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에게 내어줄 시간과 노력은 없다
남은 대학 생활 동안 나는 술자리에 참석한 기억이 거의 없다. 술자리에 흥미 없는 선배가 학회장이어서 그랬는지, 내가 맡고 있던 학회에 새로 들어오겠다는 새내기들도 없었다. 다른 동기들은 술자리가 생길 때마다 ‘이거 마시면, 우리 소모임 들어오는 거다?’하는 낯간지러운 멘트를 동원해가며 새내기들을 자기가 소속된 소모임이나 학회로 끌어들이느라 바빴지만, 나는 정해진 홍보 자리 외에는 그다지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다섯 학번쯤 더 위로 올라가면 꽤 부흥했던 적도 있는 학회라던데, 사실 새내기 때 내가 학회에서 했던 모임들이 딱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없어서 홍보 콘텐츠 자체가 부족했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몇 명 남아 있던 선배들은 임용시험을 준비한다고 멀어지거나 군대를 가버리는 바람에, 학회를 다시 살리려면 내가 거의 유에서 무를 창조하듯이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모았어야 했다. 그러나 있으나 마나 하게 유지되던 학회를 다시 살려보겠다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엔 이미 학과 모임과 거기 이어지는 술자리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전혀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다. 과감히 학회를 없애 버리고 학생회와 이별했다. 학과 행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2학년이 된 동기들과 선배들에게는 또 다른 새내기 타깃이 생겼으므로, 굳이 불편한 티 팍팍 내고 앉아 있을 나를 붙잡을 리가 없었다.
학생회로부터 이별하면서부터, ‘음주 천국, 금주 지옥’에서도 탈출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에게도 진짜 대학 생활이 시작됐다. 어차피 캠퍼스 내에서 술자리로 이어지지 않는 타 동아리나 세미나는 종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모임을 찾기보다는 온전히 내 시간을 누릴 공간을 찾았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은 도서관 3층 DVD실이었다. 영화 사랑의 내력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줄곧 취미가 영화 감상이어서 각종 영화 잡지며 팜플렛들을 박스로 수집했던 시절이 있었다. 보지 않고는 못 배길 좋은 영화들은 넘쳐났지만, 입시 준비를 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감상하기를 미뤄둔 작품들을 하나씩 다시 떠올렸다. 영화관 스크린에 비하면 작은 화면에 음향 시설도 딱히 없는 검소한 공간이었지만, 1, 2인 좌석마다 양쪽에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혼자 영화에 몰입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적정 온도까지 유지해주면서 시간 날 때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보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는데, 그동안 나는 왜 여길 두고 맞지도 않던 술자리에서 버티느라 찌들었는지 어이가 없었다.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 연달아 보다가 기록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열람실에 앉아 끄적이기도 했고, 책장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이책 저책 바닥에 앉아 펼쳐보기도 했다. 소중한 공강 시간과 방과 후 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동안 마치 심폐소생술을 받은 것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어느 날은 지루한 수업을 못 참고 강의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혼자 독립영화관에서 기다리던 신작을 감상하는 짜릿함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술이 없어도 몇 시간씩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좁지만 깊은 관계들도 생겨났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느라 다시 골방에 틀어박히기 전까지, 보고 싶은 영화와 책을 마음껏 보고, 부담 없는 몇몇 친구들과 먹고, 떠들고, 여행하면서 그렇게 내 방식대로 대학 생활을 즐겼다.
술자리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교사가 되어 첫 학교에 발령을 받은 다음이었다. 첫 발령지는 지방 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였는데, 학교 규모가 워낙 크기도 했지만 교육과정 특성상 인문계 교과 교사들이 오래 근무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해서 매년 신규 교사가 10명 가까이 발령받는 학교였다. 타지에서 온 신규 교사들을 환영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마련된 술자리들은 대학교 술자리에서의 기억들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다만 당시 공직 사회에서 회식 자리의 술 강요 문화를 엄격히 금지하는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여자 교사들이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술은 잘 못 마셔요’ 한 마디면 재차 권하지 않고 마실 수 있는 사람들끼리 화기애애했다. 비율적으로 여자가 많은 직업인데다가 징계에 민감한 공무원 특성상 그런 문화가 일반 회사들보다 더 빨리 가능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술 강요 문화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취지에 제대로 공감해서라기보다는, 복무에 흠집을 낼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술 못하는 여자는 알아서 피하겠다는 태도라는 걸 감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주로 술을 권하는 부장 선생님들은 100% 남자 선생님들이었는데, 아마도 술 못하는 여자 교사들에게 술을 권하다가 벌어질 복잡한 문제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같이 취하지 않고 맨정신을 유지하는 여자들에게 실언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술 강요는 물론이고 성희롱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건너 듣기로는 번외편으로 벌어지는 남자 교사들끼리의 술자리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매년 새로운 교사들이 들어올 때마다 멤버만 조정해가며 꽤 오래 이어져 내려온 ‘남교사 모임’의 전통이라나. 거기선 다들 좀비가 되어 간혹 다음 날 아침에도 숙취에 시달리느라 1교시 수업을 교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음주 문화에 매우 관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수업 교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술 안 마신 사람이 술 마신 사람 대신 1교시 수업을 해야 하는 게 왜 당연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내가 교환해줘야 할 대상에는 나처럼 술을 못 마시는데 억지로 버틴 남자 동기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문장을 쓰면 교사들이 그래서 쓰겠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볼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일반 직장에서 회식 다음날 부서 인원이 한꺼번에 반차를 쓰고 늦게 출근하는 건 괜찮은 건지 묻고 싶다. 물론 모든 남자 부장님들이 그랬다는 건 절대 아니다. 술 못 마시는 여자 선생님들에게 함께 사이다로 건배하며 수업과 생활 지도 노하우를 두런두런 나누어 주셨던 선배 선생님들도 많았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상대가 술을 못 마시면 사이다로 건배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 유연함이 참 좋았다. 또 타지에서 자취하느라 고생한다며 직접 고기까지 구워주시며 술이 아니라 밥을 챙겨주신 아버지 같은 교감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그런 선생님들은 남교사 모임에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셨다. 내가 술자리를 거부하고 남은 대학 생활을 알차게 채웠던 것처럼 말이다.
발령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는 대학 때 동기 모임 술자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즈음에는 원하지 않는 술을 강요하는 동기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다. 정도가 심한 사람을 상대할 때는 무섭게 정색해서 어색해지더라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20대 중반이었지만, 나를 존중하지 않는 상대방을 위해 노력해 줄 시간과 에너지는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터득한 몇 안 되는 삶의 지혜였다. 그래서 첫 학교에서 떠날 때쯤에 곁에 남아 있는 인연은 더없이 소중했다. 나처럼 술을 안 마시는 친구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술을 아주 좋아하지만 남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즐거워 오래 앉아 있고 싶은 술자리를 만들어주는 그런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보석 같은 친구들 셋과 술 없이도 취한 것처럼 놀 수 있는 또다른 친구 셋, 인생 멘토가 되어 줄 선배 선생님 한 분. 그 일곱 명과의 인연이 학교를 떠날 때 얻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 선물 같은 인연은 지금도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나타나 늘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다. 아마 대학교 1학년 때처럼 원하지 않는 술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라 난감해하거나, 넓은 관계를 맺어보겠다고 불쾌한 자리 참아가며 돌아다녔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인연이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