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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27. 2019

낡은 책 한 권과 함께 찾아온 봄

육아와 사색_ 8

아기는 젖 먹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아기도 나도, 모유 수유에 익숙해지니 조금 더 목가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익숙하게 젖을 무는 아기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기에 서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독서대를 가져왔다. 이 얼마만의 '읽는' 행위인가? 이제 전쟁 같은 육아 중에 잠시라도 책 읽는 여유가 생기는 수유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실제 책장은 많이 넘기지 못한대도, 영혼이 충전되는 느낌이다. 친구가 생일선물로 보내준 <돈키호테>를 읽기 시작했으나 오랜 공복 후 한 술 밥에 격렬히 반응하는 위장처럼 책에 대한 허기가 급작스레 몰려온다. 육아의 방향성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육아서도 읽어보고 싶고 말이다.


안 그래도 쌀쌀하던 날씨가 풀리고 아기도 '조금' 자라 아기띠를 하고 외출을 해볼 만해졌다. 유모차는 아직 장만하지 못했고 이 조그만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달린다는 상상도 잘 안 된다. 아기띠를 단단히 여미고 용기 내어 밖으로 나왔다. 겨울에 태어난 아기가 놀랄까 봐 차마 집안까지 전해지지 못했던 봄이 이미 세상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기는 난생처음 맡아보는 봄내음에 놀랐는지 아무 말 없이 아기띠 속에 파묻혀 있다. 오랜만에 햇볕을 쬐니 웅크리고 있던 온몸의 세포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굳은 관절을 편다. 특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던 사고들이 기지개를 켜는 게 느껴진다. 엄마 됨에 매진하느라 경직되어 있던 나의 몸과 마음에 비로소 봄이 스며들었다.


용기를 내어 집 근처 도서관에 가 봤다. 아기가 울기라도 하면 바로 튀어나와야 하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뒤꿈치를 들고 조용한 종합자료실을 걷는다. 얼마만의 책 내음인가? 가슴이 두근거려 책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데, 아기가 끙 소리를 낸다. 아기에게 책 냄새를 맡게 해 준 것으로 만족하고 자료실을 빠져나오려다가, 누군가 반납 서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책 하나를 서둘러 대출했다. 다음번엔 빌릴 책의 위치를 미리 적어두었다가 번개 같이 책을 대출하리라. 


알고 보니 경기도 도서관에서는 '내 생애 첫 도서관'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임산부와 영유아에게 대출하기 원하는 책을 택배로 보내준다. 거동이 어려웠던 만삭 때, 아기를 낳고 첫 한 두 달 때 알았다면 감사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기와 함께 하는 외출 감행에 성공했으니 굳이 택배로 받을 필요가 없다. 내 발로 도서관까지 가는 설렘, 내 손으로 책장을 더듬거려 책을 뽑아오는 행복이 때로는 책 읽는 즐거움보다 크기 때문이다. 



어느 독서가가 반납 서가에 던져놓은 낡은 책,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내 독서 재개의 첫 문이 되어준다. 지친 아기 엄마를 회복시키고 그의 고갈된 영혼을 채우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좋은 책을 읽는 것만큼 지금 당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지금까지는 급작스럽게 부딪친 신생아 돌보기에 적응하는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보다 풍요로운 마음으로, 행복한 엄마로서 즐거운 육아를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가무잡잡해진 책의 첫 페이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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