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환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연달아 소설을 몇 권 읽다가 에세이를 읽으니, 한참 혼자 영화보고 드라마보고 하다가 다시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전혀 다른 분야의 누군가의 삶의 여정과, 그가 거기서 얻은 작은 삶의 지혜들을 읽어내려가는 시간은 몰입도 높은 스펙타클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 훨씬 힐링이 될 때가 있다.
사실 전종환 아나운서에 대해 잘 알아서 그의 책을 읽게 된 건 아니다. 문지애 아나운서가 세운 그림책 학교에 관심이 있어 그 일상을 들여다보다가 자연스럽게 남편 전종환 아나운서도 책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출간 직후 그가 한창 북토크를 할 때도 큰 관심은 없었는데 자꾸만 책 제목이 떠올라서 결국 펼치게 됐다. 서로 눈에 띄어보겠다고 화려한 책표지를 두르고 진열돼 있는 에세이들 틈에서 눈에 잘 띄지도 않을 흐린 색상의 표지에 흑백사진같은 그림 하나를 걸어놓고 제목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이라니. 감성 돋는 사진으로 잘난 척하거나 간지러운 문장들만 늘어놓으며 많이 팔리는 에세이를 써보겠다는 욕심 따위엔 전혀 관심없어 보이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표지를 넘기며 예상했던대로 앞부분에서부터 그는 그 어렵다는 아나운서 시험을 합격하고도 혹독한 열등감의 시절을 겪어내야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안타깝고 짠할 정도로 솔직하게 고백했다. 응급실에 실려가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큰 수술을 하면서도 회사에 안가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낄만큼 지옥같았다는 그의 신입 아나운서 시절 이야기와 자발적으로 보도국 기자 신입이 되어 겪은 더 짠한 이야기들까지.
그렇지만 그렇게 짠하면서도 그가 고군분투해 온 과정에는 아무리 열등감이 극에 달하는 어떤 불안한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뚝심과 자존심이 있다. 신입 아나운서 시절, 그가 형과 나눈 대화를 적어놓은 부분이 있다. 형이 그에게 너는 기본기가 부족하지 않은데 자존감이 부족해서 독한 승부욕이 없다고 하자, 그는 늘 진취적으로 앞서가는 형에 비해 일찌감치 실패와 포기에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1등하다가 2등해서 잠이 안오는 승부욕 강한 사람보다는 20등하고도 잘 잘 수 있는 사람의 자존감이 '높지는 않아도 훨씬 단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존감은 높낮이보다도 어떤 자극과 불안에도 쉽게 깨어지지 않는 밀도, 단단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그는 어떤 방황의 순간에 심하게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깨지지는 않을 딴딴한 자존감이 무기인 사람이다. 그래서 남을 이기고 올라서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당장 자신에게 부족한 건 무엇이고 그건 어떻게 채워야하나 고민하고 노력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그런 점을 드러내보이거나 깨달은 점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의 이야기들을 길지 않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짧은 일화들로 엮어 늘어놓을 뿐이다.
20대 때는 높고 먼 얘기들이 좋았다. 역사와 진보, 정의, 자유, 민주, 이런 개념들 말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아무래도 덜하다. 부조리에 저항하고 나름의 윤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데 그리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제법 알게 됐기 때문이다. 주워들은 개념과 지식으로 부풀려진 생각과 말은 허망하기 쉽고, 그런 허깨비 같은 개념은 좀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행동하는 사람들의 말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사는 데 지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늙은 건가?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나. (174쪽)
혹독한 아나운서 신입 시절을 거쳐 보도국 기자로서 취재 경험을 쌓고 다시 아나운서로 돌아온 그는 이제 아들 범민이와 함께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 여전히 맡은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상은 치열하지만, 더이상 '나는 왜 20등 하고도 잘 잘 수 있는 사람인가' 자괴감이 들거나 방황하지는 않는, 더 잘 자고 잘 먹고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잘 웃는 것이 1등을 하는 것보다 행복해보인다.
살면서 이기고 지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기더라도 잘 이기는 것, 지더라도 잘 지는 것을 아는 사람만 자기 스스로를 끝내 망치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가 지나친 승부욕과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롭게,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