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과 나의 이야기
그런 독립서점들은 책을 사랑하는 주인이 직접 골라 주문한 책들로 개성 있는 큐레이션을 진행하곤 한다. 대형서점에서는 도서 검색대에서 미리 위치를 찾지 않고는 못 만날 보석 같은 책들도 발굴해 낸다. 출간된 지 한참 됐는데 아쉽게 묻힌 책이나, 새롭게 주목해야 할 신인 작가들의 책 또는 예상치 못한 매력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독립출판물까지 보물찾기하듯 한참을 둘러볼 재미가 있다. 그게 곧 독립서점의 강점이고, 잃지 말아야 할 정체성이다. 거대자본이 있는 회사나 큰 유통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악 사이트에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면서 마음에 꼭 드는 노래를 발견한 순간에는,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요즘 얼마나 잘 나가는 가수인지, 월간 인기 차트에 오른 적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밀스럽게 좋을 때도 있다. 노래를 찾느라 들인 검색 시간도 아깝지 않다. 독립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이와 비슷하다. 물론 독립서점이라고 해서 뚜렷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유명 작가들의 책이나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팔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책을 진열하는 이유가 단지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서’, ‘일단 들여오기만 하면 잘 팔릴 내용이라서’, ‘~문학상 수상작이라서’와 같은 단순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점 주인들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성향도 제각각이라서 내가 생각하는 독립서점의 성격에서 다소 벗어난 공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매력을 느낀 대부분의 독립서점들은 그랬다.
서교동에 있는 땡스북스는 이슬아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나게 해 준 곳이다. 요즘은 그녀가 굉장히 유명해져서 책과 관련된 각종 행사나 강연,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하는 셀럽이 되었지만, 내가 처음 알게 됐을 때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완전히 꽂힐 만한 새로운 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서점 이쪽저쪽을 빙글빙글 돌던 중 나를 사로잡은 책표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슬아의 <심신단련>이었다. 꼭 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써 놓은 광고성 문구나 그 흔한 띠지도 없었고, 쨍한 색감의 사진으로 덮인 앞표지에 책 제목과 출판사 이름만, 그것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흰색의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신선한 표지였다. 호기심에 앞표지 날개를 젖혀 작가소개 부분을 보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92년생 여자애(나보다 어려서 처음 본 순간엔 여자애라고 불렀다. 물론 마음 속으로) 사진과 이름 그것말고는 어떤 정보도 없는 게 끌렸다. 꼭 다물고 있는 빨간 입술에서 허세 없는 단단한 깡과 자기애, 선한 고집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 묘한 매력에 이끌려 책을 구입해 읽고는 무려 500쪽이 넘는 분량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 2018>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일간 이슬아’는 정기구독 신청을 한 독자들에게 매일 한 편의 글을 직접 메일로 발송하는 셀프 연재 프로젝트인데, 수필집을 읽는 동시에 따끈따끈한 그녀의 글을 이메일로 받아서 읽는 경험을 했다. 인스타그램은 열심히 들여다보면서도 책은 종이 넘기는 맛이 있어야지 전자책은 별로라던 모순적인 내가, 종이책 읽기와 함께 이메일 구독을 통한 디지털 글 읽기를 병행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깨끗한 존경> 순으로 그녀의 나머지 책들도 전부 읽어버렸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수필에서 만화로, 만화에서 서평으로, 서평에서 인터뷰 기록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확장되어가는 자신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되, <심신단련> 작가 프로필에 들어간 사진의 바로 그 무던한 표정과 은근한 힘으로 나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당겼다. 결코 요란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한번 붙잡히면 정신없이 끌려가게 되는 문장의 힘이 있었다. 동물권이나 인권, 대안교육, 페미니즘 등 그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주류’라고 불리는 세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읊조린다. 그녀를 통해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들을 확장해 나가는 동안 애정하는 작가를 만나게 해 준 땡스북스에 감사했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면서 동시에 책을 쓰는 ‘사람’을 소개해주는 곳이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는 어마어마한 일이며, 부서지기 쉽고 부서지기도 했을 그의 마음까지도 함께 오는 것이라고 했다. 책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는 것도 그런 종류의 일이다. 서점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다.
독립서점의 개성은 큐레이션 쪽지에서도 드러난다. 주인(또는 주인이 고용한 직원들)이 직접 작성한 큐레이션 쪽지를 나란히 붙여 놓은 책들을 보면, 단순히 책을 많이 ‘판매’하겠다는 의지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되어 흥미롭다. 책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을 소박하게 전달하면서도 스포일러를 넣거나 강요하지는 않는, 그런 사려 깊은 태도가 담긴 쪽지들이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꼭 처음부터 독립서점으로 출발한 서점에서만 큐레이션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동네 서점들도 예전처럼 책만 잔뜩 꽂아놓고 파는 게 아니라 지역의 특색이나 주인의 취향을 담은 큐레이션을 진행하면서 관광지처럼 유명해지는 경우도 많다. 속초에 있는 동아서점에 갔을 때, 이런 글귀가 담긴 큐레이션 쪽지를 본 적이 있다.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을 추천하는 쪽지였다.
은섭의 추천 도서2. <긴 호흡> 메리 올리버 저.
소박하고 힘 있는 시적 언어로 널리 사랑받는 메리 올리버 초기 산문집.
‘글을 쓰는 일은 개를 목욕시키는 일과 비슷하다. 너무 깨끗이 닦아내면 개의 특성이 사라질까봐 왕겨나 모래가 조금은 묻어 있길 바란다.’고 말하는 서문부터가 이미 매력적이다.
매끄럽기보다 모래와 왕겨를 택하는 자연의 목소리를 닮은 책.
간단한 정보와 함께 어떤 책인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넌지시’ 내어 놓으면서, ‘강추’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책을 매우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귀다. 순간, 내가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역할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