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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un 29. 2019

백일의 기적

육아와 사색_10

흔히 말하는 ‘백일의 기적’에 나는 큰 기대가 없었다. 모든 아기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백일의 기절’이 오는 경우도 있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아기는 예정일과 다른 날에 태어날 텐데 ‘백일’이라는 시간적 구획이 얼마나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 아기는 예정일보다 3주나 일찍 태어났으니, 설령 백일의 기적이나 기절이 온다 해도 출생 나이에 올지, 교정 나이에 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먹이기도, 재우기도 까다로운 신생아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어느 정도 일관된 패턴을 갖추는 과정을 겪겠지만 그게 백일이라는 날수에 맞게 짠 하고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갓난아기 돌보기라는 끝없는 미궁에 빠진 아기 엄마를 현혹시키는 성급한 일반화일 것이다.


그런데 생후 105일째, 나는 정말 ‘기적’을 경험했다. 안아서 재워야만 했던 보석이가 백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누워서 자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엄마들은 백일에 어떤 종류의 기적을 경험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105일이 된 보석이가 보여준 변화는 내 체감 상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엄마인 내가 육아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뀌었으니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백일의 기적에 대한 냉소적이었던 입장을 철회하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어쩌면 나는 나에게만 백일의 기적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 수많은 엄마들의 경험을 평가절하했던 걸지도 모른다. 




3.16kg으로 태어난 보석이는 황달로 고생을 하느라 2.88kg까지 체중이 빠지기도 했지만 이후 매달 1kg 이상 꾸준히 늘어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었다. 아기의 몸무게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감사한 일이나 덕분에 나의 근력은 매달 한계를 갱신해야만 했다. 보석이는 자는 것만큼은 예민한 축에 속하는 아기다. 매번 잘 때마다 빠르면 20분, 길면 1시간씩 안고 서성거려야만 잠을 잤다. 참 사랑스럽고 예쁜 내 아기지만 하루 네댓 번씩, 6kg 넘는 무게를 안고 30분씩 집안을 걸어 다니고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기가 이렇게 잘 못 자도 괜찮은 건지, 다른 아기들은 어떤지, 내가 뭘 잘 못해줘서 잠을 잘 못 자는 건지, 엄마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등등, 걱정과 자괴감이 꼬리를 물었다. 


기적이 올 거라 상상도 하지 않았던 그날은, 오히려 재우는데 평소보다 오래 걸릴 듯한 낌새였다. 내 품에 안겨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리는 게 아니라 계속 몸을 뻗대며 칭얼댔다. 돌이켜보니 내 시큰거리는 손목이 그간 체구가 제법 커진 아기를 제대로 받쳐주지 못해 불편해서 그랬던 듯하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그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픈 손목을 잠시 쉬게 할 요량으로 보석이를 잠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자지러지는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워서 잘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묵직한 좁쌀 이불을 얹어주고 침대를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 그런데 웬일로, 울음을 멈추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손목이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침대를 좀 더 흔드는데 보석이의 눈꺼풀이 껌벅껌벅 내려앉는다. 어라? 이런 적은 처음이다. 내려놓자마자 터져 나오는 울음은 다시 안지 않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달래지지 않던 아기다. 작은 희망이 생겼다. 


그때 입술을 삐죽삐죽하더니 울기 시작한다. 역시나 하고 안아 올리려고 손이 나가는데 머리가 손을 막았다. 수면교육 관련 책에서, 잠들기 직전의 마지막 울음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울음이 아닐까? 좀 더 해보자. 놀랍게도 울음이 곧 잦아들더니 새근새근 잠들었다. 눕히고 나서 잠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이었다. 거실로 빠져나온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밀린 집안일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침실을 왔다 갔다 하며 잠든 보석이를 훔쳐보았다. 정말 이대로 잠든 것인가? 정말? 


다음날의 낮잠 시간에도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졸려할 때 침대에 눕혀 보았다.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려다가 좁쌀 이불을 척 덮어 양 팔을 고정시키니 울음을 멈추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속으로는 온갖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천연덕스럽게 침대를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 왜 그래 아마추어 신생아처럼? 백일 되면 다 누워서 자는 거야. 껌벅거리던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에헤라디야! 5분쯤 지나 아기침대 흔들기를 멈추고 나도 침대에 살짝 누워본다. 보석이는 미동 없이 잔다. 도대체 얼마 만에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보는지! 나는 흥분과 희열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누워서도 잠들지 못했다. 안아서 재워야만 잠에 드는 아기인 데다 특히 낮잠을 잘 때는 '등센서'가 작동해서 깊이 잠든 것 같아도 눕히기만 하면 깼다. 나는 낮잠을 자는 보석이를 안고 저린 팔을 주무르며 소파에 망부석처럼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혼자 아기를 돌보는 낮 시간에 침대에 눕는 일은 상상도 못 하며 지내왔다. 침대가 얼마나 포근하고 아늑한지 새삼 깨닫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을 보여준 보석이가 한결 더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보석이가 신생아를 갓 넘긴 50여 일부터 100일 무렵까지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잠에 까다로운 아기를 돌보는 묘수를 찾아 헤맸다. 수면교육에 관련된 책들을 열심히 찾아보고, 퍼버법이나 안눕법에 관해서도 많이 검색해보았다. 보석이와 나 자신을 위해서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여러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별해서 시도했다. 수면교육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먹고 자는 일상의 패턴을 갖추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자칫하면 인위적으로 수유나 낮잠 간격을 맞추라는 걸로 오해할 수 있지만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바로는 월령 별로 평균적인 수유 간격, 낮잠 간격이 있다는 걸 이해하면 내 아기 고유의 패턴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인 듯하다. 가끔 예외도 있지만 예상되는 수유 텀, 낮잠 텀에 맞춰 먹이고 재우면 보석이는 대체로 잘 먹고 (전보다) 잘 잤다. 하지만 장시간 울리며 재우는 방식은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참고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아기의 본성을 거스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의 기질이 다 다르니 퍼버법으로 쉽게 수면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석이처럼 잠에 민감하고 눕는 것을 거부하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강경한 방식을 서둘러 적용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내 직감을 존중했다. 


돌이켜보니 아이의 기질과 패턴에 대해, 그에 맞는 적절한 돌봄에 대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가 쌓이고 쌓여 백일의 기적에 기여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수유와 수면의 리듬을 갖추고 수면 의식을 꾸준히 치르며 기본을 닦아둔 상태에서 마침 백일 무렵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것보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때 비교적 자연스럽게 누워서 잠을 청하는 방법을 습득한 게 아닐까.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은 아기를 낳은 직후 서툴기 그지없는 엄마의 시기를 보내며 책을 읽든, 선배 엄마들의 경험을 구하든, 직감을 따르든 절실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그 어떤 육아 전문가도 이 한 아기에 집중하여 이렇게 사랑을 쏟아 궁리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백일 즈음이 되면 '내 아이 전문가'로서 첫 발을 뗀 엄마는 어느 정도 아기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 아기에 맞는 방식을 섬세하게 적용할 줄 알게 되어 기적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변화를 만나게 된다. 


아기를 낳으면 바로 '엄마'라는 이름을 얻지만 능숙한 엄마가 되는 일은 최소 백일 이상 걸리는 일이었다. 웅녀가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을 버텨 사람이 된 게 남일 같지가 않다. 정말 능숙하고 숙련된 엄마의 궤도에 이르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나 만큼 보석이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보석이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챌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데 자부심을 가져본다. 기적은 백일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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