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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

by 토끼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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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와 노후, 상실과 무용을 받아들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아직 나의 나이에선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그 슬픔과 고통이 이 책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빛나던, 나의 쓸모를 매일 체감하며 사는 나이와 점점 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나의 필요를 매일 의심하며 사는 나이. 그 두 지점 사이의 나 속에서 겪을 혼란을 고스란히 나타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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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 버려지다시피 간 친척 집에서 주인공 조각은 눈치를 보며 집에서 쫓겨나지 않게 자신의 몫을 다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일련의 사건으로 그 집에서 나오게 되고, 살인청부업자 류의 눈에 띄어 일을 배우게 된다.

조각의 재능을 알아본 류는 같은 집에서 조각을 먹고 재우며 일을 가르치고, 조각은 류가 맡긴 모든 일을 유능하게 해낸다. 하지만 살인청부업 일이 그렇듯, 조각과 류 그리고 류의 가족들은 항상 위험에 처해있었고 류와 그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만다.


조각은 그 뒤로도 자신이 배운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살인청부업밖에 없음을 알고 그 일을 쭉 이어서 하다가 60대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젊을 때는 누구도 인정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으나, 나이가 들며 60대 여성 킬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은 조각의 실력에 의심을 품었다.

조각은 자신의 노화와 능력의 상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에 대해 느끼고 나서 다른 사람 눈에 서린 공허함과 연민이 보이기 시작한다. 살인청부업이라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만들고 지켜보았지만, 죄책감이나 연민을 느낄 수 없었던 젊은 시절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다 조각은 강박사를 만나며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다. 강박사에게 조금의 마음을 품고 그의 가족들까지 찾아가 보는 그런 일을 하며 스스로도 놀란다. 그렇지만 조각은 킬러였고, 강박사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조각은 망설인다.


조각이 망설이는 새, 투우는 조각의 변화를 눈치챈다. 조각이 처리한 대상 중 하나의 아이. 그것이 투우였다. 투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조각을 찾아 같은 업계에 발을 담가 살고 있었고, 항상 조각의 주위를 맴돌며 지켜보았다.

조각의 변화를 느낀 투우는 조각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빼앗기로 한다. 강박사의 딸을 납치해 조각과 결투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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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破果: 흠집이 난 과실

파과 破瓜: 여자 나이 16세

중의적으로 사용한 파과라는 제목이 재미있었다. 나이 16세에 일을 시작하게 되어, 인정받는 유능한 킬러였던 조각이 어느새 흠집이 난 과실이 되어버린 이야기. 오늘 수업하며 아이들에게 글의 제목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있다고 가르쳤는데, 구병모 작가는 단 두 글자로 책의 모든 내용을 압도해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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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포함하고 있었다 ‘


’그 의뢰인이 한 때 가지고 있었던 가족,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얼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만 한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것이다.‘


이 작가의 문장은 낯설었다. 흔하지 않은 단어의 조합이었고, 낯선 문장의 배열이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생소하고 신기한 단어와 문장의 조합으로 익숙한 그 느낌을 표현하는 신비로움이 좋았다.

또 좋았던 것은 조각의 인생을 샅샅이 엿볼 수 있었다. 불친절한 책은 인물의 내막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독자가 상상으로 채워가게끔 만드는 그런 방식의 책도 나름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매력은 조각의 아주 어렸을 때의 삶에서부터 점차 커가면서 조각이 일에 빠져들게 된 내막, 그리고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사람과의 사건 현재 조각의 상황까지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그 과정에서의 조각의 마음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덕분에 여성 킬러라는 쉽지는 않은 소재를 그저 인물 조각의 삶이라는 쉬운 소재로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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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투우였다. 투우는 왜 조각을 그동안 가만히 지켜만 봐 왔으며, 조각이 노인을 보고 안쓰러움을 느낄 때, 강박사에게 남다른 마음을 느꼈을 때 조각을 죽이고자 했는지. 그것이 투우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마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 이후로 자신은 조각을 찾는 것 그리고 복수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지키고 싶은 것이, 감정을 느낄만한 대상이 남아있지 않았고 조각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감정이 없이 그저 일만 하고 사는 그런 삶으로 네가 나를 끌어들이지 않았냐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죽이고 세상에 대한 기대를 살해하지 않았냐고. 그런 네가 어떻게 감히 다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고,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냐고. 그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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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행위가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


강박사의 가족들을 만나며 조각이 느끼는 감정을 적은 언어이다. 매일 사람을 죽일 궁리를 하며 남모르게 썩어갔던 조각의 마음, 반지하에 곰팡이가 가득 차버린 자신의 마음속과 다르게 웃고 사랑하는, 따뜻하게 양지바른 곳의 사람을 보는 그 느낌을 잘 풀어쓴 것 같아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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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비싼 값으로 팔려 사람들의 입 속을 가득 채워주던 복숭아가 썩으면 만지기도 싫은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쓸모 있던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아무도 만지기 싫어하는 그런 어떤 것이 되어버린, 그래도 살아남고 싶은 미련이 남은 조각의 슬픔이 묻어나는 문장이다.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 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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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러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이 책의 마지막도 참 마음에 들었다. 노인이 되어버린 조각이 네일아트를 받는. 한창 때는 날카로운 실력으로 ‘손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이 가고, 늙어서는 손톱을 관리받는 그런 장면을 그려낸 것. 그게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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