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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24. 2019

해갈을 꿈꾸며

육아와 사색_ 7

신기하게도, 나를 위한 시간이 조금씩 확보된다. 보석이의 밤낮이 정착되며 저녁 8시경에 이른바 ‘육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기는 여전히 자다가도 3시간 간격으로 먹기 때문에 완전한 퇴근은 아니지만, 밤잠을 자다 배가 고파서 깬 아기는 배를 채워주면 잠투정 없이 조용히 다시 잠들어주기 때문에 적어도 재우는 스트레스는 없다. 눈도 안 뜨고 꿈꾸듯 꿀떡거리며 젖을 먹는 보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장을 넘기거나 핸드폰으로 할 일을 하다가 잠든 보석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면 내게 확실한 2시간이 허락된다. 아기의 적정 수면시간이 성인 수면시간의 두 배 가까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보석이가 잠들면 밀린 설거지, 젖병 소독, 욕실 정리, 빨래, 간단한 요리 등 서둘러 밀린 집안일을 한다. 집안일을 빨리 마칠수록 내 시간이 늘어나니 빠르고 정확하게 집안일을 마치기 위해 초능력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보석이가 태어나기 전인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시간이 범람하는 생활에 익숙했는데, 신생아 돌보기에 좌충우돌하다 모처럼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니 어색하다. 급류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떠내려 오다 간신히 뭍에 다다른 생존자처럼, 금세 급류가 나를 또 덮칠까 봐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기 울음소리 환청이 들려 보석이가 자는 방 앞을 기웃거리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남아있는 집안일을 발견하고 손을 뻗는다. 크지도 않은 살림인데 바뀐 계절 옷 정리나 생필품 구입, 가계부 기입 등 자잘한 할 일이 늘 끝이 없다. 잠잘 시간도 모자란 판에 눈에 띄는 모든 집안일을 다 해결하려고 들면 나를 위한 시간 따위 절대 가질 수 없다. 


육아가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 자신이 소멸되는 듯한 느낌이 가장 힘들다. 엄마로서 다시 태어나는 압도적 경험이 아름답고 경이롭기는 하나,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들어왔던 나 자신이 너무 과격하게 변화하는 것에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정신과 신체 모두가 '엄마'로의 기능에 최적화되었으며,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즐겨 입는 옷, 내 개인 시간에 자주 하던 활동들이 갑자기 박탈되었다. 원래 나라는 사람이 어떠했는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난 기억처럼 희미하게 느껴진다.


무력한 아기는 생존을 위해 엄마와 전적인 동일시를 필요로 한다. 갓난아기는 '나'와 타인, 즉 엄마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로 엄마가 아기의 자아가 되어주어야 한다. 아기의 불쾌와 유쾌를 알아채고 감정을 읽어주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엄마의 전자동 시스템 속에서 아기는 안온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기와 전적인 동일시를 해서는 안 된다. 아기에게 유능한 자아를 빌려 줄 수 있으려면 오히려 엄마 고유의 자아가 확고하고 건강해야 한다. 아기에게 엄마가 되어줌으로써 나 자신을 다 잃는다면 오히려 건강한 엄마의 역할을 지속하기 어렵다. 


내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육아와 가사에 치이는 생활을 하면 할수록 '글쓰기'에 목이 마른다. 내용이 꼭 훌륭하거나, 다른 사람이 보고 인정해주는 글이 아니어도 좋다. 아기에게 나를 온전히 희생하는 시간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멀찍이서 내 영혼을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투자다. 보석이의 엄마가 되어가는 이 유일하고도 특별한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치열하게 기록해야 한다. 수시로 핸드폰을 열고 수첩을 열어 스쳐가는 생각들을 사로잡아 두자. 육퇴를 하고 시급한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나에게 1시간 정도 글을 쓸 시간을 주자. 가물어 있는 정체성에 물을 주는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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