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pt 술(4)유리벽

"너란 인연을 잡으려면 술 안 마실래."

by 김현승

그런 인연들이 생겼더라도 나에게 술은 여전히 유리로 만든 벽과 같다. 처음 만난 사람과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유리벽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순간이 꼭 찾아왔다. 첫인상의 호감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공통점을 몇 개 발견할 즈음에, 만약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쪽에서 먼저 주량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해맑게 ‘술 한 잔 할까요?’ 또는 ‘술 좀 하시나요?’하고 묻는 얼굴에 ‘제가 술은 거의 못 해서요.’라고 말하면, 그들에게 어김없이 나타나는 공통적인 표정이 있다. 그들이 아무리 예의 바른 태도로 ‘아, 네…….’라고 대답하더라도, 딱 그 말줄임표만큼의 짧은 정적에서 순간적으로 보이는 아쉬움의 표정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더 깊은 얘기는 나누기 어렵겠구나.’ 또는 ‘놀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는 무언의 뉘앙스를 풍기는 표정. 그런 표정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으로 관계의 상한선을 만들곤 한다. 서로의 얼굴도 알아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한 유리벽이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이상한 심리적 거리감 말이다.


그 표정을 목격했던 처음 몇 번은 내가 괜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으로 하는 생각인가 싶었는데, 그런 느낌을 비교적 확실하게 받았던 사람들과는 내 쪽에서든 그쪽에서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술 없이 대화할 우연한 기회가 생겨 서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어느 순간 그쪽도 나도 이미 세워져 있던 유리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관계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나태주 시인이 풀꽃이든 사람이든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일단 오래 볼 수 있을 사람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하게, 유리벽 어딘가에서 여닫을 수 있는 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두 번째 학교로 발령받아 학교폭력 업무를 맡고 있을 때였다. 학교폭력 업무는 정해진 커리큘럼이나 예고된 시즌 없이 어느 때든 사건 하나가 발생하면 매뉴얼에 제시된 열 개 이상의 단계별 업무를 정해진 기간에 맞춰 진행해야 한다. 다른 학교에서 새로 발령받아 왔다고 신고식처럼 주어진 업무였다. 내 업무희망원과는 전혀 무관하게, 처음 맡게 된 업무였다. 하지만 매뉴얼을 제대로 익힐 새도 없이 개학식 첫날부터 강도 높은 폭력 사건 두 건이 동시에 터지더니, 한 건 겨우 처리하고 있으면 두세 건이 더 터지는 바람에 매일같이 밤 11시를 넘겨 퇴근해도 다음 날 업무가 줄지 않았다. 민원 발생의 소지를 줄여야 하는 업무담당자로서의 정체성과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이 충돌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사안 조사 내용 자체가 성인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는 동안에도 담임 업무와 두 개 학년 수업 준비까지 악착같이 병행하다가 어느 날엔가 퇴근 시간이 밤 12시를 넘겨버린 날에는, 깜깜한 학교 계단에서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러떨어지면 몇 달 쉴 수 있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모든 학교에는 전문상담교사가 상주하게 되어 있다. 전문상담교사는 일반학생 상담은 물론이고, 학교폭력 가해학생 및 학부모에 대한 특별교육과 피해학생 상담 치료까지 담당한다. 업무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니, 우리 학교 전문상담 선생님과도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 우연히 다른 선생님을 통해 그녀가 나와 또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마주칠 때마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 나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마저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지쳐 있었다. (편의상 그녀를 Y라고 해야겠다.) 나는 사안 하나를 처리할 때마다 그 내용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할 트라우마가 생기곤 했는데, Y는 도대체 그 많은 아이들의 이야기와 상처를 어떻게 다 감당하며 자기 삶을 지키는가 싶었다. 상담했던 학생 이야기를 할 때는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알 수 없던 아이의 속사정과 심리 상태를 전문적으로 파악해서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도, 업무처리 중에 비합리적인 부분이 보이면 단호하면서도 밉지 않은 말투로 정확히 이의 제기를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Y는 얼굴까지 예뻤다. 긴 흑발에 하얀 피부, 반짝반짝 빛나는 큰 눈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가끔 시원하게 웃는 소리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여자고, 남자만 사랑할 수 있는 이성애 취향임을 분명히 밝힌다.) 동료 교사들이 Y의 이름 앞에 Saint를 붙여 부를 정도로, 포용력이 바다 같으면서도 능력과 주관이 있는 선생님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또래에게 느낄 만한 그 흔한 질투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저 Y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그래서 한 번은 Y와 단둘이 업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전 학교에서는 비슷한 또래들끼리 사적으로 자주 모이곤 했었는데 여긴 그런 게 없나보다고 슬쩍 물었다. 그랬더니 그 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런 모임 너무 좋다고, 빨리 모이자고, 또래 선생님들 더 찾아보자고 엄청난 호응과 추진력을 보여주는 바람에 보름도 안 지나 나까지 네 명의 또래 모임이 생겼다. 합정역 근처 호프집에서 처음 모였고, 모임 장소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나 빼고 세 명이 모두 술을 꽤 즐길 줄 아는 또래들이란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자리는 빠지고 싶지 않았다. 학교폭력 업무 내용은 대부분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온전히 공유할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고, 일부러 계단에 굴러서라도 학교를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을 때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학교를 옮긴 뒤에는 또래 교사들끼리 사적 모임을 가진 것이 처음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다들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정도로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는 상태여서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 일은 물론이고 아주 사적인 얘기까지 꺼내면서 울다가, 웃다가, 놀라다가, 화내다가, 그렇게 넷은 금방 하나가 됐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을 보니, 맥주와 안주가 정신없이 비워졌다 채워졌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무의식중에도 술을 마시지는 않아서 내 잔에 있는 맥주만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서로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그들이 별 신경을 쓰지 않은 건지 술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스트레스가 확 풀리기는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쏟아내고 2차로 이어진 자리에서 나는 술과 관련된 나의 이야기까지 별 경계 없이 풀어놓았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음료수를 주문하기도 했다. 나머지 셋은 술만 있으면 밤새 이야기할 주량과 체력을 갖춘 인물들이라 그 뒤로 이어진 모임에서도 늘 내가 먼저 일어나곤 했지만, 그것도 딱히 눈치를 주거나,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놀다가 원할 때 일어나더라도 잘 들어갔냐고 연락까지 해주는 사려 깊은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일어나기 아쉬운, 나로서는 매우 신선한 경험을 하곤 했다.

