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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an 15. 2023

어떤 지적인 동네 형과 따뜻한 수다를 떠는 시간

허지웅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 함께 잘 살아봅시다


  그는 전작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 아프기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조금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는 달라졌다. <최소한의 이웃> 1부에서 그는 사랑이 '두 사람의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삶만큼 넓어지는 일'(49쪽)이라고 했다. 그 말을 이렇게 바꿔본다. 그는 아프기 전에 살아냈던 삶과 아프고 나서 얻은 새로운 삶, 두 삶만큼 넓어졌다. 


  그는 방대한 양의 책과 영화를 재료로 지적 사유를 거듭하면서, 우리를 때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인간관계나 비겁한 인간 심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사건들을 여럿 다룬다. 이미 알려진 사건들이라도 사건들 이면에 담긴 의미나 진실, 근본적인 원인을 자기만의 시각과 방법으로 캐내어 길지 않은 문장으로 정돈한다. 애매모호하거나 지적 허영을 떠는 일 없이 명쾌하고 솔직한 허지웅 문장의 매력 그대로다. 다만 이번에는 라디오DJ 웅디의 오프닝 목소리로 음성지원되는 구어체에, 모든 꼭지의 글들이 함께 잘 살자는 따뜻한 메시지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좀 다르다. 물론 정신 차리라는 메시지도 더러 있다. 


  온통 적으로 둘러쌓인 세상에서 안간힘을 다해 버티면서, 그 적을 '친애하는 적'이라 부르며 애써 분노를 삭히는 법에 관하여 말하던(<버티는 법에 관하여>,<나의 친애하는 적>) 그가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는 그저 버티거나 참지 말고 '반드시 잘 살아냅시다!'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 말고 함께 잘 살아냅시다!' 따뜻한 구어체로 외치면서, 적군이든 아군이든 나누지 말고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이 되어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최소한의' 이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이미 서로에게 '최대한의' 이웃이 될 여유나 인성은 갖추기 어려움을 체념하듯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함께 살기가 점점 더 어렵고 무서워지는 세상에서 그가 말하는 '최소한이 이웃'은 <버티는 삶에 관하며>나 <친애하는 적>에 종종 등장하는 '좋은 어른'의 모습이 더 구체화된 버전이다. 나의 아픔의 단 10분의 1이라도 다른 이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 결국 공감이 기본이다.


  사실 1부 앞부분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연달아 이어지는 바람에 다소 당황했다. 이전 책까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진 그의 어조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미워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함께 따뜻한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는 그의 메시지가 도덕 교과서의 식상한 문장이나 어느 꼰대의 가식으로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살아낸 지난 삶에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들여다 본 것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가 좌절과 실망을 안겨준 어른들 틈에서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악착같이 버텨온 시간의 흔적들이 이번 책에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힘을 더해준다.

그가 방송에 복귀하기 전, 유튜브에서 일반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던 <허지웅답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보고 들었다. 병마와 싸우고 회복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사람의 아픈 삶에 몰입해서 공감하고 같이 고민하는 그 고단한 일을 자청했는지 놀랍기도 하고 오지랖 넓게 걱정스럽기도 했다. <최소한의 이웃>을 다 읽고 덮으면서, 도무지 출구가 없어보이는 어마무시한 고민들에 하나하나 진심으로 답변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진심은 미디어를 통해 만난 사람들에게도 전해진다. 


이웃은 성별이나 정체성, 겉모습과 가치관, 너의 편과 나의 편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103쪽)
당연한 것들을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오로지 명쾌한 것만이 진실이라 여겼으나 더 이상 진실이 명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그건 아마 노화의 신호가 아니라 지혜로움의 상징이 아닐까. (176-177쪽)
때로 불경하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회색지대를 바라보는 일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대안과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 언제나 저 불편한 회색지대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회색지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위기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266쪽)
정의와 상식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를 믿어선 안 됩니다. 오직 정의와 상식을 고민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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