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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10. 2019

날이 밝았다

육아와 사색_ 4

날이 밝았다. 새벽 4시쯤인가 수유를 시작한 것 같은데 잠든 아기를 어깨에 걸쳐 안은 채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고요한 아파트 단지 내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민다. 아기 울음소리에 촉각을 기울이며 선잠을 자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홀로 깨어 수유를 하려니 울컥 외롭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눈물지었던 밤이다.




출산 전 임신부들은 모유수유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모유수유를 한 아기가 분유 수유를 한 아기보다 면역력이 강한 것은 물론 IQ까지 높다고 한다. 아무리 장점이 많다 해도 WHO와 UNICEF까지 동원하여 계속 모유수유의 당위성을 전파하니 강요 당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이 무서운 것은 그렇게 반복해서 들은 내용이 머릿속에 새겨져 나도 모르게 배운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고 보니 머리로는 모유수유에 집착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모유수유에 성공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많은 모유수유 교육에는 엄마의 의지만 있으면 모유수유에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는데, 현실에 부딪쳐보니 배운 것과 많이 달랐다. 물론 엄마의 의지가 중요한 요소지만, 젖양이나 엄마의 건강 상태 등의 조건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며 유두혼동이 오기 쉽게 만드는 병원이나 조리원 환경도 여기에 일조한다. 아기의 기질이 주는 영향은 물론이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다.


나는 다행히 젖양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문제가 없어서 비교적 순조롭게 모유수유에 정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시간을 ‘순조롭게’라고 표현해도 될까? 유두 통증, 수유량을 측정할 수 없어 매사 아기가 배부르게 먹었는지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점, 손님이 왔을 때 수유의 불편함 등 다양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유수유는 24시간 아기와 엄마가 전적으로 밀착하도록 해주는데, 다른 말로 하면 아기를 먹이는 모든 책임을 엄마가 진다는 뜻이다. 신생아 돌보기의 첫 한 달은 ‘잘 먹느냐’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거의 하루 종일 먹고, 매일 체중이 20g 이상 늘어나는 게 보여야 한다. 하지만 빠는 힘이 약하고 위가 작은 신생아는 한 번에 얼마 먹지 못하고 잠들어버린다. 그리고 1시간, 2시간 후에 또 배고파 운다. 생후 한 달이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3시간 정도 버틸 수 있는데, 말이 3시간 간격이지 실제로 양쪽 가슴을 차례로 물리고 아기를 세워 트림시키려면 1시간은 매달려 있어야 한다. 다음 수유까지 남은 2시간 남짓은 아기 기저귀를 갈고 세탁기를 돌리는 등 밀려있는 일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밤에도 예외는 없다. 3시간마다 깨서 아기를 먹인 후 2시간을 넘기지 못하는 조각 잠을 자며 밤을 보내고 나면 오히려 잠들기 전보다 몸이 더 무겁다. 그리고 부족한 수면을 낮잠으로 추격하려고 하루 종일 예민해진다. 수면 박탈을 고문의 일종으로 사용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이거 실화야?'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헛웃음을 치고 있다. 사람이 계속 이렇게 생활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모유수유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걸까?


수면 부족을 곱씹는 시간이 많아지니, 점차 피곤이 감격을 덮는다.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면 아기를 낳은 기쁨보다 육아의 고충에 대해 더 많이 떠든다. 피해의식이 쌓여 아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날카로워진다.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유 시간에 모유수유와 신생아 돌보기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려고 맘 카페를 검색하는데, 남편이나 부모님을 원망하는 분노의 글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여자에게 육아의 짐을 다 맡기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Photo by it's me neosiam from Pexels


동이 환하게 터 금세 새벽이 아닌 아침이 되었다. 연체동물처럼 늘어져 있는 아기를 조심조심 아기침대에 뉘었다. 눈물도 흘리고 원망도 실컷 한 밤이었다. 어느새 당당히 떠오른 아침 해를 보니 정신이 조금 맑아진다. 잠 빚을 갚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차라리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하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육아가 아니더라도 인생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는 종종 찾아온다. 여유로운 한량 같은 삶이 지속되는 게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살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쁜 시기가 온다 해도 그런 생활이 영구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매일 조각난 잠을 자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평생 그렇게 살 것처럼 침울해질 필요없다. 육아 말고도 인생에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찾아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리 호들갑 떨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전념하자. 아기에게 전념하자. 이 작은 아기가 나의 전념을 필요로 한다. 갑작스레 세상으로 떨어져 나온 이 아기야 말로 잘 먹고 잘 자기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적어도 이 아기가 먹고 자는 데, 그러니까 생존하는 데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내가 잠 못 자고 내 시간 못 갖는다고 좌절하지 말자. 육아는 복합적이고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지금의 상황에 온몸으로 부딪칠수록 이 작업을 빨리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기의 생체리듬을 이해하고 나의 하루를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엄마 됨’으로의 전념이 현재의 피로를 극복하는 지름길일 거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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