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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Apr 24. 2019

임산부는 달리고 싶다

임신과 사색_ 출산을 하루 앞두고

임신은 축하받아 마땅한 경사지만 임산부의 10개월은 제약으로 점철된, 일종의 ‘수행’과 같은 시간이다.


술과 담배처럼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빵 같은 밀가루 음식, 인스턴트 음식 먹기처럼 가급적 지양해야 할 일까지 고려해야 할 생활수칙이 참 많다. 머리카락 염색이나 펌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손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단다. 임산부는 이런 외적인 행동은 물론이고 극히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생각과 감정까지도 태아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다. 좋은 이야기를 듣고 좋은 말을 하고, 화내지 않고 마음도 평화롭게 가지려고 애쓴다. 물론 이 모든 수칙을 지키는 데 성공하는 건 극히 이상적인 경우지만, 여하튼 잘하려고 생각하면 끝도 없는 게 임산부의 생활수칙이다.     


임신 막바지에 들어서자 내 몸 사용의 제약을 극복하느라 하루 종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실 ‘내 몸’이라 표현하기에도 참 내 몸 같지 않은 몸이다. 일단 앉아도, 서도, 누워도, 편한 자세를 찾을 수 없다. 오래 앉아있으면 거대한 배가 명치를 압박하여 숨이 답답해지고, 서 있으면 무릎과 발목이 17kg나 늘어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5분도 못 되어 시큰거린다. 그렇다고 누워있으면 되나? 바로 눕는 것은 불가능하고, 옆으로 누워도 목과 어깨, 허리로 이어지는 신체 부위들이 제각기 어색한 위치에 서서 불편하다고 아우성이다. 자세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에도 제한이 많다. 크고 무거운 복부 때문에 허리를 숙일 수 없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으나 팔을 쓰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 이를테면 배가 싱크대에 닿아 팔이 싱크 가까이 가는 것을 막기 때문에 설거지가 길어지면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나는 키가 작은 편이라, 원래 팔이 긴 사람은 이 정도는 아닐 수도 있다).        

Photo by Filip Mroz on Unsplash


미친 듯이 달리고 싶다. 적당히 달려가는 정도 말고, 100미터 기록을 위해 달리듯 숨을 헉헉대며 정신없이 뛰고 싶다. 계주의 마지막 주자가 되어 응원하는 이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전력 질주하고 싶다. 지하철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구둣발도 아랑곳 않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고 싶다. 도망가는 친구를 붙잡기 위해 하얀 운동화에 온 체중을 싣고 힘차게 땅을 차듯이 달리고 싶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러닝머신에 올라 속도를 점점 높이며 끝없이 달리고 싶다. 숨이 차서 멈추고 싶어 질 때가 지날 때까지 뛰고 싶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오다가 어느 순간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고 붕 떠 있는 듯,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 때까지.     



      

내일은 제왕절개 수술로 임산부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이 배가 가벼워지면, 나는 곧 전력 질주도 할 수 있는 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임신’이라는 1라운드가 끝나면 ‘육아’라는 2라운드가 시작된다. 주변에 임신의 고충을 털어놓으면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은 거다’며 의미심장한 (아니 사실은 의미가 분명한) 웃음을 짓는다.


아기를 낳고 나면 몸은 가벼워지겠지만 달릴 시간 따위가 없을 것이다. 전력 질주는커녕 밥 먹고 잠 자는 기본 욕구도 포기해야 한다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상상해본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신체 제약과 보이지 않는 태아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해소되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스러운 작은 아기 때문에, 어쩌면 육아가 임신보다는 할 만하지 않을까?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아기를 낳고 육아를 경험한 이후에도, 나에게 고충을 털어놓는 임산부에게 육아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임신 과정 역시 만만치 않은 어려움임을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출산을 앞두고 남은 딱 하루. 당분간 (아니 꽤 오랜 기간 동안) 가지지 못할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내면 좋을까 고심하다 결국 집 앞 카페로 향했다. 가끔씩 혼자 카페에 가서 몇 시간씩이고 머물며 책을 읽거나 공상을 하는 게 나를 충전시키는 힘이었는데, 몸이 무거워진 이후로는 자세도 자꾸 바꿔야 하고 화장실도 자주 들락거려야 하니 거의 집에만 있었다. 내일부터는 내 몸이 아무리 가벼워도 돌보아야 할 자그마한 생명체가 앙앙 울고 있어 그 옆을 잠시도 떠나지 못할 테니, 카페에 머물며 음미하던 혼자만의 시간은 신기루 같은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카페인이 적은 차 한 잔 주문하, 오늘을 떠나보내는 아쉬움내일을 기다리는 두근거림을 한 스푼씩 넣 천천히 홀짝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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