기도 하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시는 집, 음악도 듣고 춤도 추면서 술 마시는 집, 음악도 듣고 춤도 추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술 마시는 집, 그것도 아니면 락 음악 틀고 볼링 치면서 술 마시는 집 등으로 그 형태와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집 소파나 침대에 누워 읽거나, 카페에서 그냥 소음도 백색 소음이라고 꿋꿋하게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책을 읽곤 한다. 술은 술만 맛있어서 마시는 게 아니라 흥이 오르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럴 공간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면, 책을 읽고 오르는 흥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술이 아무리 종류가 많아 봐야 이 세상에 나온 책만큼 많지 않고, 대개 흥이 과하게 오른 술자리 끝에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지키지 못할 다짐이 이어지지만 열띤 독서 모임 끝에는 더 읽어보고 싶은 책이 늘어나는 법이다. 이쯤되면 술한테 미안해지지만 술집과 서점 숫자만 놓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서점 편을 들 수밖에 없다. 이건 <아무튼, 술>이 아니라 <아무튼, 서점>이니까 괜찮겠지 싶다. 몇 년 전부터 책과 어울리는 술을 팔면서 음주독서를 권장하는 ‘책바(bar)’가 핫플레이스라고 하니, 여길 소개하는 것으로 적절한 화해를 모색해 본다. 책 소개와 함께 그 책의 느낌을 칵테일 맛으로 만들어 보았다는 설명이 담긴 메뉴판은 정말 아찔하게 매력적이다. 가령 이런 문구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by 무라카미 하루키
Gin + Port Wine + Orange Juice + Pineapple Juice + Herb / 알코올 도수 : 소설(8%)
길을 걷다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마주칩니다. 그런데 둘은 본능적으로 느껴요.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의 사람이라고. 그 느낌을 맛으로 표현했습니다. 달콤한 과일의 풍미가 가득한 술이에요.
책바 사장님이 책도 쓰셨는데, 제목이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이다. 개인적으로 알코올 냄새보다 새 책 냄새를 좋아해서 서점을 더 즐겨 가지만, 책과 관련된 공간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책으로 불러 모을 수 있도록 변화를 거듭했으면 한다. 퇴근길에 책 한 잔, 와인 한 잔 할 수 있는 ‘퇴근길 책 한 잔’ 서점은 얼마 전 문을 닫았지만, 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책과 연결지을 수 있는 건 많다.
어쨌든 그날 이후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서점을 찾아 돌아다녀 온 시간이 약 5년 간 이어졌다. 그동안 각종 북클럽과 북토크와 챌린지 독서, 글쓰기 모임에도 참석했다. 덕분에 학교에서도 치열한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시행착오의 결과, 후배 교사들에게 고민의 답을 알려줄 노련한 교사가 되었다거나 평가에 지치지 않을 국어 수업을 해내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여전히 정답은 없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수업에 대한 나의 고민을 솔직하게 아이들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건 동료 교사들과의 공유와는 다른 성격의 공유다. 아이들이 고민의 내용을 함께 공유하면 수업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지는데, 나는 거기서 희망을 찾는다.
오정희 작가의 단편소설 <소음공해>을 읽는 시간이었다. 교사용 지도서나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샘플 학습지, 그리고 대부분의 참고서에는 이 작품의 주제가 ‘교양을 과시하는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정리되어 있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 진도를 나가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수업 전에 미리 읽어보고 공부해 놓은 아이들도 꽤 있었다. 교실에서 글을 함께 읽는 시간에 그 아이들은 머릿속에 이미 정리된 주제를 틀로 만들어놓고 본문을 그 틀에다가 맞춰 줄줄 통과시키고 있었다. 가장 난감할 때가 이럴 때다. 사실 나는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소음공해>의 주제를 저렇게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소음공해>는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사는 이웃 간의 층간소음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아래층 여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 ‘나’는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족에 최선을 다하는 주부이며, 가끔 클래식을 틀어놓고 휴식을 취하곤 하는, 교양과 친절을 갖춘 여자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위층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경비원을 통해 해결하려 하지만, 결국 위층 여자와 직접 전화 통화를 하면서 거북하고 날카로운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위층 여자의 거친 반응에 황당해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소음을 줄여보기라도 하려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슬리퍼를 사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맞이한 위층 여자는 바퀴를 갈 때가 돼서 소리가 난 것 같다며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한다. 휠체어를 보자마자 손에 든 슬리퍼를 등 뒤로 감추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의 모습으로 소설이 마무리되는데, 이 작품의 주제로 정리된 내용 중 ‘교양을 과시하는 중산층’은 곧 주인공 ‘나’를 가리키는 것이며 봉사활동을 하러 다니는 ‘나’가 자기 집 위층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이웃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허위의식’이나 ‘무관심’과 같은 단어로 표현된 듯하다.
