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3박 4일 홋카이도 여행기[1]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를 처음 본 건, 중학교 3학년 여름 어느 주말이었다. 너무 더워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여름 끝날 때까지 안 나오고 싶다고 생각하던 즈음, TV 화면에 눈 덮인 하얀 들판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청순하다는 단어는 아마 저런 여자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냘프고 창백한 얼굴을 한 여자가 살짝 움츠린 마른 어깨를 담요로 감싸고 눈 덮인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자의 두 눈에는 눈물이 촉촉하게 차 올라서, 하얀 눈에 반사된 아침 햇살이 눈물에 다시 한 번 반사돼 더 신비로워 보였다. '출발, 비디오 여행'하고 비슷한 어떤 영화 프로그램에서 영화 <러브레터>를 소개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힌 사연이 궁금하기보다는, 그저 너무 더워서, 눈만 잔뜩 나오는, 보기만 해도 추워지는 그런 영화가 보고 싶어서 동네 dvd 대여점에 가서 당장 <러브레터>를 빌려왔다. 두 시간 가까이 겨울 풍경은 실컷 본 것 같았는데, 내용에는 딱히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빨리 겨울이 됐으면 좋겠다, 정도의 심드렁한 감상이 전부였다.
그리고 시간이 한 15년쯤 흘러 우연히 그 영화가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그 가냘픈 여자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멋진 설경을 대형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그 여자의 사연이 홋카이도의 설경과 가슴 저릿하게 조화를 이루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유증이 꽤 오래갔던 것 같다. 여자에게 몰입해본다면, 사연은 대강 이렇다. '죽은 전 남친은 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 나와 똑같이 닮은 여자였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 죽은 그를 잊을 수 없어 마음 아파하는데, 그래서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죄책감이 드는데, 나는 결국 못다 이룬 그의 첫사랑을 대신한 여자에 불과했던 건가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정말 그것뿐이었냐고 그의 어깨를 붙잡고 힘껏 흔들어대며 다그치며 따져 묻고 싶지만 이미 그는 이 세상에 없다.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뒤덮어버린 홋카이도의 눈처럼, 사랑과 억울함과 분노와 서글픔과 확인할 수 없는 답답함까지 그 응어리진 감정은 이제 그저 덮어야만 한다.' '오갱끼데스까-'하고 외치던 그 격정적인 목소리에는 그러니까, 단지 그리움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학생 나이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명대사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죽음으로 이별한 전 남친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낱 신파에 머물 수 있었던 사연에 그토록 신비로운 후광을 만들어주었던 홋카이도의 겨울이 궁금해졌다. 나의 이야기에도 어떤 새로운 후광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낭만적인 그 감성에 못 이겨 나는 무작정 홋카이도행 비행기 티켓을 지르고 말았다. 영화든, 사람이든 만나는 시기와 방법이 아주 중요하다.
2018년 1월 어느 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홋카이도는 정말로 온통 하얀색이었다. 드문드문 나뭇가지가 삐쳐 나와 있고 눈 사이로 가늘게 나 있는 도로 위에서 작은 자동차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느릿한 흰색 감성에 젖어 착륙하기 전까지 또 한참동안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삿포로 역까지는 JR쾌속 열차로 37분. 무사히 열차를 타고 앉아 다시 창밖의 눈 풍경에 빠져들어볼까 심호흡을 할 때쯤, 공항 바로 다음 역인 미나미 치토세 역에 열차가 멈춰서더니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기억나는 일본어라곤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와 이따다키마쓰(잘먹겠습니다)─나는 초밥 마니아였으니까─ 이 두 문장 정도가 전부였는데, 열차 방송에서 일본어 문장이 꽤 길게 여러 번 지나갔다. 오른쪽 귀 위쪽으로 큰 물음표 풍선을 띄워 놓고, 얼른 주위를 살폈다. 일어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찡그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들 평온한 것을 보니, 그저 조금 기다리라는 얘기겠거니, 했다. 그리고 30분이 흘렀다. 처음에 들렸던 안내 방송만 한 다섯 번쯤 들린 것 같다.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무심한 척 또 기다렸다. 다시 30분이 흘렀다. 나와 동행한 친구는 오른쪽 팔을 쭉 펴고 파파고 어플을 켜서 방송이 나오는 스피커에 가져다 댔다. 파파고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열차 안에서 나와 내 친구 딱 둘만 두리번 두리번, 안절부절못하고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열차가 멈춰 선지 1시간 20분 만에 역무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한 분 지나가길래 드디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제 출발하냐는 우리의 물음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만국 공통의 바디랭귀지를 보이며 무심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자를 주루룩 넘기더니 어떤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졸라맨이 기찻길 위로 슈퍼맨처럼 팔을 벌리고 있었고, 한국말로 ‘투신자살’이라는 단어가 써 있었다. 