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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an 15. 2023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모인다

임경선 소설 <호텔 이야기>, 같은 공간에 머문 이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


  임경선 작가의 신간 제목이 <호텔 이야기>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이전 에세이 어딘가에서 그녀가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기 전 호텔에서 일했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호텔의 방문객 뿐만 아니라 한때 직원으로서 그 안과 밖, 겉과 속을 훤히 알고 있을 그녀가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낼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불특정 다수가 머물다 떠나는 공간에는 늘 이야기가 쌓인다. <호텔 이야기>에는 서울 남산 둘레길에 있는 5성급 호텔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별한 역사와 분위기를 가진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이들의 이야기, 그들 각자가 속한 세상의 이야기는 서로 전혀 다르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든 등장인물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호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좌절과 허무, 권태, 불안과 트라우마, 허락되지 않은 관계에 대한 욕망, 가식과 수치스러움같은 것들을 애써 눌러삼키며 살아간다. 영화 <더 테이블>에서 하루종일 한 카페의 창가석 테이블에 머물다가 떠나는 네 쌍의 인연들이 품은 사연이 하나같이 달지 않았던 것처럼. 공간은 그렇게 그들의 삶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영화가 끝나면 철거되는 세트장처럼 때때로 소멸해버리지만, 이야기가 쌓인 공간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인공 남녀가 밤새 돌아다니며 웃고 사랑을 나누었던 빈 자리들을 차례로 조용히 비춰준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그라프 호텔의 전경을 바라보면 아마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임경선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는, 놓치고 지나가기 쉬운 어떤 찰나의 감정이나 분위기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구체적이고도 과하지 않은 언어로 떠올리는 문장들을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호텔을 찾은 주인공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광활한 로비의 카펫을 천천히 꾹꾹 밟으며 두리는 과거의 영광과 자존심은 여전히 포기 못 하면서도 이제는 끝을 받아들인 자들이 가지는 어떤 숙연한 공기를 감지했다.(22쪽) 

이 문장은 고미술상 오너에 의해 영업 이익과는 거리가 먼 다소 특별한 철학으로 세워졌지만 변질되는 것보단 사라지는 게 낫다는 더 특별한 철학으로 문을 닫게 된 호텔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물간 여자, 한물간 영화감독이 되어감에 대해 생각하며 수영장 바닥까지 깊이 잠수하는 주인공 여자에 대한 것으로도 읽힌다. 여자는 결국 수영장 바닥을 박차고 수면 위로 올라가듯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호텔을 떠나며 인생의 남은 불씨를 있는대로 끌어모아 잊고 있던 열정에 새 불을 지핀다. 변질되느니 사라지는 게 낫다는 호텔 오너의 철학처럼 여자는 처음의 열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런 저런 타협을 하며 괴로워하느니 사라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변질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첫 번째 이야기 <호텔에서 한 달 살기>는 그래서 가장 그라프 호텔과 닮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프랑스 소설처럼>은 소설 속 한 장면처럼 호텔에서 밀회를 나누는 어떤 부부의 작은 일탈에 대하여, <하우스 키핑>은 스스로를 성인ADHD라 진단한 여자의 안전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하여, <야간 근무>는 다리를 저는 것 외에 부족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여인의 참을 수 없는 권태와 그녀를 사랑한 청년의 슬픔에 대하여,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기브앤테이크'로 얽힌 가식적인 관계에 대한 염증과 허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아 단체관광객도 받지 않고 식당도 메인다이닝 하나만 둔 그라프 호텔 설립자의 고집스러운 마인드는 어쩐지 다섯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와 비슷하다. <프랑스 소설처럼>에서 아무리 더워도 택시는 타지 않는 고지식한 남자나, <하우스키핑>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정해진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며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 안정을 누리는 정현도 그렇다. <야간근무>에서 시를 읊고 전시를 보며 나이를 뛰어넘는 감정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동주와 상아는 관계가 변질되기 전 이별을 택했으며, <초대받지 못한 사람>에서 주류 연예인들로부터 겉도는 상우 역시 주류 호텔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그라프 호텔과 비슷한 면이 있다. 


  호텔이 사라지고나서도 그들의 삶은 어떻게든 흘러가겠지만, 그라프에 머물던 한 조각의 시절들이 아름다운 건 그들이 휘청거리는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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