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pt 술(5) 창문을 열다

'든든한 안주와 함께하는 생맥주 500cc'가 가진 힘

by 김현승

그런 Y라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가장 큰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Y는 나를 위해 좋아하는 술을 안 마실 수 있지만, 내가 Y를 위해 못 먹는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배려의 시소가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으면, 시소 양 끝에 앉아 있는 서로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은 관계더라도 지루한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런 순간에는 열려 있던 문이 닫히고 다시 유리벽 양쪽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Y와의 만남이 나에게 매우 긍정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어떤 유리벽에는 특별한 인연의 이름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으므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술 없이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되는 건 멋진 일이다. 물론 모든 애주가들에게 그럴 필요는 없겠고, 쉬운 일도 아니다. Y와의 인연을 특별하다고 말한 이유도 절반 정도는 ‘희소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위해, 스스로 술 없이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되는 일은 자기 발전 차원에서도 꽤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늘 상대편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내 쪽에서도 아주 작지만 정성스럽게 창문을 하나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의 작은 창문은 든든한 안주와 함께하는 생맥주 500cc. 술 자체를 목적으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말 몇 마디만 나눠 봐도 대강 파악이 되므로 굳이 술자리에서 마주할 일도 없거니와, 그런 이의 눈에 나의 작은 창문 따위가 보일 리 없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보이는 창문은 아니지만, 무례하지 않게 문을 두드리는 상대방과는 더 가까이에서 목소리를 듣고 악수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창문이다. 왜 하필 ‘든든한’ 안주와 함께하는 ‘생’맥주이고, 양이 500cc인지에 대해서는, 나름의 연습 시간 동안 얻어낸 한계치다. 물론 이 연습의 성격은 ‘술은 원래 마시면서 느는 거’라고 했던 어떤 선배의 논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내가 알코올 분해를 못 하는 나의 피를 아슬아슬하게 속이는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술을 처음 입에 대기도 전부터 주량과 상관없이 친하게 지내던 몇몇 친구들과 첫 학교에서 얻은 보석같은 친구들 덕분에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는 차원의 연습이었다.


실험 결과, 일단 알코올 도수 자체가 맥주보다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피를 속일 가능성은 제로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더라도 안주가 부실하면 또 실패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식사 메뉴에 가까운 안주를 한 모금 분량의 맥주를 덮을 만큼 떠먹고 한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다가 또 한 모금 마시면 두 모금 분량의 맥주를 덮을 만큼 안주를 또 떠먹는다. 그리고 또 한참 이야기한다. 술이 마시는 건가 싶으면 금방 식사를 하는 이런 패턴으로 500cc까지는 간신히 피를 속일 수 있다. 굳이 ‘생’맥주라고 한 이유는, 보통 캔맥주를 마시면서 식사 메뉴에 가까운 안주를 곁들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생’맥주를 파는 곳에서는 대개 든든한 안주를 최대한 다양하게 만들어 판다. 결국, 돈이 많이 들고 살도 많이 찔 수밖에 없는 눈물겨운 방법인 데다가, ‘안주 킬러’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작지만 나름 ‘정성스럽게’ 만든 창문이다.


이제 나를 좀 아는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내 몫의 생맥주잔을 여러 번 부딪혀가며 오랫동안 안주와 함께 나누어 즐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주량이 늘지는 않지만, 대신 더운 날 온몸에 찌르르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생맥주의 시원함은 알게 됐다. 그 시원함이 종종 생각나기도 하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한다. 그 작은 창문 하나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과 새로운 관계를 선물해주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 신기했다. 그건 나를 이해해 줄 소중한 사람들에게 열어주는 창문일 뿐만 아니라, 낯선 여행지에서도 언제고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있는 창문이기도 하다. 또, 처음 만나 주량을 묻는 누군가에게 예전처럼 ‘저 술은 못해요.’하고 딱 잘라서 거절하지 않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생맥주 한 잔만 시켜주시면 됩니다.’하고 말한다. 그럼 다들 어색해하지 않고 씩 웃는다.


물론 지금도 술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가 ‘술’인 경우는 아쉬움 없이 일어나버리고, 주량 상관없이 자꾸 더 먹여 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정색해서 끊어버린다. 하지만 술로 만든 유리벽이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건 애석한 일이다. 아프더라도 반드시 끊어내야 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미련 없이 돌아서되, 그렇지 않으면 마주치는 인연들을 그저 곁에 둘러두면서 장점만 발견해 닮아가고 싶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만 아니면, 배울 만한 확실한 장점 하나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영향을 주고받아서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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