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승 Jun 20. 2021

아무튼, 서점(5)

서점과 나의 이야기

    교과서에 있으니까, 학습 목표를 위해 알맞은 작품이니까, 시험을 봐야 하니까 똑같은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분석한 내용을 이해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읽기는 지겹다. 글 자체에 이끌려 스스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읽기는 학교 수업에서 불가능한 것일까. 모두에게 매력적인 단 하나의 작품이란 없으므로, 각자 선택한 글을 자유롭게 읽고 나누면서 독서 경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킬 수는 없을까. 물론 그런 읽기는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중, 고등학교 학생들 특유의 말랑말랑한 감수성과 넘치는 에너지, 호기심을 노련하게 건드릴 수만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다시 ‘평가’라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던 생각주머니를 마구 짓이겨 놓는다. 지필평가로는 다룰 수 없는 ‘과정’에 대한 평가를 하겠다며 도입된 수행평가 역시 제대로 기능하기가 쉽지 않다. 수행평가 역시 학생과 학부모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척도를 미리 공지하고 수치화된 점수를 제공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애초의 취지는 가루가 되어 부서진다. 국어는 수학처럼 정답이 하나이거나 풀이 과정의 오류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교과가 아니기 때문에, A가 쓴 수필이 B가 쓴 수필보다 2점 부족한 글임을 증명하여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문장 성분 간 호응이 전혀 되지 않거나 전달하려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문법적 오류를 가진 경우가 아니고서야 문장력을 수치화된 점수로 환산하여 상대평가를 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정돈된 문장으로만 쓴 글보다 몇몇 문법적 오류를 가진 글에 담긴 내용이 훨씬 감동적인 경우도 많다. 그런 평가의 행위는 이제 막 수필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A에게 글쓰기 때문에 가고 싶었던 학교에 떨어졌다는 트라우마를 남기기에 딱 좋다.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수행평가 1, 2점을 가지고 선생님께 감점 이유를 설명하라고 따져 묻는 아이들을 무례하다고만 꾸짖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따져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건 교과 특성이 온전히 반영될 수 없는 평가 체제와 거기에 뿌리를 둔 거대한 입시 체계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단지 교권을 운운하며 그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드물게 아주 영특한 학생들은 그런 평가를 통해서도 쓰기의 매력을 느끼고 더 잘 쓰기 위해 더 많이 읽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수업 내용도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없으나, 공교육은 스스로 쓸모를 찾아낼 줄 아는 학생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부 학생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자위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순간 나머지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일에 무감각해지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평가 점수가 걸려 있지 않으면 과제의 의미를 아예 찾지 못하는 또다른 부작용에도 전혀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게 된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큐레이션 쪽지를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는 서점은, 책을 통해 얻는 즐거움을 어떻게 경험하도록 지도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서점은 내게 그런 고민의 답을 찾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건설적인 고민을 계속 이어가도록 자극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같은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담아낸 선배 교사들의 수기도 여럿 읽어보았고, 자기 직업의 솔직한 애환을 담은 에세이들도 살펴보면서 진로 상담을 하면서 만난 아이들에게 추천해 주기도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둔 수업 시간에는 방학 때 가볼 만한 서점이나 읽어볼 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인생 책을 소개합니다’ 시간을 여러 번 가지면서 아이들끼리 있었던 책 자랑을 스스로 나누게도 했다. 수행평가를 위해 독후감을 써서 제출하라고 하거나 읽은 책을 선정해서 3분 말하기를 하라고 할 때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가 된다. 일단 그렇게라도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 고민의 과정은 서점에서 주최하는 독서 모임, 또는 주최는 출판사에서 하되 서점의 공간을 빌려 진행하는 독서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학교 수업에 적용할 만한 독서 수업 모형을 고민하는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기도 했고, 수업 준비하느라 몰두했던 교과서 작품에서 벗어나 독서 지평을 넓혀 보겠다는 의지에 대한 동기 부여 차원이기도 했다. 논현동에 있던 서점 북티크에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 모임에 참석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열린 책들 출판사에서 주최한 모임이었고, 평론가 한 분이 발제를 준비해 이끌어 가는 방식의 모임이었다. 꽤 두꺼운 책이었지만 독서 모임에 참여한다는 들뜬 마음에 그리 어렵지 않게 완독할 수 있었고, 처음으로 교사가 아닌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한 권의 책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출판사 공식 블로그에 올린 모임 사진이다.(왼쪽) / 허희 평론가님이 직접 작성한 발제문을 읽으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오른쪽) 

