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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an 15. 2023

악의가 없어도 상처를 남기는 어떤 관계들

서유미 장편소설 <끝의 시작>, 자기 안의 상처를 직시할 용기에 대하여

(스포일러 주의)

벚꽃이 짧게 피고 지는 4월 한 달 동안 영무와 여진, 소정이 겪는 관계의 끝, 이별의 과정을 보여준다. 벚꽃이 만발해 온 세상이 꽃에 취해 들떠 있는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삶은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셋과 얽혀 있는 다른 인물들까지 포함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에는 그 어떤 악의도 없다. 다들 그럴 만한 사연을 품고 안쓰럽지만 안간힘을 다해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나 각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상처가 서로의 선의와 진심을 외면하며 또 다른 상처를 주고 받기에 충분하다. 더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관계의 끝을 선언하기도 하고,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또 다른 상실감에 공허해한다.


  영무는 어릴 적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평생을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살아간다.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 있던 청산가리 약병을 서랍 속에, 주머니 속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지 못한 채 익숙한 어둠 속으로 자꾸만 기어들어갈 뿐이다. 그는 아버지를 스스로 죽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자살한 남편에 대한 주변의 불편한 오지랖으로 엄마와 어린 아들을 더 괴롭게 만드는 원망스러운 세상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날 가방 속에 소중히 넣어가지고 왔다가 꺼내보지도 못한 상장처럼, 정상적인 애착 관계로 이어진 가정을 꾸리는 것은 그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만큼 어렵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오랜 괴로움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  


  그런 영무의 아내 여진은 도무지 감정의 곁을 주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으면서도 새 생명을 품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키운다. 아이와 함께라면 어쩌면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진짜 행복을 기대해볼 수 있을 거란 희미한 희망이 뱃속의 새 생명과 함께 커지지만, 갑작스러운 유산은 그녀의 삶을 짙은 허무로 떨어뜨린다. 다시는 당차고 활력 있던 커리어 우먼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결국 영무와의 이혼을 선언하지만 시어머니의 시한부로 이혼도 유예된다. 한 번도 제대로 애정을 표현한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밀어붙인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알면서도, 남편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은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다. 집이 아닌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잘 알지 못하는 어린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뻥 뚫린 공허한 가슴에 결코 채워지지 않을 바람을 마구 불어넣을 뿐이다. 


  소정은 아버지의 긴 투병으로 가난에 절여지다시피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방황을 거듭하다가 결국 연락을 끊어버린 남동생에게 누나로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지만, 당장 월급이 끊기지 않으려면 불안정한 단기 일자리로라도 근근히 버텨야하는 현실에서 그런 죄책감 역시 때로는 사치다. 그러다 검소해 보이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친구 진수를 만나면서, 소정은 자기도 모르게 안정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 없이 부모님께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그와 결혼하면, 가난의 냄새가 짙게 배어버린 자신의 몸에서도 안정적인 사랑의 향기가 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검소해 보이는' 소정에게 끌린 진수는 '검소할 수밖에 없는' 소정을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 소정이 처한 현실과 거기서 자신을 지키며 버텨온 소정의 그 끈기에 대해 머리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진수가 딛고 자란 땅은 소정의 그것에 비해 너무도 기름지고 향기롭다. 진수는 척박한 땅에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소정이 아니라 , 천진난만한 싱그러움으로 벚꽃축제를 '함께' 즐길 여자친구가 필요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진수를 비난하기엔 소정이 너무 비참하다.


  어떤 트라우마는 그 주인의 삶만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관계 맺는 이들의 삶에도 전염되듯 스며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관계를 도저히 지속할 수 없도록 망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이 '끝의 시작'인 이유는 영무도, 여진도, 소정도 관계의 끝에서 자신의 상처를 분명히 마주했다는 것에 있다. 관계가 끝난 이유를 자기 안에서 분명하게 찾는 것, 어느 지점이 문제였는지 후회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것, 그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소설은 '4월이 끝나고 5월이 시작됐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거짓말처럼 그들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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