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선 에세이 <내밀 예찬>, 현명한 내향인의 자발적 거리두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흔한 일이지만, 읽으려고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잊은 채 다른 책방에서 같은 책을 골라 또 사왔다. 요즘은 난이도가 훌쩍 높아진 육아로 멘탈이 털려서 그러려니 싶었다가, <내밀예찬>이라는 제목과 단정한 디자인의 표지,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를 두 번이나 끌어당길 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필요에 따라 서툴게 E인 척하기도 하지만 그런 일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는 I형 인간이다. 그런 나의 성향을 분명히 파악하고 부끄러움 없이 스스로를 존중하게 된 건 30대가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20대에는 어쩐지 I로 사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20대'라는 단어 자체의 뜨거움과 싱그러움 때문인지 어쩐지 E가 아니면 인생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답답한 변두리 인간 같아서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확실히 안다. 변두리에 있어야만 에너지가 차오르며, 굳이 여러 사람들과 에너지를 함께 뿜어대지 않고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I가 E인 척, E가 I인 척해야 하는 가면의 시간은 모두를 피곤에 찌들게 할 뿐이다. 코로나 시대는 많은 이들의 생업을 고단하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했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모임에 긴 시간 의무적으로 앉아있다가 존중과 배려라고는 모르는 일부 무례한 E들에게 상처 입는 피해자 I들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내향인들이 감염병과 E중심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공간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어떤 경우엔 죽지 않을 만큼만 심하게 앓더라도 며칠 격리되고 싶다는 말을 꽤 여러 번 들어보기도 했다.
이 책은 내향인으로서의 작가가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생활과 육아를 하며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물리적 시공간을 확보하는 일 또는 적어도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에 대하여 쓰고 있다. 완전히 신선한 내용으로 독자를 깨닫게 하는 종류의 책이라기보다는 내향인으로서 살아온 작가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명쾌하고 단호하게 이어지면서도 고지식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아서 좋다. 내향인의 관점에서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며 새롭게 얻은 생각들도 포함한다. 작가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나 신념들은 꼭 내향인이 아니더라도 가슴 속에 움켜쥐고 있을 만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수십 개의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표시했는데, 아래 문장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이 책을 만나기 전 매일 열 줄 내외의 짧은 글을 쓰는 미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내가 쓴 문장과 거의 80프로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수많은 책 속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비슷하게 표현한 작가를 만나는 일은, 낯설고 피곤한 해외여행 중 반가운 한국인을 만나는 느낌.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에게만 의미 있는 자잘한 성과와 실패가 있으며, 그에 따르는 만족감과 아쉬움이 있다면 매일 똑같아 보이는 하루도 스스로에게는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의 드라마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보다는 아주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의 결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