그 모임 이후에 나는 Y와 종종 상담실에서 단둘이, 또는 메신저나 SNS 메시지로 사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곤 했다. Y는 이전 학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 상담을 하는 정해진 시간 동안 깊이 있게 몰입했다가 그 시간이 끝나면 빠르게 빠져나오는 연습을 계속했다고 했다. 수영장 바닥까지 빠르게 잠영으로 내려갔다가 정확한 시간에 빠르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 질식해서 위험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작은 상담실에 혼자 앉아 숱한 위험의 고비를 넘겼을 Y의 시간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리고 닮고 싶었다. Y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배려하지 못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까지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성격이었다.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빠르면서도, 자칫 오해하고 단정 짓지 않기 위해 궁금한 건 감추지 않고 질문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또래 친구 넷이 함께할 소소한 이벤트들을 챙기고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마음을 표현하는 감성소녀이기도 했다. 특히 Y는 그냥 술이든, 술자리든, 혼술이든 다 좋다고 술만 들어가면 그 예쁜 얼굴에 범접할 수 없는 생기가 흘러넘치곤 했다. 그래서 Y와 나 사이에도 분명 유리벽이 있었는데, 그 유리벽에는 Y가 드나들도록 허락해 준 문이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Y가 집에서 혼술을 하면서 맨정신인 나와 메시지로 술 얘기를 하던 중에, ‘너란 인연을 잡으려면 술 안 마실래’하는 뜬금없고 간지러운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과 그만큼의 속 이야기를 나누며 휴직 중에도 오래 연락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롤모델을 꼭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선배 교사들 중에서만 찾으란 법은 없으니 Y는 나의 롤모델이며 든든한 인연일 뿐만 아니라, 술과 관계에 대한 나의 닫힌 마음에도 작은 창문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준 인연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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