아저씨는 길게 또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그저 언제 수습될지 알 수 없으니 나가서 버스를 타든 기다리든 알아서 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둘 다 잠시 멍 때리고 섰다가 결국 각자 캐리어를 끌고 열차 밖으로 나왔다. 열차가 멈추고 한 시간이 넘게 흘렀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열차에서 우리만 내리고 있는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3박 4일의 짧은 일정 중 소중한 하루를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열차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매표소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 열차를 타려고 역에 왔던 사람들도 대합실에서 참으로 얌전한 태도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기 좀 이상해', '우리가 이상한 거야?' 소리만 반복하면서 낑낑대고 캐리어를 옮기는 우리를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항에서 고작 한 정거장 이동했으니, 역 바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눈 덮인 풍경을 감상하고 있기엔, 삿포로 역까지 갈 일이 걱정이었다. 구글 지도는 분명 우리에게 미나미 치토세 역을 지나 삿포로 역까지 가는 공항버스가 곧 온다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사람 하나 없는 이런 눈밭의 정류장에서 우리를 태워 갈 공항버스가 지나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막막한 마음에 역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열차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도 나오지 않고 고요했다. 이미 점심 때가 지나 배는 고프고, 몸은 춥고, 마음은 불안하니 눈은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도착하자마자 열차 '투신자살'이라니, 아무래도 홋카이도는 나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고작 영화 한 편 보고 느낀 오그라드는 감성으로 홋카이도에 찾아오다니, 크게 잘못 생각한거야, 고생길이 훤하네, 하며 싸늘히 등을 돌린 홋카이도가 미워졌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런 게 자유여행의 매력이지, 쿨하게 생각하며 내가 언제 일본 눈밭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어 보겠냐는 초긍정의 마인드로 셀카도 찍어보고, 눈 말고 아무것도 없는 풍경 사진도 찍었다. 몇 장 찍고 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더 커진 것 같아 민망해질때쯤, 멀리서 버스가 한 대 보였다. 역시 구글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구글 지도와 함께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크게 환호한 후 버스가 행여 우리를 못 보고 지나칠까봐 주춤주춤 캐리어를 끌고 버스 탈 거라고 온 몸으로 티 내며 서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마주쳤다. 그런데, 지나갔다. 그냥 지나갔다. 버스는 차갑게 멀어졌고, 이내 사라졌다. 아까부터 오른쪽 귀 옆에 떠다니던 물음표가 더 커졌다. 구글 지도의 버스 도착 시간은 순식간에 '17분 후'로 바뀌었다. 맙소사, 17분 후에 오는 버스도 또 지나가버리면 그땐 다시 역으로 돌아가야 하나? 버스가 보여야 할 도로 끝과 멈춰 선 열차 쪽을 번갈아 바라보기를 수십 번, 다시 5분쯤 지났는데 버스 한 대가 또 왔다. 이번엔 힘껏 한쪽 팔을 휘둘렀다. 절대 못 보고 지나칠 수 없게. 그리고 버스가 멈춰섰다. 그래, 구글이 매번 정확한 건 아닐 거야, 하는 마음으로 기사 아저씨(아니, 나잇대가 오빠였던 것 같기도 하다)를 보니 인상이 아주 좋아 보였다. 심지어 기사 아저씨는 버스에서 내려 우리 캐리어를 버스 짐칸에 옮겨주려는 것 같았다. 내 캐리어를 양손으로 번쩍 드는 아저씨를 보며, 이제 살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삿포로 역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다시 캐리어를 내려놓으셨다. 그러고는 삿포로 역 가는 버스는 뒤에 또 올 거니까 더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히터가 참 따뜻할 것 같은 버스 안의 승객들이 추워서 볼이 빨개진 우리를 얼마나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지, 캐리어 뒤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도 인상 좋고 영어 잘 하는 기사 아저씨 덕분에 다음 버스 기다리는 17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구글이 예상했던 시간에 거의 정확히 맞춰 버스가 또 한 대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이번엔 탈 수 있겠지. 양손을 휘둘렀다. 버스가 멈췄는데, 기사 아저씨는 내리지 않은 채 문만 열고 만석이라 자리가 없다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또 다음 차를 기다리란다. 열차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온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열차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다. 앞에도 눈, 뒤에도 눈. 저 멀리 뒤에는 멈춰 선 열차와 이상하게 조용한 사람들. 이번 여행,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