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pt 술 (2)음주천국 금주지옥

그들만의 천국을 거부할 권리

by 김현승

새내기 생활의 절반은 술자리였고, 선배들은 행사 제목만 바뀌고 결국은 다 술자리인 모임을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들어가며 신입생들을 즐겁게 해주겠다고 의욕에 불타 있었다. MT 역시 마찬가지였다. MT는 Membership Training의 약자라는데, 정확히 말하면 Training 앞에 Alcohol이 숨어 있는 M(A)T에 가까웠다. 1-2MT, 1-3-4MT, 동기MT는 1, 2학년만 모여서 마시기, 2학년만 빼고 다 모여서 마시기, 동기들끼리 마시기였다. 총회나 토론, 워크숍 등의 명칭이 붙더라도 방점은 뒤풀이에 있었다. 한 학기에 서너 번 정도는 교수님들도 함께하는 술자리도 있었다. 대학 생활의 팔 할은 술자리인 것 같았다. 알콜 분해 능력이 없는 피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술자리를 피하는 것은 대학 생활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한 학번에 마흔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과에서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가 아니라 ‘든 자리, 난 자리 전부 안다’였기 때문에 감히 불참 선언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술로 취할 줄 아는, 아니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술맛뿐만 아니라 술자리의 맛도 즐길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술이든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초고수는 물론이거니와, 건배 주기와 상관없이 대략 세 시간 이상은 너끈히 쓰러지지 않고 버틸 만한 주량 컨트롤의 고수는 유흥을 즐길 가장 적절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다. 술의 종류에 따라 주량 기복이 심하지만 원하는 술로 적절히 취기가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중수에게도 술자리는 유흥을 위해 피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주량이 얼마 안 돼서 여운이 긴 술버릇을 고치지 못하거나 자주 필름이 끊겨 안쓰러운 하수는 금주 선언을 반복하면서도 희한하게 술자리마다 끈질기게 나타난다. 남다른 흥으로 술게임과 쏘맥쇼를 도맡아 할 수 있는 능력을 탑재하거나, 별 것 아닌 가십거리에도 간이 딱 맞는 양념을 칠 수 있는 입담까지 탑재하면 주량과 상관없이 언제나 환영받는 술자리의 연예인에 다름없다.


그러나 한 잔 들기도 전에 이미 온몸에 혈관이 쪼그라들 듯 긴장하는 사람에게 술자리는 결코 유흥의 공간일 수 없다. 오리엔테이션 사건 이후로 술을 강요하는 선배가 많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 사건을 모르는 뉴페이스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구구절절 왜 술을 안 마시는지 매번 설명하거나 설명 당해야 하는 순간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종종 그런 말을 들은 선배들은 자기도 원래 그랬었는데 그냥 마시다보니까 주량이 늘더라는 얘기를 무슨 사춘기 성장담처럼 늘어놓으면서, 가득 채운 술잔으로 후배의 주량을 늘려주겠다는 위험한 장난을 쳤다. 또 어떤 선배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데 한 번도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누군가의 일화를 마치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의 표본인 양 몇 번이고 들려주면서 자기랑 4차까지 가자고 억지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중간에 몰래 사라질 타이밍을 엿보느라 술 마실 때보다 더 긴장해야 했다. 적당한 때 빠지지 못하면 혼자 맨정신으로 좀비들 여럿을 상대해야 하는 피곤하고도 난감한 순간을 경험해야 할 것이 뻔했다. 하루는 선배가 천천히 마시면서 건배도 하고 즐기라면서 소주잔에 맥주를 부어준 적이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가 무색투명한 잔이 아니면 건배할 맛이 안 난다고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그 머리 위에 잔을 부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기성세대의 부조리함과 나약함에 대해 비판하고, 소수 약자들의 인권 문제나 교내 성희롱 사건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하루 걸러 한 번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술 안 마시겠다는 후배의 인권은 사뿐히 즈려밟고 가셨다.

늘 그런 짖궂은 선배들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 어느 때 그런 순간을 맞닥뜨려야 할지 모르니 앉아 있는 일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꼭 그런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술자리가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직접 취해서 어울릴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확률이 높지만, 두려움 버텨가며 참석했던 술자리를 통해 얻은 건 몇몇 교수님들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뒷얘기와 삼각, 사각으로 벌어지는 연애 관계에 관한 소문들, 시시때때로 놀려 먹을만한 진상 술버릇 정도였다. 더구나 술자리에서 한 실수는 맨정신이라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더라도 같이 술 마신 사람들에게는 그들 간의 알량한 연대감을 더 끈적하게 만들어주는 물풀처럼 생각하고 넘어가버리는 모습도 이상하고 불편했다. 꼭 필요하게 얻어야 할 정보가 있다면 술자리에 가지 않아도 맨정신에서 믿을 만한 선배한테 따로 예의를 갖춰 물어보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아니라 그야말로 ‘음주 천국, 금주 지옥’이었던 새내기 생활 1년이 지나고, 드디어 후배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작은 학회를 하나 맡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학생회 소속이 되어버렸다. 후배들과의 행사를 준비하는 건 2학년 학생회의 역할이었는데, 학회자으로서 맡겨진 역할이 있어 행사 준비에서 빠질 수 없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행사 후에 후배들과 빙 둘러앉아 함께 취하는 뒤풀이가 이어졌다. 새내기 때 겪은 오리엔테이션에서처럼 선후배가 번갈아 가며 앉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동기들은 술로 후배들을 저격할 생각에 설레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유일하게 내 술자리 고민을 잘 알고 있던 동기 하나가 후배들 몰래 빈 소주병에 물을 채워 넣더니 나를 자기 옆에 앉혔다. 그러고는 내가 게임에 걸리거나 몇몇 당돌한 후배에게 지목당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그 소주병으로 내 잔을 채웠다. 몇 번 잔을 마시면서 머리가 복잡했다. 그 소주병으로 자리를 지키는 건 나를 비아냥거리던 선배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도 일 년 전 나처럼 못 마시는 술을 받아 들고 발간 얼굴로 앉아 있는 후배들이 보였다. 그때 대학 생활에서 더는 그런 술자리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돌아오지 않을 20대를 더는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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