    <앵무새 죽이기>는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하퍼 리의 소설로 1960년 출판된 책이다. 제목의 의미와 함께 흑인 표상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라는 인물에 대한 엇갈리는 의견들이 흥미진진하게 오고 가는 동안 직업이나 나이를 뛰어넘는 집단지성의 힘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중에 어떤 생각은 오독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며 수정하기도 하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시사 문제와 연결 지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대입해 분석해보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갈 때쯤에는 투표 방식으로 그날의 MVP를 뽑기도 했다. MVP를 뽑는 과정에서 오고 가는 칭찬은 고래가 아닌 다 큰 어른들도 춤추게 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아이들과의 책 자랑 시간에 MVP 학생을 뽑아 밥도 사주고 함께 서점도 가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는데, 몇 번 하다 보니 그 이벤트마저도 아이들 사이에서 책 자랑의 묘한 서열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아이들을 상대할 때는 늘 예상치 못한 결과가 자주 생겨 여러모로 조심스럽다. 


      학교 수업에서 문해력을 기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훈련을 하면서 동시에 이런 독서 모임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말하기와 듣기, 쓰기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되리라 생각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네 영역의 핵심에는 읽기가 있다고 믿는다.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게 되고, 혼자 말할 수 없으니 남의 의견도 듣게 되고, 그러면서 정교화된 생각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많은 문장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밑줄도 긋다 보면 자기가 쓴 어색한 문장을 스스로 다듬을 줄도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진심으로 거기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그게 가능해지는 속도가 달라질 뿐이다.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참여할 수 있는 이런 모임들이 흔해질수록 어른이고 청소년이고 책으로 성장할 수 있다. 당장 입시 체계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짧은 학창 시절이 다 끝나기 전에 학교 밖에라도 다양한 성장의 기회가 더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런 기회가 생겨나려면 그런 기회의 가치를 경험하는 어른들도 늘어나야 한다. 유행처럼 늘어나는 서점들이 그 역할을 계속해서 맡아주려면 작은 서점들이 지속가능한 생존 방식을 찾을 수 있도록, 개업과 폐점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역 사회 차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무슨 지역 신문 칼럼같은 느낌이 들지만 애정하던 서점들이 사라질 때마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리는 것 같아서 그렇다. 요조 작가는 <아무튼, 떡볶이>에서 떡볶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맛없는 떡볶이집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나는 좋다. 대체로 모든 게 그렇다. 뭐가 되었든 그닥 훌륭하지 않더라도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으면 가능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사십 년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안심이다.’ 서점에 대한 내 마음도 그렇다. 나도 매일 자책하는 일 투성이면서 사십 년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데,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는 서점이라도 서점은 그 자체로 어디에서나 존재의 가치가 있다. 


독서 모임을 막 시작할 때 찍은 사진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만, 테이블을 포함해 회색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폐점한 곳.

    독서 모임을 끝내고 걸어나오는데 늦은 시간까지 넓은 공간 곳곳에 혼자 앉아 독서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퇴근하고 바로 온 건지 정장에 구두 차림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당시 논현동 북티크에는 심야서점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금요일 밤 10시에 시작해서 밤을 새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새벽 2시쯤에는 함께 밤을 새고 있는 사람들과 모여 한 시간 동안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밤샘 독서 프로그램이었다. 먹고 마실 곳이 즐비한 강남에, 너도나도 유흥으로 불타는 금요일에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밤을 새서 책을 읽는다니…….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튼, 서점(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