그렇지만 주인공 ‘나’는 정말 허위의식에 가득찬 비판받을 만한 인물인가? 심지어 이 작품의 해설에는 교양이나 품위, 상식을 중시하는 주인공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라는 진정한 가치를 도외시했으며, ‘실내용 슬리퍼’는 곧 그것을 상징하는 소재라고도 쓰여 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도, 수업 준비를 위해 읽고 또 읽었을 때도 나는 이상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바퀴에서 소리가 나서 갈아야 할 때가 됐는데 차일피일 그걸 미루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층에서 소음 민원이 처음 발생했을 때 상황 설명을 했어야 했다. 적어도 이 소음이 조만간 잦아들 거라고 안심시키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어야 했다. 그런데 위층 여자는 주인공이 전화를 걸었을 때 자기가 나비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고 어쩌라는 거냐는 매우 공격적인 반응을 보여 갈등이 심화된다.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실내용 슬리퍼를 사 들고 올라가는 아래층 사람이 교양있는 척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걸까?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 집 아파트 몇 호에 장애인이 살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봉사의 진정성이 입증되는가? 처음부터 직접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경비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는데도 이에 응답하기를 무시한 사람은 위층 사람이 아닌가? 끊임없는 의문과 더불어 이런 걱정도 생긴다. 신체 장애를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미칠 피해를 예상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거나, 예상하더라도 미리 그것을 알려 타인을 배려하는 인격을 갖출 수 없다는 또 다른 편견을 낳는 캐릭터 설정은 아닌가?
학부 시절 문학교육론 강의에서 이 작품이 다루어질 때도 참고서에 정리된 것과 같은 주제의식으로 다루어졌던 기억이 있어 일부 교과서나 출판사만의 입장은 아니라 생각했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임용시험 때 바이블처럼 들고 다녔던 책들의 저자 권영민 평론가의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도 이미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물론 주인공의 입장을 옹호하는 나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고 거기 정리된 주제는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각종 해설서에 정리돼 있는 주제 의식을 마치 정답처럼 여기면서 자기 생각은 전혀 시도하지도 않거나, 심지어 소재의 상징성까지도 정리된 주제 의식의 맥락에 맞게 암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독서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아이들에게 나의 의문은 덮어놓고 그저 나와 있는대로, 지도 방침대로 가르칠 것인가의 고민은 역시 또 평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문학 작품 지필평가 문항을 출제할 때 주제의식을 교묘하게 에둘러 피해갈 방법은 없다. 결국 나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지필평가 시험범위에서 제외하는 대신 생각해볼 거리를 제시해주기로 했다. 내가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이 주제의식에 대한 의문점을 있는 그대로 밝혔고, 문학 작품 감상에 정답은 없지만 <소음공해>를 통해 얻게 된 아이들 나름대로의 의견과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했다. 단지 시험범위가 줄어들었다고 교과서 아래 쪽번호에 신나게 엑스 표시를 긋고 넘어가는 아이들도 있었고 시험범위인 줄 알고 공부했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배려란 상대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교양이나 학식이 있든, 없든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생각해보려는 태도여야 한다는 말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나는 아이들이 타당한 근거를 곁들여 의문을 갖고 표현하는 읽기를 하기를 바란다. 논술 전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입시를 위한 논술 모범답안을 족보처럼 밑줄 치며 암기하듯 읽고 쓴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학교 현장에서는 한 명의 국어교사가 적게는 다섯 개 학급, 많게는 열 개 학급 가까이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의 생각을 제대로 피드백하고자 마음먹더라도 한 학기에 한 번도 버거울 때가 많다. 몇 년 전부터 교과 시간 외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활동할 수 있는 자율동아리가 생겼지만 학교마다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는 자율동아리를 자발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아이들이 없어서 몇몇 아이들을 설득해 직접 자율동아리를 운영해보려고 했다. 영화 감상과 텍스트 읽기오 쓰기가 접목된 자율동아리였는데, 겨우 설득해서 데려온 아이들이 '선생님, 이거 하면 생활기록부에 뭐라고 써 줘요?'하는 순간 '자율'이라는 말도 결국 평가나 입시로부터의 자율일 수는 없는 것인가 회의감에 젖은 날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평가에서 자유로운 소그룹 독서 모임이 간절할 수밖에 없는데, 학교 시스템 자체가 그런 혁신적인 수업이 수월하도록 바뀌려면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서점이 그 대안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동안 나는 학교와 서점의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한다. 자꾸만 평가에 잠식당하는 수업에 시간을 쪼개어 종종 의문을 던지고, 쏟아지는 새로운 책들과 전국의 재미난 서점들을 소개하고, 자유로운 대화로 책 읽는 즐거움을 나눈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성인들을 위한 모임과 아이들을 위한 모임이 동시에 진행되는 나만의 서점에서 교실을 벗어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말하고, 쓰고, 나누고 싶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